159화.
한때 사천당가의 빈객으로 있었으나 소가주인 당자성과의 마찰로 일찍이 세가를 나온 걸로 유명했다.
무림맹의 비무대회에 나왔다가 옛 인연인 구연청을 만나서 함께 이가장에 온 것이다.
구연청 이상으로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독불장군과 같은 그가 이가장에 정착하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다.
이가장의 입장에선 나쁠 것이 없었다.
오히려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었다.
초절정지경에 근접한 고수가 둘이나 식구가 되었으니까.
허나 그때는 몰랐다.
그것이 이가장을 향한 어두운 먹구름을 몰고 올 줄은…….
* * *
쾅!
“부족해! 대성(大成)한 지 언제인데… 극성(極成)은 허상이란 말인가!”
황실의 숨은 실력자 사례감장인태감(司禮監掌印太監).
일명 태태감이라 불리는 그는 암중에 황실을 조종하면서도 여전히 거처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건 무공수련 때문이다.
그가 익힌 무공은 황실비고에서도 사라진 전설적인 절대 신공이었다.
이것은 그가 10성 대성에 오른 순간, 황실제일 고수로 만들어주었다.
허나 그걸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천외천(天外天)이라는 말처럼 하늘 밖에는 또 다른 하늘이 있음을 알았다.
그렇기에 12성 극성에 오르기 위해서 오랜 시간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덕분에 수년 전 11성에 오르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10성과 11성은 또 달랐다.
두 배 강해졌다고 자부하면서도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10성과 11성이 달랐듯 11성과 12성 극성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비교 자체를 불허했다.
“…혈마경이 완성되면 끝장이야!”
황제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천하의 태태감이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황실을 주무르는 그가 오랜 시간 칩거를 깨지 않는 것이다.
허나 방법은 있었다.
그 역시 극성에 오르는 것이다.
태태감은 혈마경에 필적한 전설의 무학을 익히고 있었다.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비밀 연공실을 나온 그는 한쪽에 쌓여 있는 비밀서신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나 같이 그에게 도움을 천하는 태감 및 고관들의 청탁서였다.
이를 본 태태감은 짜증스러웠다.
자신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는 그들을 계속 부려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허나 마음에 들지 않지만, 막상 버리기엔 아쉬웠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도움을 주기로 했다.
비밀서신을 훑던 그의 손이 멈췄다.
“내각대학사의 여식을 치워 달라? 오호? 고작 계집 하나 치워주는 걸로 혈천신단을 주겠다?”
그와 협력관계를 맺은 혈천의 서신이었다.
황실 실력자답게 황실비고의 영약을 수없이 복용한 그였다.
때문에 영단을 대가로 지불하겠단 것은 그리 매력적인 제안이 아니었다.
이미 영단으론 내공을 증진할 수 없는 수준에 올랐기 때문이다.
허나 혈천신단은 다르다.
혈천신단은 내공만 증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체질 자체를 개선하는 신단이었다.
물론 막대한 고통과 약효를 이겨내지 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마약이기도 했다.
극성에 오르지 못해서 초조한 태태감에게 혈천신단은 새로운 돌파구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죽이는… 것은 뒤처리가 조금 귀찮겠지.”
무공도 익히지 않은 일개 계집이지만, 알려지지 않은 용담호혈이라는 이가장에 있었다.
어지간한 고수를 움직여선 그녀를 죽이기 어렵단 뜻이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내각대학사의 여식이었다.
수년 사이에 무섭게 영향력을 키운 그의 여식이 죽는다면 귀찮아질 것이 뻔했다.
아직 시간이 필요한 태태감으로서는 그건 곤란했다.
게다가 문교교를 처리해달라는 이유가 외조모인 칠현마금 독고혜 때문이란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녀가 이가장에서 떠나면 독고혜 역시 이가장에 잔류할 이유가 없어진다.
혈천이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독고혜의 음공은 독만큼이나 성가시기 때문이다.
