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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마초연의-9화 (9/306)

9화. 어떻게 살 것인가

두 사람의 술자리는 무거운 분위기에서 파했다.

나관중은 침소에 돌아와 누웠다. 마초의 말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다.

처음 이 시대로 회귀했을 때는 그저 하루하루 살아남는 게 걱정이었다. 그러던 찰나에 마초를 만났다.

‘마초 공자… 평소에 내가 흠모하던 영웅은 아니지만, 현실적인 힘을 가진 자다. 그가 가진 신분과 능력에 내가 가진 미래의 지식을 더해 주면 천하를 위해 큰일을 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마초에게는 그럴 의지가 없었다. 지난 생에서 여러 번 가족을 잃으며 고통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가족에게 안락한 삶을 선물하고자 했다.

나관중 자신도 마초를 따르면 안락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걸로 괜찮은 걸까?’

그렇게 되기까지는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앞으로 10년은 최악의 난세다.

‘나와 마 공자가 서량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는 동안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갈 것이다. 정말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괜찮은 걸까?’

그러나 일개 마궁수인 나관중에게는 천하 사람들을 구할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날 나관중은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 * *

마초는 사흘간 휴가를 내고 둔영을 떠나 농현으로 향했다.

농현은 양주(서량) 천수군에 속하는데 마가군의 둔영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고을이었다. 그리고 마초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했다.

마초의 발걸음이 제법 큰 기와집 앞에 멈췄다.

오늘은 이곳에서 약속이 있었다. 약속 시간을 살짝 넘겼으니 서둘러 들어가야 하겠으나, 마초는 무거운 마음에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만남이다. 무얼 주저하는 것인가?”

마초는 혼잣말을 한 후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문을 두들겼다.

“계십니까? 초가 왔습니다.”

잠시 인기척이 일고 문이 열렸다. 마초는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문이 열리고 마초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젊은 여인이 나왔다. 여인은 남자처럼 키가 컸다. 그리고 스쳐 지나가는 사내들이 저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볼 만큼 대단한 미인이었다.

여인은 짓궂은 소년처럼 씨익 웃고는 손바닥을 들어 마초의 등짝을 후려쳤다.

짝!

“으윽?”

“뭐야. 늦었잖아, 아초(兒超).”

“하원, 내가 그렇게 어린애 부르듯이 부르지 말랬지? 이제 자도 있는 성인이라고.”

“성인은 무슨, 아초가 아초지. 빨리 들어와, 늦었어.”

마초는 등짝의 통증으로 정신을 차렸다.

양하원은 농현에서 이름난 선비 양진의 딸로 마초와는 어릴 때부터 어울려 놀던 동무 사이였다. 친밀감은 나이가 들면서 애정으로 발전해서 이 무렵에는 종종 밀회를 즐기는 정인이었다. 마등이 마초에게 추궁했던 말 절도 사건은 바로 양하원과의 밀회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훗날 마초의 아내가 되어 기성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여인이기도 했다.

‘하원, 어린 시절의 너는 항상 이렇게 밝은 모습이었지. 나를 만나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게 됐구나.’

마초는 복잡한 심경을 뒤로 하고 안으로 들어가 양진에게 인사를 올렸다.

“스승님,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어서 와라, 맹기. 군문에 든 이후로 더욱 늠름해졌구나. 네 소식은 잘 듣고 있다. 벌써 정서장군을 도와서 군공도 세웠다지?”

양진이 환한 미소로 마초를 맞았다. 그는 마초에게 학문을 가르친 스승이었다.

오늘은 스승 양진, 그리고 동문수학한 친구들과 술자리가 있었다.

* * *

양진은 농현이 낳은 수재라고 불리던 선비다. 조정에서 의랑 벼슬까지 했으니, 서량의 농현 같은 척박한 고을에서는 그리 여길 만도 했다.

9년 전(184년), 황건적의 난이 하북과 중원을 휩쓸고 있을 때의 일이다. 이때 서량에서는 양주 자사 경비가 폭정을 해서 군벌 한수가 난을 일으켰다.

난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사도 최열을 중심으로 서량을 포기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다. 서량은 한나라의 변방이자 최전방이다. 만약 서량을 포기한다면 이민족들과의 국경이 장안성 인근으로 후퇴하게 된다.

그리고 서량에 터를 잡고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에 서량 출신의 의랑 부섭이 주도해서 사도 최열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사도는 한의 교육과 학술 정책을 통괄하는 재상급의 관직이었지만, 부섭은 상대의 지위에 개의치 않았다. 서량 출신인 양진도 부섭과 뜻을 같이했다.

