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계획이 틀어져도 너무 틀어진 셈이었다.
“기밀서류를 모두 파기했다고 했으나 믿고만 있을 수는 없지. 만약을 대비하게.”
“존명!”
무림맹의 손에 비밀장부가 들어갔단 사실까지 알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예감이 좋지 않은 혁련용후는 심복인 잠혼을 움직였다.
원표와 같은 음흉한 자라면 분명 뒷주머니를 따로 찼을 테니까.
“미리 손을 써 놨으니 실질적인 피해는 없겠지만, 도대체 누구지? 사방환위야 그렇다고 쳐도 원표 그자는 절대 만만한 자가 아닌데 말이야. 게다가 몽혼혈라진까지…….”
혁련용후는 예감이 좋지 않았다.
유가밀공을 익힌 원표와 몽혼혈라진이라면 자신도 장담할 수 없었다. 즉, 최소한 자신과 동등한 고수가 움직였다는 것을 의미했다.
“누구지. 무림맹이라도 그게 가능한 자가 얼마 없을 텐데 말이야.”
정파무림의 연합체인 무림맹이었다.
천하의 고수 절반이 속해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허나 아무리 무림맹이라도 십정을 동원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니, 어렵다고 봐야 한다.
십정 외에 이런 일이 가능한 자는 열을 넘지 않았다.
그들 대부분이 전대 노고수들이었다.
그 무거운 엉덩이로 이런 일을 할 리가 없었다. 최소한 혁련용후의 판단이 그러하며, 그것이 상식적인 범주였다.
“내가 파악하지 못한 자가 있단 말인가. 도대체 누구지?”
그로서는 얼굴이 펴지지 않았다.
정보의 부재로 인한 판단 오류는 지략가인 그에게 무척이나 치욕적인 일이었다. 허나 그가 걱정할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가, 가주님!”
“무슨 일인가.”
“무림맹이… 무림맹이……!”
혁련용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불길한 예감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 * *
“오, 오해입니다! 오해란 말이야!!”
수많은 자들이 무림맹의 뇌옥에 끌려 들어갔다.
허창상단의 비밀장부에 너무도 상세히 기록된 덕분에 크게 조사할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하나같이 무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무림맹은 그런 물렁한 집단이 아니었다.
비록 뒷돈을 받아 정신 못 차리는 자들이 있다고 해도 절대 다수는 의협심을 불태웠다.
특히 비무대회 후 창설된 별동대는 어떻게든 자신들의 진가를 보이려고 눈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비교적 때가 덜 탄 그들을 움직이니 더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다.
“단주님. 더 이상 빈 조사실이 없습니다.”
“골치 아프군. 알겠네.”
감찰단을 맡은 황보세가의 소가주 천왕신권(天王神拳) 황보관영은 골머리를 앓았다.
혼세교의 일로 위축된 세가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서 자청해서 맡은 감찰단이었다.
설마 이렇게까지 곤란한 지경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허나 곤란한 지경에 빠진 것은 황보관영만이 아니었다.
무림맹의 주축인 무림세가와 대문파의 대표들이 맹주전에 우르르 몰려갔다.
* * *
“맹주님! 한 식구끼리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마, 맞습니다. 사기만 저하될 뿐입니다. 중단해주십시오!”
십대세가 급이라 할 수는 없으나 한 성(省)에서 제법 어깨에 힘을 주는 무림세가나 대문파를 이끄는 고수들 십여 명이 맹주전을 찾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감찰단의 일을 성토했다.
감찰단의 뇌옥에 갇힌 자들은 수두룩했다.
그중에는 이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자들도 있었다.
“맹의 식구이니 잘못된 것을 보고도 모른 척하란 뜻인 겐가! 승천각주, 단우세가주.”
“흠흠… 그런 말이 아닙니다. 다만…….”
쾅!
과연 오제는 오제였다.
백의무제는 기세만으로 좌중을 압도했다.
하나 같이 초절정지경 혹은 그에 근접한 고수들이지만, 화경고수 앞에서는 무의미했다.
괴로워하는 그들을 바라보며 무림맹주는 차갑게 말했다.
