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정확히는 천자문(千字文)이었다.
즉, 글을 익히라는 뜻이었다.
아이들이 어리둥절해하자 부교두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미 아는 녀석들은 맞는지 점검하고, 모르는 녀석들은 그냥 외워라. 못 외우면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니 알아서들 하고. 아, 나도 인정이라는 것이 있으니 하루만에 다 외우라고는 하지 않겠다. 하루에 백자씩만 외워라. 그럼 열흘이면 다 외울 수 있겠지?”
부교두의 말에 대부분의 아이들은 사색이 되었다.
천자문을 알고 있는 아이들보다 모르는 아이들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보통 민가에서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는다. 아니, 가르칠 여력이 없다.
하루 벌어먹고 살기도 힘드니 공부시킨다는 것 자체가 사치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글을 아는 소수의 아이들은 그나마 먹고살 만한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었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나야 이미 글을 알고 있으니 상관없지만… 철우는 괜찮을까? 생각해보니 예전에 무척 힘들어했는데…….’
이현성의 집 역시 공부시킬 여력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글을 알고 있었다.
회귀 전에 이곳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지 그의 곁에는 항상 초운비가 있었다.
혈무곡까지 오는 마차에서 맺은 인연이 이어져 이현성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하게 된 것이다.
그런 그의 곁에는 초운비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 명이 더 있었다.
“철우야. 괜찮아?”
“성님… 저, 저는 공부가 도저히…….”
철우는 이현성보다 한 살 어린 7살이지만 덩치는 그보다 컸다.
지금뿐만이 아니다.
성장할수록 덩치가 더욱 커져서 힘으로는 혈살객 중에서도 제일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문제는 덩치와 힘은 타고났으나 그에 비해 머리가 부족한 편이었다.
물론 멍청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똑똑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라는 점이 문제였다.
“내가 가르쳐줄 테니까 한번 해보자. 저들이 못 하겠다고 해서 봐줄 리가 없잖아. 이 형을 믿고 해보자. 응?”
“예. 성님.”
“운비, 너는 혼자 할 수 있겠어?”
“예. 현성이 형. 해볼게요.”
초운비는 철우와 달리 신체적 능력은 뛰어나지 못했지만, 머리는 나름 괜찮았고 몸이 가벼운 만큼 민첩했다.
아직 체력은 부족했지만 점점 나아지고 있으니, 이 지옥에서 잘 적응해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너희가 살아남을 수 있게 도와주마.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다.’
“끄응…….”
철우는 끙끙거리며 돌아왔다.
부교두에게 얻어맞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현성이 옆에 붙어서 천자문을 세세히 알려준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덕분에 철우는 천자문 백자라는 할당량을 채우지 못했고, 그 대가로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철우야. 오늘도냐.”
“예. 성님. 그, 그래도 이번에는 89개나 외웠어요.”
“그래. 다행이다. 다음에는 꼭 백자를 채우자.”
“예. 성님.”
처음에는 50자도 못 외웠던 것을 생각하면 많이 성장한 셈이다.
물론 99자를 외워도 백자를 채우지 못하면 폭행당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이현성이 철우를 다독였다. 그리고 동시에 곁에서 묵묵히 제 몫을 다하는 초운비를 대견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미련 곰탱이 새끼! 그것도 못 외우냐? 그런 머리로 왜 사냐?”
“뭐? 미련 곰탱이?! 이 자식이 진짜!!”
그때 한 소년이 철우를 비웃었다.
그 역시 동관 소속이었지만 다른 조에 속해 있었다.
각 관에는 다섯 조씩 있었는데 한 조당 20명씩 생활했다.
이현성과 초운비 그리고 철우는 동관 사조였고, 철우를 비웃은 소년은 동관 일조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동관 일조를 장악한 녀석이 바로 혈검살객 아니, 혁련후였다.
‘혁련후, 이 자식이 또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거야?’
괜히 다른 조인 그가 이곳까지 와서 시비를 걸 리는 없었다. 즉, 혁련후의 지시가 있었다는 뜻이다.
이곳에 온 지 고작 한 달 조금 지났을 뿐인데 혁련후는 벌써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했다. 이현성은 자신의 의제인 초운비와 철우만 거두었을 뿐인데 말이다.
