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마초연의-8화 (8/306)

8화. 이제부터 마궁수

익주 한중군.

한중태수 소고는 벽력같이 호통을 쳤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그까짓 비단이 중요한 게 아니란 말이다! 그 가노가 이번 거래에서 가장 중요한 물목이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자신의 앞에 부복해 있는 상단 행수를 보면서 부들부들 떨던 소고는 벼루를 집어서 행수에게 던졌다. 가까스로 벼루를 피한 행수가 말했다.

“어르신, 정서장군 마등의 아들 마초라는 자가 강짜를 부리는 바람에 일이 틀어졌습니다. 그런 거래라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금과 비단은 물론 상단마저 보존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어쩔 수 없이 증서를 받아서 가져왔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내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팽가 그자가 아무리 곽사의 처남이라고 해도 이렇게 경우 없는 행동을 할 수가 있는가? 이미 정해진 거래를 엉뚱한 놈에게 넘기다니!”

씩씩거리던 소고는 이내 맥이 탁 풀려서 자리에 주저앉아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 가노는 그냥 가노가 아니란 말이다. 하내의 사마가에 보낼 진상품이었는데… 이제 다 틀렸다.”

“하내의 사마가라면…….”

행수도 사마가에 대한 소문을 들은 바 있었다. 사례주 하내군을 근거지로 하는 사마 씨 집안은 겉으로는 대대로 고관을 배출하는 명문가로 알려졌지만, 이면으로는 천하의 물자 유통을 좌지우지하는 중원 제일의 대부호 집안이라는 소문이었다.

이 시기의 유력 호족 가문들은 상업을 겸하는 일이 많았다. 다만 장사를 한다는 것이 유교 사회의 명사들에게는 자랑스럽지 않은 일이라 서로 모른 척할 뿐이었다. 나이 든 상인들 사이에서는 그러한 명가들 중에서도 하내의 사마가가 가장 큰 손이라는 소문이 떠돌았지만, 사마가가 철저히 비밀을 지키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뜬소문에 불과한 것인지, 좀처럼 사마가와 거래한다는 상인을 보기는 힘들었다.

“그런데 어르신, 진상품이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사마가와 단순히 거래를 트려고 하셨던 게 아니십니까?”

순간 태수 소고의 낯빛이 변했다.

“네가 무얼 안다고 그러느냐? 썩 물러가거라.”

소고는 상단 행수를 물리치고 자신이 실언한 것을 후회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아마도 저 상단 행수는 진실을 짐작조차 할 수 없을 터였다.

‘사마가가 뒤에서 힘을 쓰면 이까짓 지방 태수 목은 떼었다 붙였다 자유자재지. 한중태수 정도의 자리는 원래대로라면 수만 금은 써야 했을 테지만, 어찌 된 일인지 사마가에서 나를 좋게 봐주어서 공짜로 태수가 되었다.’

원래 지방 현령에 불과했던 소고를 한중태수로 부임할 수 있도록 힘을 써준 것이 사마가였다.

사마가에서는 소고가 마음껏 부정 축재를 할 수 있는 자리를 주는 대신 소고에게 이따금 지시를 내리곤 했다. 주로 정보 수집이나 교역 물품을 구하는 따위의 일들이었는데, 가끔은 특이한 재주를 가진 사람을 구할 때도 있었다. 이번에는 풍익군에 특이한 음식을 만들 줄 아는 가노가 있으니 그를 돈으로 사서 데려오라고 했던 것이다.

‘하여튼 종잡을 수 없는 이들이다. 그나저나 내려온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으니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사마가의 지시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사마가의 지시를 가지고 오는 전령들은 어떤 삼엄한 경비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밤중에 태수의 거처에 숨어들어왔다. 그들이 마음을 바꿔 먹으면 그 순간 막을 수 없는 자객이 되는 상황이었다. 소고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때였다.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소고의 귀에 어수선한 소음이 들려왔다. 자세히 들어 보니 사람의 비명소리와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코끝에는 연기 냄새가 들어왔다.

“이건…….”

소고가 황망하게 일어나는 찰나, 처소의 문짝이 부서지며 검은 옷을 입은 장한들이 우루루 몰려 들어왔다.

“웬… 웬 놈들이냐!”

장한들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후덕한 체격을 가진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오랜만이오, 소 태수.”

“네놈은… 장로? 쌀 도둑질이나 하는 도가쟁이 놈이 나라에서 임명한 태수의 관저에 침입하다니, 이게 무슨 패역한 짓이냐!”

장로가 수염을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계속 채우려 드는 것보다는 멈추는 것이 낫고(持而盈之 不如其已), 잘 다듬어 예리하게 하면 오래 갈 수 없는 법이오(揣而銳之 不可長保). 그대가 태수로 봉직하며 한중 백성들을 수탈하여 천도에 어긋난 지 오래이니, 이제 우리 천사도가 그릇된 정치를 바로잡으러 왔소이다.”