“조사결과 죄가 없다면 방면될 것이네. 허나…! 죄가 있다면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할 걸세. 무림맹의 식구라도 죄지은 사람을 덮어줄 생각은 없네. 무림맹의 식구이기에 더욱 철저하게 조사할 걸세.”
“…….”
“그럼에도 불만이 있다면 뒤가 구린 것이라 간주하고 자네들 역시 조사하겠네. 알겠나?”
“무, 물론입니다.”
그간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기에 잊고 있었으나 백무강은 오제인 백의무제였다.
그는 능력이 없어서 세력을 일구지 못한것이 아니었다.
화경은 초인지경이라고 불린다.
즉, 백의무제 한사람이 대문파 이상의 힘을 가졌단 뜻이었다.
그걸 간과하고 무림맹주를 압박하러 왔으니 호되게 당하고 도망치듯 물러나는 것이 당연했다.
몰려왔던 십여 명이 돌아간 후, 무림맹주는 한숨이 나왔다.
“후… 역시 맹주의 자리는 나에게 맞지 않아. 현우를 찾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지만, 살아는 있는게냐. 현우야…….”
이십여 년 전 잃어버린 손자 백현우.
백의무제(白衣武帝) 백무강.
무위가 하늘에 닿는다는 초인이지만, 혈육 앞에서는 한낱 노인에 불과했다.
그는 오늘 따라 더욱 무림맹주란 자리가 무거웠다.
하지만 견뎌야 한다.
손자를 찾을 때까지는…….
* * *
쾅!
“젠장, 늙은이들…! 감히 본가를 뭐로 보고!!”
독종 당철영을 대신해서 사천당가를 이끌고 무림맹에 온 암군 당자성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사천당가의 비호를 받는 중소방파 세 곳의 주인이 뇌옥에 갇혔다.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그들이 사천당가.
아니, 당자성의 지시를 받는 방파임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잡혀 갔다는 것은 당자성을 안중에 두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평소라면 사천당가의 이름을 내세워서 윽박지르겠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감찰단주가 황보세가의 소가주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의 일로 휘청거렸다고 해도 오대세가는 오대세가였다.
게다가 무림맹주가 뒤에서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사천당가의 이름을 내세울 수 없었다.
아무리 세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고 해도 화경고수이기 때문이다.
특히 백의무제는 팔왕보다 강하다는 오제.
독종이라도 그의 앞에선 이름이 퇴색된다.
하물며 암군(暗君) 정도는 어찌할 수 없었다.
“게다가 본가의 칠대빈객이라고 불렸던 늙은이가! 본가의 호위무사나 하던 놈도 이기지 못해서 본가의 이름에 똥칠한 것도 부족해, 이젠 본가를 나가? 내가 좀 뭐라고 했다고!!”
사천당가의 칠대빈객인 적양신장 구연청을 비무대회에 내보낸 일로 주변의 빈축을 샀다.
물론 상대가 천하의 사천당가이니 대놓고 비웃지는 않았으나 뒤에서는 온갖 비난을 했다.
그걸 감수하고 비무대회에 내보냈다.
무림맹의 별동대는 그걸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런데 패배하고 말았다.
그것도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세가의 호위무사였던 애송이에게.
그 일로 흥분한 당자성은 의식을 되찾은 구연청을 모욕했다.
아무리 사천당가의 빈객으로 있다고 한들, 구연청은 전대 고수였다.
그런 모욕을 참을 리가 없었다.
결국 그는 사천당가의 빈객 자리를 내놓았다.
아니, 애초 비무대회를 나가기 위해서 빈객에서 나온 상황이었다.
물론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었지만.
“흥, 세상이 녹록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놈이 감히 본가와 척을 질 생각으로 늙은이를 받아들여?”
적양신장(赤陽神掌) 구연청.
분명 대단한 고수였다.
무림 백대고수라고 불리는 초절정고수는 아니지만, 문턱에 오른 고수 중 한 명이었다.
게다가 그가 익힌 적양신장은 극양의 장법으로 매우 뛰어난 절학이었다.
