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저 멍청이들보다 네가 더 실력이 좋다면 안 될 게 뭐가 있지?”
이현성은 어이가 없었다. 필요에 따라 부하를 쉽게 버린다면 그 누가 그를 진심으로 섬기겠는가.
‘그렇지. 네놈은 그런 놈이었지.’
회귀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비열하기 짝이 없었다.
이현성은 그런 혁련후가 솔직히 역겨웠다.
그리고 회귀 전, 자신의 죽음에 그가 연관되었다는 것을 떠올리니 분노가 일었다.
“부하도 쉽게 버리는 네놈을 누가 진심으로 섬기겠냐? 배신이나 당하지 않으려면 정신 차려라.”
“건방진 놈… 실력 좀 있다고 귀엽게 봐줬더니 감히 기어오르려고 해?!”
자신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인지 혁련후가 주먹을 휘둘렀다.
호리호리한 체구와 달리 그의 주먹은 범상치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이미 무공을 익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어린만큼 혁련후의 경지는 높지 않았다.
그렇기에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무공을 모르는 7~9살 소년들이 상대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었다. 평범한 다른 소년들은 말이다.
“어쭈? 내 주먹을 피해?”
“난 철우만 데려가면 그만이다. 이쯤 하자?”
놀랍게도 이현성은 혁련후의 주먹을 너무나도 가볍게 피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혁련후는 대호법의 손자였지만 아직은 애송이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현성은 몸만 어려졌을 뿐, 머릿속에는 혈영살객의 지식과 깨달음이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이 같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지 혁련후가 발끈했다.
“건방진 새끼가!!”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 다시 주먹이 오갔다.
아무리 머릿속에 혈영살객의 기억이 있다고 해도 몸에 익힌 것은 아니었기에, 이현성이 완전히 우세한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호각지세(互角之勢).
대호법의 혈육답게 혁련후의 재능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현성은 더 대단했다. 화려하지 않지만 간결한 움직임으로 혁련후의 공격을 전부 무산시켜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밟아주고 싶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지.’
혁련후의 공격쯤은 눈에 훤히 보였다.
쓰러트리려면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 이상 자신을 드러내면 곤란했다.
준비하고 있는 계획을 위해서는 최대한 자신을 숨겨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철우가 당하지만 않았어도 이현성은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이쯤 하는 게 어때?”
“건방진 새끼! 네놈이 이쯤 하자 한다고 내가 그만할 것 같으냐!”
“네 입장에서는 나와 싸워서 이기면 본전이고, 지면 손해일 텐데? 네가 이러면 좋아할 사람들은 따로 있지 않을까?”
움찔.
이현성의 말에 혁련후는 움찔했다.
실제로 이 상황이 그에게는 달갑지 않았다.
혁련후의 적은 이현성이 아니라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이성을 되찾은 혁련후가 주먹을 거두었다.
그러나 분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지 이현성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이현성이라고 했던가? 이번에는 봐주지. 하지만 두 번은 없을 거다.”
이현성은 어이가 없었지만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의 심기를 건드려서 더 이상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현성이 쓰러진 철우를 부축했다.
“으… 으악!!”
“괜찮다. 철우야. 널 구해주려는 거야.”
얼마나 당했는지 철우는 이현성을 보면서도 혼비백산했다.
이현성은 그런 그를 간신히 달랬다.
엉망이 된 철우를 보니 이현성은 화가 났다.
‘두고 보자… 혁련후… 지금은 물러나주마. 하지만 그것도 지금뿐이다.’
이현성은 이를 갈며 철우를 부축한 채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혁련후 역시 이를 갈았다.
“네놈도… 결국… 내 발아래 꿇게 될 것이다! 반드시!”
그날 이후 혁련후와의 악연이 더욱 단단해졌다.
철우는 이현성의 말이라면 껌벅 죽을 정도로 의지하게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 녀석들에게도 포영심결(泡影心訣)을 가르쳐주고 싶지만… 아직은 안 되겠지.’