“네놈이 감히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것이냐? 이런 대역죄를 짓고 살아남길 바라느냐!”

“역(逆)이라 하면 무엇에 거스른다는 말인가? 천도를 거스른 것은 그대와 그대 같은 탐관오리를 임명해서 백성을 고통받게 한 조정이 아닌가? 나는 그저 천도를 따를 뿐이다.”

“발칙한 놈! 뭣들 하느냐! 어서 저 쌀 도둑놈의 목을 베라!”

소고는 주변을 돌아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한중태수의 호위병 몇몇이 칼을 뽑아 들고 나섰다. 장로를 따르는 검은 옷의 천사도 신도들도 칼을 뽑아 들고 나섰다.

챙! 챙!

칼이 부딪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난전이 벌어졌다. 소고는 그 틈을 타서 자리를 피하고자 했다.

푹!

그러나 그런 소고를 등 뒤에서 누군가 칼로 찔렀다. 소고는 크게 휘청이며 등을 돌려 자신을 찌른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장로가 빙긋이 웃고 있었다.

“컥, 자, 장로…….”

“천벌일세, 소 태수. 살아서 그토록 많은 죄를 지었으니 나를 원망치 마시게.”

“네놈이…….”

소고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그대로 숨이 끊어진 것이다.

장로의 옆에 서 있던 문관 복장의 사내가 앞으로 나서서 소고가 쥐고 있던 두루마리를 빼앗아 들었다.

“양백, 그게 무엇인가?”

“예, 장 사군. 마초라는 자가 소고에게 갚을 빚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서인 것 같습니다.”

천사도의 지도자 장로는 부하 양백으로부터 두루마리를 받아서 펼쳐 보았다. 방금 전까지 살아 있었던 소고가 흘린 피가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촉금이 무려 1만 필이라. 허풍이 대단한 사내로군.”

장로는 두루마리를 양백에게 넘겼다.

“챙겨 두게. 나중에 쓸 일이 있을 것 같군.”

서량을 기반으로 하는 정서장군 마등의 아들 마초. 한중에서 멀지 않은 위치에 주둔하는 유력한 군벌이다.

장로는 마초라는 이름을 기억해 두기로 했다.

“마초… 그대와 나 사이에 천도가 있다면 볼 날이 있겠지.”

* * *

서량, 천수군 농현.

일만 석이나 되는 군량이 도착하자 마가군 군영도 조금은 여유가 생겼다. 마가군에 입대하면 흉년에도 끼니를 거르지 않는다는 소문이 나자 입대 희망자도 줄을 이었다. 총원 8천 남짓한 마가군이었지만 지원자를 다 받으면 일만이 넘어갈 판이었다.

“신병을 충원하고 부곡을 새로 편성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 이제야 조금 시간이 나는군.”

마초는 나관중을 보며 말했다.

두 사람은 군막에서 간단한 술상을 놓고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관중과 이야기를 할 때면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나관중은 말솜씨가 좋아서 그가 들려주는 천 년 후의 세상 이야기와 천 년 간의 역사 이야기는 아무리 들어도 지겹지 않았다.

“그간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공자.”

“글쎄, 고생은 이제부터 시작이지. 신병을 훈련시켜서 쓸만한 서량병으로 만들려면 갈 길이 멀다. 그보다 관중.”

“예, 공자.”

“너 말은 조금 탈 줄 안다고 했지?”

“그럼요. 저는 본래 소금 장수로 중원 일대를 돌아다녔습니다. 서량의 무장들만큼은 아니어도 말은 어지간히 다룰 줄 압니다.”

지금은 각지에서 모여든 신병을 부대에 편성하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마초는 이때 나관중을 마가군의 군적에 올려서 자신의 부대에 편입시킬 참이었다.

“좋아. 그럼 이제부터 마궁수(馬弓手).”

“네?”

“이제부터 마궁수라고. 너는 천 년 후의 문물에 대해 지식이 있고, 당금의 역사에도 해박하니 나중에 관직을 맡으면 큰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지금처럼 내 가노 비슷한 처지로 있는 건 곤란하잖아?”

그렇다. 나관중의 지금 처지는 마초의 가노나 마찬가지다. 이대로라면 곤란했다.

“병주 태원 출신의 나관중이라는 이름으로 내 부대에 마궁수로 등록하겠다. 생각 같아서는 군리로 삼고 싶지만 그건 내 권한 밖이고, 도위가 마음대로 임명할 수 있는 자리는 마궁수와 보궁수밖에 없으니까 말이야.”

나관중은 마초에게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 마초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은혜를 베풀어서 나관중이 충성하도록 할 작정이었다.