부섭은 이 일로 인해 천수태수로 좌천된 후 한수의 난에 휘말려 죽었고,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양진은 고향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었다.

농현 같은 척박한 변방에 명망 있는 선비라고는 양진밖에 없었다. 그래서 인근의 귀족 자제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어린 시절 양진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마초도 마찬가지였으니 양진은 그에게 학문을 가르친 스승이었다. 그리고 지난 생에서 양진의 외동딸 양하원과 혼인했으니 장인이기도 했다.

* * *

마초는 사제의 예를 마친 후 물었다.

“언재(부간의 자)와 덕앙(이회의 자)은 이미 도착해 있습니까?”

“후원에서 이미 자리가 한창이다. 같이 가자꾸나.”

양진과 마초는 후원에 있는 별채로 자리를 옮겼다. 후원에는 익숙한 얼굴의 젊은이 둘이 자리를 잡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마른 체구에 신경질적인 눈매를 한쪽은 부간, 자는 언재였다. 서량을 포기하자고 주장한 재상을 탄핵한 청백리 부섭의 아들이었다. 일찌감치 정서장군부의 종사로 벼슬길에 들어 마초와 같이 마등의 휘하에서 일하고 있었다.

퉁퉁한 몸집에 얼굴이 검고 넙데데한 자는 이회, 자는 덕앙이었다.

이회는 본래 익주 건녕군 사람으로 부모님을 여읜 후 먼 친척이 있는 이곳으로 옮겨 와서 살고 있었다. 농담을 잘하고 사람을 대하는 일에 능숙한 자였다. 이회는 나중에 유비 휘하에 드는데, 지난 생에서 마초에게 유비 측으로의 귀순을 권유했던 게 바로 이회였다. 일찌감치 관직에 든 마초나 부간과는 달리 아직 관직이 없었다.

“스승을 잊지 않고 찾아와 주니 반갑구나.”

오늘은 관직을 하는 제자들이 옛 스승을 찾아 문안 인사를 드리는 자리다. 양진이 상석에 앉고 양쪽으로 마초와 부간, 이회가 앉았다.

연거푸 술잔이 돌았다. 제자들의 관직 생활 이야기를 흐뭇하게 듣던 양진은 잔을 깨끗이 비운 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늙은 스승은 물러갈 테니 오늘은 너희들끼리 마음껏 회포를 풀도록 해라.”

양진이 돌아가고 난 뒤 별채에서는 세 사람의 술자리가 이어졌다. 세 사람 모두 술이 얼큰하게 올랐을 때였다.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모두가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쾅!

하고 누군가 별채의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솥을 두 손으로 들고 있는 양하원이었다.

“무겁다. 언재, 덕앙, 빨리 받아!”

부간과 이회가 주섬주섬 일어나서 솥을 받아 들었다. 찐 양고기 요리였다. 새끼양 한 마리가 통째로 들어 있었다.

“지금쯤 안주가 떨어졌을 것 같아서 가져왔지.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먹으라고.”

“하원, 고맙긴 한데 이 시간에 양 한 마리를 통째로 쪄 오면 누가 다 먹겠어?”

“덕앙은 별걱정을 다 하는구나. 장정이 넷인데 그까짓 새끼양 한 마리가 다 뭐야?”

이회는 그 말을 듣고 별채에 있는 사람들을 세어 보았다. 자신과 마초, 부간까지 장정은 셋뿐인 것 같았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양하원은 양진이 앉았던 상석에 앉아서 긴 다리를 갈무리하고 양고기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마초도 말없이 다리 한쪽을 잡고 뜯기 시작했다. 양하원은 고기를 먹다 말고 턱을 괸 채 애정을 담은 눈빛으로 마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초가 민망함에 고개를 돌리자 모르는 척 딴청을 피우는 부간과 이회의 모습이 보였다.

부간이 물었다.

“하원, 스승님께는 허락받고 온 거냐? 어린 시절처럼 이렇게 어울려서 노니까 좋기는 한데, 이제 스무 살이나 된 남녀가 이러고 있으면 남들 시선도 있고…….”

“여기에 남이 어디 있다고 그래? 그리고 정확하게 말하면 어린 시절에는 이렇게 어울려서 놀지는 않았지. 너희들이 내가 타지 출신이라고 놀리다가 나한테 많이 맞았잖아?”

양하원의 당당한 태도에 세 사람은 다시 한 번 할 말을 잃었다.