“으음… 그러고 보니 그의 아들이 아직 혼자였던가? 그래, 그럼 되겠어.”
결정을 내린 태태감은 붓을 들었다.
짧지만 항거할 수 없는 글을 담았다.
그렇게 적은 서신을 곱게 접어서 해동청의 다리에 달린 작은 통에 넣었다.
하루에 천리를 난다고 해서 천리신응이라 불리는 해동청은 황실에서도 많은 개체를 보유하지 못했다.
그런 귀한 해동청이 황궁을 떠나 어딘가로 향했다.
그 시각, 어딘가에서는 또 다른 음모가 시작되고 있었다.
* * *
서걱!
지독하게 차가운 검이 허공을 갈랐다.
그 순간 붉은 피가 비산했다.
그럼에도 비명소리 하나 없었다.
‘도대체 어떤 자들이기에…….’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을 뿐 화옥령과 이현영은 치를 떨었다.
며칠 전부터 시작된 암습.
매우 뛰어난 솜씨였으나 한천마녀라 불리는 화옥령의 기감을 속일 순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살수들은 매우 뛰어났다.
일급 아니, 그 이상으로 추정되었다.
더구나 수시로 암습을 해오니 그녀들이라도 지쳐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상황이 어이없는 것은 사실 살수들도 다르지 않았다.
초절정고수인 한천마녀가 강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해도 너무 강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런!”
결국 살수들도 승부수를 던졌다.
살수 열다섯이 화옥령의 발을 묶는 순간, 또 다른 살수 셋이 그녀의 제자 이현영을 노린 것이다.
너무도 강한 화옥령 대신 그녀의 제자를 죽여서 화옥령의 심기를 흔들려는 속셈이었다.
그들의 의도가 먹혔는지 화옥령은 자신을 노리고 있던 살수들을 뿌리치고 제자를 도우려고 했다.
살수들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챙!
푹!
“끙!”
“영아!”
“괜…찮습니다.”
허나 걱정은 무의미했다. 한천마녀 화옥령에게 가려졌으나 이현영 역시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십여 년의 가르침이 헛되지 않았다. 살수들의 암습에 부상을 입긴 했으나 그들을 처치할 수 있었다.
덕분에 혈살객들은 당황스러웠다.
상부의 특별지시를 받고 움직인 그들 역시 한천마녀를 벨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허나 상부에서 보내줄 고수가 올 때까지 그녀의 발을 최대한 묶어야 했다.
이미 첫 임무를 완벽하게 완수한 그들은 이번 임무 역시 어렵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그들의 오만은 철저하게 깨지고 말았다. 괜히 무림에서 그녀를 한천마녀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벌써 십여 명의 혈살객을 잃었다. 무림의 특급살수에 버금가는 그들이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럼에도 한천마녀는커녕 그녀의 제자조차 베지 못했으니 혈살객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이놈들!”
친딸처럼 아끼는 제자 이현영의 목숨까지 노리자 화옥령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내공을 아끼기 위해서 참고 있던 절초를 꺼냈다.
“한월만천(寒月滿天)!”
“큭!”
“윽!”
서걱! 서걱!
푸푹! 서걱!
한기가 어린 검기가 사방으로 비산하며 주변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그 섬뜩하고 예리한 검초에 기회를 엿보던 혈살객들은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고깃덩이가 되어버렸다.
화옥령도 무리였는지 그녀의 숨소리가 무척이나 거칠었다.
“헉… 헉… 헉…….”
“사부님! 괜찮으세요?”
“헉… 후… 후…… 괜찮… 이런, 큭!”
“사부님!!
숨을 몰아쉬며 소모한 내공을 급히 회복하려던 화옥령은 제자 이현영을 옆으로 밀치며 검을 휘둘렀다.
채챙!!
갑작스러운 암습 때문인지 아니면 그만큼 강력한 검격이었는지 화옥령은 공격을 막아냈으나 그녀답지 않게 휘청거리고 말았다.
이현영은 사부의 곁으로 가서 주변을 경계했다.