‘이 정도면 이 녀석도 감동했겠지?’

마초는 내심 기대하며 나관중의 얼굴을 흘깃 보았다.

나관중은 흰 얼굴에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으흑흑, 마궁수, 내가 한의 마궁수라니…….”

“응?”

나관중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허공을 보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소장이 나가서 화웅의 목을 베어 오겠소! 그대는 어디의 누구인가? 평원상의 휘하에 마궁수로 있는 관우라고 합니다. 네 이놈, 어찌 일개 마궁수가 제후들의 일에 나선단 말이냐! 잠깐, 이 자의 외모가 범상치 않으니 어찌 마궁수인 줄 알겠소? 이 데운 술을 한 잔 들고 출진하시오. 술은 화웅의 목을 가져온 후 마시겠소이다!”

“아니,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앗, 송구합니다. 마궁수라고 하시니 갑자기 제가 쓰고 있던 패설의 한 장면이 떠올라서…어쨌든 공자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이 녀석은 아무래도 약간 정신이 모자란 것 같군. 저래서야 나중에 써먹을 수 있을까?’

마초는 나관중의 얼빠진 태도가 심히 걱정이 되었다.

당연히 순수한 의도는 아니었다. 나관중의 이용 가치가 높았기 때문이다.

나관중은 미래의 음식과 술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가 만들어 보급한 두부는 풍익을 비롯한 삼보 지방 일대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소금 장수 출신이라 제염법에 대해서도 앞선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 나중에 암염 광산이라도 얻게 되면 단단히 한몫을 할 것이다.

천하의 명필이라고 불릴 만한 서예 실력도 가지고 있었다. 나관중은 왕희지란 사람의 필체를 흉내 낼 뿐이라고 하는데, 왕희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마초로서는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또한 나관중이 미래에 애송되는 시라고 가끔 읊어 주는 두보니, 이백이니 하는 시인들의 시는 하나같이 대단한 명문장들이었다.

‘당금 최고의 시인인 조조라도 이런 아름다운 문장을 쓰지는 못할 것이다.’

나관중은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유용한 지식들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세상의 풍습과 문화를 익혀서 잘 적응하도록 도와주기만 하면 충분히 천하의 명사가 될 자질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명사가 충성을 바치는 명사 중의 명사가 되는 거지. 소금 광산으로 돈도 좀 만지고 말이야.’

마초는 이번 생에서는 큰 욕심을 부릴 생각이 없었다. 그저 적당히 세력을 키우고, 가족을 지키며, 중원의 큰 전란에 휩쓸리지 않고 잘 살고 싶은 마음이었다.

한동안 마궁수라는 벼슬에 취해 있던 나관중이 정신을 차렸다.

“공자께서 저를 팽가장에서 빼내 주시고, 입고 먹는 것을 해결해 주시고, 이제 관직까지 마련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 은혜는 나중에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마궁수를 관직이라고 하기는 너무 거창하고.”

“어쨌든 마가군의 군적에 올려 신분을 만들어 주셨으니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이 은혜를 갚으려면 최선을 다해서 공자께서 가시는 길을 도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공자께서는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 참입니까?”

“이제부터라.”

마초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의 지난 생이 어땠는지는 너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후회만 남는 삶이었지. 이제 두 번째 삶을 살 기회를 얻었으니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 보려 한다.”

“완전히 다른 삶이라면 어떤……?”

“다시는 가족을 잃지 않을 것이다.”

마초는 가족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일단 마가의 세력을 키워서 이전보다 더 빨리 서량 최대의 세력으로 만들 것이다. 대략 10년 정도가 걸리겠지. 그 후에는 조정으로부터 서량의 자치권을 얻을 셈이야.”

“서량의 자치권을 얻는다면, 제후가 되겠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래. 중원의 난리에는 관심을 끊고, 서역과 비단 교역이라도 해서 돈이나 벌면서 이곳에 눌러앉을 계획이다. 그렇게 하면… 아버지와 아우들이 죽는 일은 없을 테니까.”

마초의 목소리에 깊은 회한이 묻어났다.

“관중, 너는 걱정할 필요 없다. 네가 가진 재주라면 10년이면 충분히 이름난 명사가 되어 있을 것이다. 언제까지나 나를 따를 필요는 없어. 10년 후에는 너도 적당한 벼슬을 얻어서 원하는 곳에서 편안하게 살라고.”

마초의 말은 솔직했고 현명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괜찮은 걸까? 나관중은 얕게 한숨을 쉬었다.

“공자, 그렇다면… 이 난세는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난세?”

“그렇습니다. 이제 곧 이각과 곽사가 벌일 난리로 삼보 지역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갈 것입니다. 조조는 서주에서 학살을 벌일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 난세를 평정하지 못하면…….”