초운비와 철우 모두 재능은 특출하지만, 아직 그 재능이 개화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현성은 조금이라도 더 도와주고 싶었다.
포영심결은 혈무곡은 물론 혈살동에서 익힌 내공심법이 아니었다. 그가 혈영살객으로 활동하다가 우연히 손에 넣은 내공심법이었다.
이름처럼 물거품과 그림자 즉, 허상의 기운을 다루는 심결이다.
평소에는 단전이 아닌 혈맥과 근골에 기운을 쌓았다가 단전이 텅텅 비거나 손상이 생긴다면 그때 움직이는 특이한 심결이었다.
이현성이 다른 혈살오객과 달리 대단한 신공절학을 익히지 않고도 그들과 비슷한 공적을 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포영심결 덕분이었다.
‘포영심결은 너무 난해해서 아직 저 아이들이 이해하기는 힘드니까.’
포영심결은 웬만한 경전만큼 어렵기에 천자문조차 낑낑거리는 철우가 익히기는 힘들었다.
초운비가 철우보다는 똑똑하지만, 아직 포영심결을 익힐 정도의 소양을 쌓지는 못했다.
아직 내공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만큼 어설프게 가르치면 추후 기초심법을 배울 때 오히려 방해될 수 있다.
아이들에게 천자문을 외우게 한 이유가 조만간 기초심법인 혈운심법(血雲心法)을 전수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삼재심법, 육합심법과 함께 저잣거리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풍운심법을 조금 개량한 삼류심법이었다.
본격적인 심법은 혈살동에 입동(入洞)한 뒤 익힐 것이기에 지금은 그릇을 닦는 용도에 불과했다.
‘혁련후… 네놈이 무슨 꿍꿍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 * *
“그놈이 그랬단 말이지?”
철우, 정확히는 이현성에게 시비를 걸기 위해 동관 사조로 갔던 부하가 돌아왔다.
이현성의 전언을 전해들은 혁련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어, 어…….”
“알겠다. 가서 쉬어라.”
“고, 고마워.”
강한 힘으로 동관 일조를 장악한 혁련후였다.
모두가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아직 그의 휘하에 들어오지 않은 다른 조원들 역시 눈치를 본다.
혁련후의 강함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현성, 그만큼은 달랐다.
자신에게 굴복하기는커녕 저항했다.
특히 탐나는 인재(철우)를 포섭하는 일까지 방해했다.
하찮은 것이 자신을 거역하니 심기가 불편해졌다.
“…좋아. 발악하면 할수록 짓밟는 재미가 있겠지.”
어차피 급할 것은 없었다.
혈살객들은 자신의 것이다.
결국 그 역시 자신의 부하가 되거나, 낙오되어 죽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의 어리석은 발악을 잠시 지켜보기로 했다.
언제든 짓밟을 수 있었으니까.
“네놈을 밟아주는 건 언제든지 할 수 있지. 그보다는 우선 동관을 그리고 모두를 장악하는 게 먼저야. 하후가 놈과 문인가의 년에게 선수를 빼앗기기 전에…….”
한번 붙어본 결과 이현성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 당장 그를 밟을 수는 없었다.
다른 이들 때문에 틈을 보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후세가와 문인세가는 혁련세가와 함께 혈천의 주축인 가문들이다.
혁련후처럼 각기 혈족을 혈살객 양성에 투입했다.
그 외의 가문들도 움직였으나 그들은 이곳 혈무곡이 아닌 다른 훈련소에 투입된 상태였다.
그렇기에 혁련후가 먼저 상대할 자는 하후세가의 소년과 문인세가의 소녀였다.
그러나 그는 아직 몰랐다.
두 사람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이곳 혈무곡에 숨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너희가 아무리 발버둥질해도 결국 혈살객도, 혈천도 내 것이 될 거야! 내 것!”
* * *
“어떤가? 슬슬 괜찮은 녀석들이 보일 때가 된 것 같은데 말이야.”
노인의 말에 중년 사내들은 긴장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노인이 바로 혈무곡주였기 때문이다.