“그만. 철우야. 참아라. 너, 일조지? 이름이…….”
“내 이름을 알아서 뭐하게. 새끼야.”
혁련후의 지시를 받는 녀석이지만, 이현성의 기억에 남지 않은 것을 보아 이 혈무곡을 벗어나지 못하고 죽은 녀석들 중 한명인 듯싶었다. 즉, 그리 대단한 녀석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현성은 순식간에 그에게 접근했다.
“혁련후에게 전해. 시비 걸고 싶으면 직접 오라고. 개수작 부리면 후회하게 만들어주겠다고.”
“이, 이 새끼가 누구에게… 컥!”
“어린놈이 꼬박꼬박 욕이네. 혓바닥 뽑아버리기 전에 혀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경고는 한 번뿐이니까.”
“…아, 알겠어. 놔, 놔줘.”
비록 정식으로 무공을 배우기 전이었지만 회귀 전의 기억이 있었다.
은밀하게 간단한 권각술은 수련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의 상대가 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의 목소리에는 거역하기 힘든 위엄이 담겨 있었다.
비록 육신은 8살의 소년이었지만 정신은 이립이 넘어 마흔에 가깝다. 게다가 수많은 살행으로 정신까지 단련되었기에 이들과는 격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서, 성님. 괜찮을까요? 혁련후라면 그놈 아닙니까.”
“괜찮지 않을 이유는 없어. 그딴 놈들은 신경 쓰지 말고, 우리가 강해지게 수련하면 돼.”
철우는 혈무곡 아이들 중에서도 덩치와 힘으로 손꼽히는 만큼 웬만해서는 주눅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그도 몇몇에게만큼은 기가 죽었다.
그중 한 명이 이현성이고, 다른 녀석은 혁련후였다.
혈살객의 수장을 노리는 혁련후는 우선 혈무곡의 아이들부터 장악할 생각이었다. 특히 재능 있어 보이는 아이들에게 먼저 접근했다.
그중 한 명이 철우였다.
덩치와 힘이 벌써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만약 이대로 성장하면 분명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한 듯했다.
‘철우를 다시 만난 것도… 혁련후 그놈 때문이지.’
이현성은 철우를 다시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 * *
“말라깽이. 너 지금 뭐라고 했어?”
7살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우량한 소년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그 모습을 본 또래의 다섯 소년이 울컥해서 화를 냈다.
아니, 내려고 할 때였다.
“됐어. 물러서.”
“어? 어… 대장.”
대장이라고 불린 소년의 말에 나머지 네 명의 소년이 물러났다.
그 소년은 자신의 제안을 거부한 우량한 소년에게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주었다. 그냥 버리기에는 덩치가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너, 철우라고 했던가? 마음에 든다. 내 부하해라. 그렇지 않으면…….”
“어이가 없네. 힘도 약해보이는 비리비리한 놈이 지금 내게 부하를 하라고? 네가 미쳤구나?!”
철우는 기분이 팍 상했다.
어린 나이의 소년일수록 덩치와 힘이 강자를 상징한다.
자신에 비해 비리비리한 녀석이 부하를 하라고 하니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철우는 주먹을 휘둘렀다.
그는 제 주먹에 맞고 코피를 터뜨릴 소년의 모습을 상상하며 웃었다.
퍽!
“역시 주먹이 제법이군. 하지만 그뿐이지.”
“이 자식이 지금 뭐라는… 컥!”
상상과 결과는 달랐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묵직한 주먹이었으나 대장이라고 불린 호리호리한 소년은 가볍게 막아냈다. 그리고는 오히려 철우의 복부에 제 주먹을 꽂아 넣었다.
철우는 배를 부여잡으며 주저앉았다.
예상 이상의 충격에 당황과 동시에 분노했다.
“이 새끼가… 죽어!!”
“멧돼지 같은 놈… 길들이는 재미가 있겠어.”
눈이 뒤집어져서 달려드는 철우를 보며 대장 소년이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7~8살짜리 소년답지 않게 너무도 차가웠다.
대장 소년이 멧돼지처럼 달려드는 철우의 주먹을 여유롭게 피하며 비아냥거렸다.