이 난세의 끝에는 5호 16국 시대가 열린다.

다섯 이민족이 중원을 유린하며 끔찍한 학살과 인종 청소가 되풀이되는 시대. 그게 무려 300년간이나 지속되는 것이다.

나관중은 누구보다 강하게 삼국지에 매료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삼국지의 끝에 300년 동안의 비극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누구보다도 슬퍼했었다.

‘그런 내가 이제 삼국지의 시대에서 살아가게 됐다. 난세를 평정하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만 해.’

그러나 난세를 평정하려면 힘이 필요한 법이다. 마초같이 실질적인 힘을 가진 군웅을 움직여야만 했다.

‘그러려면 이 사내를, 마 공자를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어.’

마초의 생각은 달랐다.

“난세를 평정한다라… 말은 쉽지만.”

마초는 담담하게 나관중을 응시했다.

“너도 며칠간 나를 따르면서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봤겠지. 그들이 내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알고 있느냐?”

“어떻게 보인다니요? 오랜만에 재회한 반가운 전우들 아닙니까?”

마초가 낮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어딘지 쓸쓸했다.

“내 친구 방덕은 관우의 손에 죽었다. 나는 촉에서 ‘관우 장군이 적장 방덕을 베었다’고 전령에게 보고 한 줄을 받았다. 아주 기가 막힌 방식으로 친구의 부고를 들었지. 나와 무예 훈련을 같이하는 소교 장람은, 위수를 건너서 조조를 들이쳤을 때 내 눈앞에서 허저의 손에 죽었지. 오늘 같이 군적 작업을 한 군리 백탁은 기성 싸움에서 양관이 배신했을 때 목이 달아났다.”

마초는 잠깐의 침묵 후 말을 이었다.

“이번에 신병으로 받아서 내 부곡에 편성한 마궁수 유견도 내가 아는 얼굴이야. 촉까지 나를 따라온 자인데 한중에서 조홍과 싸울 때 화살에 맞아 죽었지. 보졸 하왕은 방덕과 같이 한중에 남았었다. 조조에게 투항하려는 방덕에게 반기를 들어서 방덕이 직접 참수했다고 전해 들었지. 아버지의 종사로 있는 고경 선생은 또 어떤가. 은퇴해서 쉬겠다는 사람을 내가 거병하면서 우겨서 복귀시켰었다. 포판진에서 낙마했는데 시체도 찾지 못했어.”

마초는 주변 인물들에 대해 담담하게 얘기해 나갔다. 들을수록 나관중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정서장군 마등, 나의 주군이자 아버지. 조정에서 벼슬을 하던 아버지는 내가 거병했기 때문에 처형당하셨다.”

마초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관중, 이제 알겠느냐? 전혀 모르는 세상에 와 있는 너도 괴롭겠지만, 젊은 시절로 돌아온 나도 마음이 마냥 편하지는 않다. 나는 지금 하루하루 망령들에게 둘러싸여 살고 있는 기분이다. 전부 내가 사지로 몰아넣었던 사람들이야.”

“공자…….”

“처음 젊은 시절로 돌아오고 나서 며칠간은 마냥 좋았지. 지금은 하루하루가 견디기 힘들다.”

나관중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마초는 술로 목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나라고 왜 난세를 평정할 생각을 하지 않았겠느냐? 그런데 난세를 평정하려면 큰 전쟁을 몇 번이고 치러야 하고, 그러면 다시 한번 가족과 지인들이 죽어 나갈 것이다. 그것만은 볼 수가 없어. 내가 마음씨가 착해서 그런 게 아니야.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서 나 자신이 너무 괴롭기 때문이다.”

“…공자께서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는 알겠습니다.”

“너는 일단 내 휘하에서 이 세상에 적응하도록 해라. 네가 원래 세상에서는 마흔 살 가까운 나이였다지만 여기서는 아직 스무 살밖에 안 된 젊은이잖아? 천하를 위해 큰일을 하고 싶다면 먼저 내 휘하에서 명사가 된 이후에 다른 군웅을 섬겨도 늦지 않다. 때가 오면 무리하게 너를 잡을 생각은 없어.”

마초는 쓸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앞으로 2~3년 동안 우리는 아주 강한 상대와 싸워야만 해. 그런 복잡한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아주 강한 상대라면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기근.”

기근은 마초가 아는 어떤 강적보다도 무서운 적이었다.

지금 193년부터 195년까지, 관중 일대에는 큰 가뭄으로 인한 대기근이 닥친다. 관중에 바로 인접한 천수군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대기근에 대응하기 위해 식량을 구하는 것이 마초의 당면 과제였다.

회귀하자마자 풍익으로 달려가서 위험에 처한 아버지를 지켜냈다. 이제부터는 마가군을 지키기 위해 대기근에 대비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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