절정의 극에 달한 고수인 그는 줄을 잘못 잡아서 이곳에서 애들이나 가르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혈천 서열 100위에 내에 들어가는 대단한 고수였다.
교두들 중에도 절정고수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절정고수라고 다 같은 절정고수가 아니다.
막 절정지경에 오른 그들과 절정의 끝에 있는 곡주가 같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물며 고작 일류고수인 부교두들은 더욱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식으로 가르침을 받기 전인만큼 아이들의 기본훈련을 맡고 있는 것은 교두가 아닌 부교두들이었다.
그렇기에 곡주는 부교두들을 소집했다.
“저희 동관에서는 일조의 1호와 13호, 47호, 66호, 80호… 100호가 눈이 띕니다.
“저희 서관에서는 104호와 105호…….”
“저희 남관에서는…….”
수십의 부교두 중에서도 선임급 세 명이 대표해서 대답했다.
언급된 인원이 제법 되었다.
혈무곡에 입곡한 아이들은 삼백이나 되었고, 처음부터 평범 이상은 되는 아이들을 데려왔다.
아직 언급되지 않았다 해도 곧 재능이 개화될 아이들이 수두룩했다. 혈천의 입장에서는 복이라고 할 수 있다.
“허허. 그렇군. 다 본곡의 자랑이자 본천을 위해 큰일을 할 아이들이니 잘 키우게나.”
“예! 곡주님!”
곡주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런 성품을 가진 자가 아니었다.
괜히 그를 마광수라(魔狂修羅)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 음흉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역시 그 아이들이 두각을 보이고 있군. 누굴 밀어줘야 나의 복귀에 도움이 될까?’
이곳 혈무곡에는 혈천의 주축이 되는 가문의 직계 혈족이 셋이나 들어왔다.
그 외에도 두각을 보이는 아이들 대부분이 세 가문의 명령을 받은 고수들의 자제들이었다.
혈무곡주는 혁련후를 포함한 세 녀석 중 한 명을 밀어주고, 자신의 입지를 다질 생각이었다.
‘아니지. 굳이 한 명만 밀고 있을 수는 없지.’
그는 생각 이상으로 음흉했다.
양다리 아니, 세 다리를 걸칠 생각이었다.
은밀하게 세 명, 세 가문에 줄을 댈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본천 입성 가능성이 매우 높아질 테니까.
부교두들과 달리 교두 중에는 몇몇만 참석했다.
아직 아이들의 수련을 맡기 이전인 만큼 곡주가 그들을 호출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두들 중에서도 엉덩이가 무겁기로 유명한 검귀가 이 자리에 와 있었다.
‘그 녀석… 역시 뭔가 있단 말이야.’
검귀는 주변과 어울리지 않고, 제 수련에만 매진하기로 유명하였다.
그런 그가 간혹 아무도 몰래 지켜보는 자가 있었다.
바로 이현성이었다.
이현성은 분명 평범한 민가 출신에 특별할 것 없는 소년에 불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보고 있으면 알 수 없는 흥미가 생겨났다.
‘잘 커다오. 부디 내 즐거움이 될 수 있도록.’
* * *
“하합!!”
아이들의 주먹에서 제법 힘이 느껴졌다.
지난 3년 동안 익힌 혈운심법이 아주 효과가 없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이현성의 예상대로 천자문을 다 외운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이들은 혈운심법을 전수받았다.
삼류심법 취급받는다고 해도 내공심법을 처음 익히는 아이들에게는 쉽지 않았다. 게다가 혈천의 고수들에 의해서 보완된 만큼 혈운심법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덕분에 혈운심법을 익힐 때부터 격차를 보였다.
같은 내공심법이라고 해도 체질과 이해도에 따라서 효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고작 그것밖에 못 하나!!”
“아닙니다!”
혈운심법을 익힌 지 한 달이 지난 후에는 혈운권법(血雲拳法)과 혈운보법(血雲步法)까지 전수했으니, 격차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