어떤 무림세가나 대문파라도 환영할 기인이었다.
허나 실제로 그를 받아들일 곳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천당가의 눈치가 보이기 때문이다.
같은 오대세가도 사천당가는 부담스럽다.
그들의 독과 암기는 암습과 대량살상에 특화되었기 때문이다.
허나 오히려 세상이 녹록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자는 바로 그였다.
사천당가의 눈치를 보지 않는 곳은 분명 존재했다.
“돌아오고 싶다면 내 앞에서 개처럼 꼬리를 흔들어야 할 것이다. 늙은이…….”
* * *
“괜찮겠습니까? 좋은 기회였는데…….”
“물론 제게 과분한 기회였지요. 의협대(義俠隊)의 조장이라니… 허나 표국을 맡고 있는 이상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주님.”
허창상단의 비밀장부로 인해 무림맹이 뒤집어졌을 때, 이가장의 일행은 정주로 돌아가고 있었다.
혼란에 휘말리지 않게 총군사가 배려해준 덕분이었다.
정주에서 출발할 때보다 인원이 늘어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어깨에도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
이가장의 대표로 출전한 유백이 64강에 오른 것은 물론 부상만 아니라면 32강에 출전할 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무대회의 성적은 물론, 그의 가능성을 높이 샀다.
그들은 별동대의 하나인 의협대의 조장 자리까지 제안한 것이다.
무척이나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유백은 거절했다.
신룡표국를 맡고 있는 입장에서 의협대에 들어갈 수 없었다.
중소표국의 국주 자리와 무림맹 별동대 조장 자리는 비교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생각할 것도 없이 받아들일 제안을 그는 거절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습니다. 유 국주님.”
“아닙니다. 오히려 제게 이런 기회를 주신 장주님께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언젠가는 이룰 성취였다.
허나 그 시일을 바짝 당긴 것은 분명 이현성의 도움이 컸다.
직접 가르침을 준 것은 물론 검왕의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마련한 것도 이현성이었다.
그럼에도 이현성은 그의 기회를 자신이 뺏은 것은 아닐지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그때, 그의 눈에 장강어옹 규염과 함께 오고 있는 두 사람이 들어왔다.
놀랍게도 그들 중 한 명은 사천당가의 칠대빈객이었던 적양신장 구연청이었다.
유백의 64강 비무대상이기도 했다.
“정말 괜찮겠는가? 연청, 본장은 식객을 받지 않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선배도 이가장의 장로로 계신 것 아닙니까? 저도 슬슬 정착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당가의 처사도 성미에 맡지 않고…….”
놀랍게도 사천당가를 나온 적양신장 구연청은 이가장에 정착하려 했다.
사천당가를 나왔다고 해도 적양신장이었다.
그런 그가 이가장을 선택한 것은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그건 이가장보다는 유백에게 인간적인 흥미가 생겼기 때문이다.
몰락한 명가의 후예.
사천당가의 일개 호위.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던 사내.
그런 유백이 운이 좋았다고 해도 자신과의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물론 다시 싸운다면 십중팔구 이길 자신이 있으나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원동력 뒤에 이현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주저하지 않고 이가장을 선택했다.
비록 식객이 아닌 정식으로 이가장의 식구가 되어야 했지만.
식객과 가솔은 엄연히 다르다.
권한과 동시에 제약도 역시 존재하는 자리였다.
필요 이상으로 얽매이기 싫어 빈객으로 지내던 구연청답지 않은 결정이었다.
허나 더 신기한 것은 그의 곁에 있는 또 다른 사내였다.
“규 선배와 독고 선배가 장로로 있는 장원이라면 호법도 충분히 대단한 자리가 아닙니까? 안 그런가. 태언.”
“그렇지요.”
풍마참도(風魔斬刀) 육태언.
참마도(斬馬刀)의 일종인 양손대도를 휘둘려서 수많은 악인을 벤 협객이었다.
그가 익힌 무공의 사승(師承)은 사파 계열이었다.
허나 협을 알고 악을 미워하는 성품 때문에 정사지간으로 분류되는 인물이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