“그래서 날 한 대라도 때리겠어?”
퍽!
그리고 철우의 옆구리를 발로 찼다.
철우는 강한 통증이 느꼈지만 참고 주먹을 휘둘렀다.
퍼퍽!!
하지만 그런 철우의 노력에도 대장 소년은 한 대도 맞지 않았다. 그럴수록 철우는 더욱 자존심이 상했다.
철우가 소년에게 맞은 횟수가 어느덧 두 자리가 되었다.
아무리 덩치 좋고, 힘 좋은 철우도 고작 7살짜리 소년이었다. 점점 고통을 참기가 힘들어졌고, 결국 눈물을 글썽거렸다.
대장 소년은 철우가 슬슬 굴복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역시 제법이야. 이제라고 날 주군으로… 헉!”
“이 개자식! 날 무시하지 말라고!!”
대장 소년은 방심하고 말았다.
그때 분노로 눈이 뒤집어진 철우의 강력한 주먹이 대장 소년의 얼굴에 꽂혔다.
퍽!!
주르륵.
아무리 대장 소년이 잽싸다고 해도 예상치 못한 강력한 일격은 미처 피하지 못했다.
결국 그의 코에서 코피가 주르륵 흘렀다.
“대, 대장!!”
“이 새끼가?!”
뒤로 물러나 있던 네 명의 소년은 대장의 코에서 쌍코피가 흐르자 매우 경악했다.
그가 누군가. 자신들을 주먹으로 굴복시킨 대장이었다.
그런데 쌍코피가 터졌으니 경악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때 대장 소년이 손을 들어 끼어드는 것을 만류했다.
하지만 철우를 용서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눈이 흉광(凶光)으로 번뜩였다.
“흐흐흐. 나 철우가 이제 어떤… 커억!!”
“그렇게 죽고 싶다면! 죽여주마!”
퍽! 퍽! 퍼퍽! 퍽퍽!
대장 소년은 철우의 허벅지를 차서 넘어트린 뒤 무자비하게 찼다. 얼마나 밟아댔는지 철우의 얼굴이 눈물과 코피 그리고 침으로 범벅되었다.
“헉헉… 이 새끼가 헉… 좋은 말로 할 때 헉… 헉… 들으면 얼마나 좋아!!”
“으으…….”
“아예 죽여주마!”
대장 소년의 발이 철우의 머리로 향할 때였다.
“…혁련후라고 했던가? 그쯤 하지?”
누군가의 목소리에 대장 아니, 혁련후가 발을 내렸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특별할 것 없어보이는 평범한 소년이 서 있었다.
물러나 있던 네 소년은 그가 대장 소년을 방해하지 못하게 저지했다.
“헉! 이 자식은 또 뭐야!”
“건방진 새끼 감히 대장에게… 아야야야!”
일견 평범해 보이는 소년을 저지하려다가 오히려 제 팔이 비틀려져서 그 고통에 주저앉아버렸다.
이에 당황한 다른 세 소년 역시 곧바로 달려들었다.
“우리가 누구인지… 컥!”
“너, 너는 누구… 커억!”
평범해 보이는 외견과 달리, 소년은 자신에게 달려든 세 소년 역시 너무도 가볍게 제압했다.
혁련후는 흥미롭다는 눈을 빛냈다.
제 부하들이 당했으나 저들 모두보다 더 탐나는 인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넌 누구지? 눈에 익은데?”
“내가 누구인지가 중요한가? 뭐, 곧 알게 될 테니 알려주지. 66호인 이현성이다.”
혁련후에게 당하고 있는 철우를 구하기 위해 끼어든 인물이 바로 이현성이었다.
그는 진즉에 철우를 발견했다.
하지만 초운비와 달리 다가갈 명분이 없었기에 그의 존재를 알면서도 먼저 다가갈 수 없었다.
그렇기에 기회만 보고 있을 때 일이 터졌다.
혁련후가 철우를 탐내고는 접근한 것이다.
“66호라… 제법인데? 너, 내 부하해라. 내 심복으로 삼아주마.”
“심복이라… 넌 지금 네 부하들이 내게 맞은 걸 봤으면서도 날 심복으로 삼겠다는 말이냐?”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