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
212화 한잔 어때요
“야, 말은 똑바로 하자.”
“예?”
“너 인마, 학교 어디 나왔어?”
“그게… 남이고등학교요.”
“그럼 내 후배잖아.”
순간 이영제가 입을 다물었다.
강형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먼저 다녔다. 너 태어나기 전부터 골목에서 술래잡기했고, 이 동네 목욕탕도 너보다 먼저 다녔어. 팔백 원 할 때부터!”
광안리 목욕탕은 지금도 2,500원으로 무척 저렴한 편이다. 온천 나온다는 소문이 돌면서 비슷한 시기에 너무 많은 목욕탕이 생겨 그렇게 된 것이다.
물론 시설은 삼십 년 전 그대로지만, 그래도 오래된 단골들은 멀리서도 찾아오고 있었다.
“내가 이 뒤에서 회비빔국수 먹을 때 넌 요구르트 빨고 다녔어. 그리고 새벽집에서 콩나물국밥으로 해장할 때, 넌 교복 입고 다녔다고.”
이게 무슨 소린가 하겠지만,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란 애들은 다들 알고 있는 말이었다.
두 곳 모두 20년이 넘은 가게였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추억이 머무는 장소였던 것이다.
“그런데 나보고 이쪽으로 오지 말라고? 너 미쳤냐?”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라…….”
“아니긴 뭘 아냐? 확 진짜 성질대로 하려다 참았더니 해도 너무하네.”
순간 욱했지만, 주먹을 쥐진 않았다.
생각해 봐라.
키가 190에 가까웠고 체중이 90킬로그램대였다.
그런 근육질의 남자가 상대방 멱살이라도 잡는다 치면, 제일 먼저 신고가 들어갈 거다.
어쩌면 살인미수라고 소문이 날지도 모를 일.
해서 강형우는 신체적 접촉은 무조건 참기로 했다.
“그리고 기왕 장사 시작했으면 제대로 해야지. 이게 뭐냐?”
“예?”
“돈가스 소스에 다시다 육수 탔지?”
정곡을 찔렸는지, 이영제가 움찔했다.
강형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맛을 최대한 비슷하게 내려고 편법을 쓴 건 알아. 그런데, 내가 만든 거하고 차이가 크다.”
강형우가 추구하는 건 매일 먹을 수 있는 집밥이었다.
그게 지성분식의 힘이었다. 꾸준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내어놓음으로써, 단골들을 붙잡는 것이다.
하지만 영재분식의 돈가스 소스는 그렇지 못했다.
고기 육수 대신에 다시다를 넣은 것.
당연히 한두 번 먹는 건 괜찮다. 건강에 좋냐 나쁘냐는 논란은 떠나서 딱히 위험한 건 없었고, 실제로도 많은 가게에서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서너 번 먹으면 질린다는 거다.
게다가 장이 예민한 사람은 화장실 곁을 떠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맛간장에 과일 대신 설탕, 아니, 사카린도 쓴 것 같은데?”
또다시 이영제가 움찔거렸다.
사카린은 고작 사오 년 전에 유해물질 논란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어서 가정용 제품은 얼마 없었고, 대신 대부분을 업소나 공장에서 소비하고 있었다.
또, 의심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아서 아직은 아이들이 먹는 과자나 아이스크림에는 사용 금지였다.
물론 불법은 아니지만 아직은 논란의 여지가 남았던 것이다.
“나름대로 차별화를 두기 위해서 씬라면을 쓰는 것 같은데, 그럴 거면 많이 만들어봐야지. 대충 비슷하다고 그냥 팔면 손님들이 싫어할 거야.”
“그만하세요.”
“그래, 그만할게. 그런데 이건 꼭 들어. 장사라는 쉬운 거 아니야. 그냥 음식 좀 배웠다고 아무나 성공할 수 있다고 보면 오산이라고.”
자신도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했다.
맛만 있으면 다 될 것 같았고, 금세 부자가 될 거라 상상했었다.
현실은 완전 시궁창이었다.