양하원은 또래의 사내아이들보다 키가 컸고, 아버지에게 배운 무예가 수준급이었다. 8년 전 아버지 양진을 따라 천수 농현으로 이사했을 때였다. 농현의 불량한 소년들은 낙양에서 온 열세 살의 키 큰 소녀를 곯려 주려고 하였으나, 무력 대결에서 참패한 후 하나씩 양하원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오로지 열두 살의 마초만이 낙양에서 온 침략자에게 굴복하지 않고 저항을 계속했다.

2년 후, 양하원은 열네 살이 된 마초와의 결투에서 첫 패배를 당하자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여인의 몸으로 태어나서 이까짓 더벅머리 아이를 당해내지 못하는구나! 그렇다면 앞으로는 집안일에서 최고가 되리라!”

그녀는 그날 이후로 급속도로 무예에 흥미를 잃고 요리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농현의 소년들에게는 평화가 찾아왔다. 시간이 지나며 양하원은 인근 고을에까지 소문난 미인으로 자라났지만 농현의 청년들은 어릴 적 그녀에게 맞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아무도 연심을 품지 않았다.

마초는 당시의 일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원은 워낙 솔직해서 거리낌 없이 술을 마시고 사내들과 어울렸지. 그러나 누구도 하원에게 선을 넘어가며 무례하게 대하지 않았다. 다들 말로는 스승님의 딸이기 때문에 예의를 지키는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사실은 양하원이 지닌 무력을 알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오로지 마초만이 스스럼없이 양하원을 대했고, 청춘 남녀가 어울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연심이 싹트게 된 것이다.

그렇게 밤이 깊을 때까지 먹고 마신 후.

부간과 이회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자 마초는 양하원에게 눈짓을 했다.

“하원, 그럼.”

“으응.”

두 사람은 기척을 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자리를 떴다.

그리고 인근의 공터.

“바쁜 건 알지만 한 번이라도 만나러 오지 그랬어. 조금만 더 못 봤으면 내가 무슨 사고를 쳤을지 몰라.”

양하원은 마초와 나란히 걷고 있었다. 뒷짐을 지고 몸을 숙인 채로 마초를 올려다보며 계속 조잘조잘 말했다. 자신보다 키가 큰 정인을 올려다보면서 수다를 떨고 싶었지만, 그 정도로 키가 큰 사내는 없었다. 그러니 자신이 몸을 숙일 수밖에 없었다.

마초는 묵묵부답이었다.

“아초, 듣고 있어? 오랜만에 만났으면서 할 말이라는 게 뭐야?”

“하원.”

“응?”

“헤어지자.”

양하원이 걸음을 멈췄다. 마초는 몇 발짝 더 걸어가서 등을 보인 채로 멈췄다.

“…뭐라고?”

양하원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마초는 등을 보인 채 고개만 살짝 돌려서 대답했다. 회귀 전에 자신의 실수로 자신의 눈앞에서 죽었던 아내를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군문에 있어 보니 야심이 생기더군. 앞으로 마가군이 세력을 확장하게 되면 서량이나 관중 호족의 딸과 정략혼을 할 계획이다. 너도 혼기가 찼는데 내 욕심만 챙기기 위해 너를 붙잡고 있는 건 서로에게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스승님을 통해 좋은 혼담이 많이 들어올 테니 너무 마음에 두지 말고…….”

“그게 다니?”

마초의 말이 늘어지자 양하원이 말을 끊었다.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서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미안하다.”

“맹기.”

양하원은 처음으로 마초를 자로 불렀다. 이름으로 부르는 것보다 예의를 지키는 호칭이었다.

“알았으니까 변명하지 마. 꺼져.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양하원은 마초에게서 등을 돌렸다.

두 사람은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영영 다시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던 아내다. 마초는 당장이라도 뛰어가서 양하원을 끌어안고 싶었다.

‘하지만… 내 눈앞에서 죽었던 아내를 마주 대하는 것이 너무나 괴롭구나. 미안하다, 하원. 이번에는 부디 평범한 사내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라.’

마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양하원을 보고만 있어도 그녀의 최후가 계속 떠올랐다. 십 년간 그를 괴롭혀 온 악몽이었다. 평생 악몽 속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나는 그대를 사랑했노라.’

그 말은 굳이 하지 않기로 했다. 양하원은 지금은 철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 누구보다 현명하고 강한 여인이다. 틀림없이 자신보다 더 좋은 사내를 만나서 더 많은 사랑을 받을 것이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지금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안녕히.”

마초는 양하원의 뒷모습을 보며 한 마디를 남기고 걸어갔다.

양하원은 마초에게서 등을 돌린 채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기다렸다.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거리가 멀어지자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제서야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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