그러자 복면을 쓴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상한 점이 있었다.
복면에 눈으로 볼 구멍이 없다는 점이었다.
허나 그 점에 의문을 가질 여유 따윈 없었다.
“후. 영아… 물러나라.”
“사, 사부님… 하지만…….”
“나는 괜찮다. 그리고 네가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화옥령의 말에 이현영은 입술을 깨물며 뒤로 물러났다.
자신은 도움이 아니라 짐이 될 수 있단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현영은 괴한의 존재를 아예 느끼지 못했다.
사부가 아니었다면 당했을지도 몰랐다.
고집을 부려서 될 상대가 아니었다.
―여차하면 화산 아니, 무림맹으로 가거라.
―사부님! 설마 저 혼자 가란 말씀은 아니시죠!
―이 사부의 말을 들어! 확실하지 않으나 저들의 목적은 독고구검일 거야. 누구인지 모르나 저들의 뜻대로 해줄 순 없다!
―…….
이현영은 자신의 무력함에 분노했다.
괴한은 사제지간이 더 이상 대화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챙!
“어림없다!”
화옥령의 검은 빠르고 날카로웠다.
하지만 괴한의 검은 그에 못지 않았다.
너무도 쉽게 그녀의 검을 막았다.
그가 결코 화옥령의 밑이 아니란 것을 증명해주듯.
순식간에 십여 합을 나누었을 때, 화옥령의 얼굴이 굳어졌다.
괴한의 정체를 눈치챘기 때문이다.
“당신이 왜…? 역시 사파는 사파란 말인가!”
그 순간, 화옥령의 검에서 지독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극한으로 끌어올린 냉천한월공(冷天寒月功)으로 펼치는 한월검강이었다.
상대가 무른 검격으론 상대할 수 없는 고수임을 알기 때문이다.
허나 괴한의 검에서 그 못지않은 검강이 발현되었다.
콰쾅!
“울컥! 우웩!!”
“크윽!”
검강과 검강의 격돌.
무사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문제는 화옥령의 몸 상태가 최악이란 점이었다.
쉴 새 없이 몰아친 살수들의 암습에 한월검결의 절초인 한월만천까지 펼쳐서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초절정고수인 괴한의 검강과 충돌했으니, 내상이 깊어진 것은 당연했다.
결국 화옥령은 피를 토하고 말았다.
괴한이라고 무사하진 못했다.
처음으로 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역시 상당한 충격을 입었다는 증거였다.
허나 화옥령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예상대로 괴한은 화옥령에 비해 양호해 보였다.
그는 검을 쥐고 그녀를 바라봤다.
“아, 안 돼! 사부님! 컥!”
“여, 영아……!”
쾅!
화옥령의 지시로 물러나 있던 이현영이 그녀 대신 괴한의 검을 막았다.
허나 두 사람의 무위 차이는 너무도 컸다.
절정지경에 오른 이현영이 일검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고 나가떨어질 정도였다.
“사…부…님…….”
방해꾼이 사라지자 괴한은 다시 화옥령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쓰러진 제자를 본 화옥령의 눈이 뒤집혔다.
허나 마음과 달리 몸이 따르지 않았다. 덕분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를 악무는 것뿐이었다.
퍽!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검을 쥔 괴한의 발 앞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괴한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다시 화옥령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또 다시 발 앞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괴한은 화옥령에게 다가가는 대신 주변을 경계했다.
발 앞에서 폭발이 일어난 것은 검강. 그것도 무형검강(無形劍罡)에 의한 폭발임을 깨달은 탓이었다.
그걸 증명하듯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검을 쥐고 있었다. 백면(白面)의 탈(假面)을 쓰고 있기에 정체를 알 수는 없었다.
괴한과 백면탈은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눌 뿐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화옥령의 귓가에 분명 기억에 있는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러나지 않고 뭐하는 겐가!
움찔.
그녀는 전음을 보낸 자가 백면탈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 순간, 화옥령의 눈이 커졌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