음식 장사는, 음식만 봐서는 안 된다. 직원 관리도 해야 하고 손님들과도 유대감을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사람 상대하는 일이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
그전까지는 꽤나 고생하겠지.
그때 이영제가 날카롭게 내뱉었다.
“형은, 제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세요?”
“그럼?”
“저 다 들어서 알고 있거든요. 형 한 달에 삼천만 원씩 벌어간다면서요?”
실제로는 거의 세 배나 되지만, 2호점 기준으로는 그렇다고 볼 수 있었다.
물론 그 수익에는 다른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거의 사 년 동안 밤잠을 줄여가며 일했고, 지금도 하루 16시간 일을 한다. 지난 기간 개고생하며 차곡차곡 쌓아올려서 얻은 보상인 것이다.
무엇보다, 당시로써는 거의 전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돈을 투자했다. 실패하면 전부 날아가는 걸 알면서도 도전했고, 많은 고생 끝에 성공했던 거다.
게다가 지금도 매출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걸 세심하게 살피고 있었다.
맛이 변하거나, 사람이 변하면 안 되니까.
과연 이영제가 그걸 알까 싶었다.
하지만 돌아온 말은 엉뚱했다.
“진짜 열받더라고요. 사장은 와서 얼굴만 비추고 가는데 삼천만 원씩 벌고, 누구는 하루 열두 시간씩 주방에서 일하는데, 월급 꼴랑 이백 주고, 그렇게 일시키는 게… 안 미안하세요?”
“뭐?”
순간 어이가 없었다.
한 달에 이백오십을 꼬박꼬박 챙겨주고 있었고, 석 달에 한 번씩 사백 정도를 입금시켰다.
이영제 나이 또래를 생각하면 정말 많이 버는 편이어서 나름 잘 챙겨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적다고?
“내가 바보도 아니고, 주변에서 그러더라고요. 저 정도 실력이면 한 달에 사오백은 받아야 한다네요.”
“누가 그래?”
“그건 우리 쪽… 실장님이 그러더라고요.”
대번에 감이 왔다.
누군가 이영제를 꼬시기 위해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인 게 틀림없었다.
“실장님이 그러더라고요. 저보고 가게 차리면 한 달에 천만 원 이상 벌 수 있다고 하네요.”
“그래서? 그만두겠다고 한 거야?”
“당연하죠. 미쳤다고 그 고생을 해요? 저 봐요. 요즘 행복해요. 11시 출근해서 8시까지만 일하고 퇴근하거든요. 그런데 이달에만 천만 원 이상 들어올걸요?”
확실히 오픈발도 받았고, 지성분식 단골들도 많이 뺏어갔다.
오히려 그 정도 수익이 안 나는 게 이상한 거겠지.
“진짜 형 밑에서 일할 때는, 형 말이 다 맞는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실장님 이야기 듣고 보니 내가 참 미련했다 싶더라고요.”
이영제가 노려보는데, 정말 난감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해줘야 할지 답이 나오질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단단히 홀렸는지, 나를 아주 천하의 나쁜 썅놈 새끼로 보고 있었다.
“영제야.”
“왜요?”
“참 기분 더럽다. 네 입장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진짜 내 밑에서 보고 배운 게 그게 다라는 게, 참 그러네.”
지난 일 년간 동고동락하면서, 내가 얼마나 힘들게 장사하는지 봤을 거다.
지금은 그걸 부정하고 있었다.
순간 배신감과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이게 아마 이율배반적이라는 건가?
“됐고. 넌 네 장사 해라. 나도 굳이 간섭도, 해코지할 생각도 없거든. 아니, 솔직히 사실 할 말은 많았는데, 막상 네 얼굴 보니까 말이 안 나오네. 뭐랄까? 전부 쓸데없다는 느낌이랄까?”
이영제는 오히려 비웃는 것처럼 입술을 비틀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무슨 말을 해도 들어먹지 않겠지?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우리 가게 따라 한 거 아는데, 법적으로는 잘 모르겠네. 하지만 메뉴판은 꼭 바꿔라. 네가 만들어서 사진 찍은 걸로 해야지. 왜 우리 가게 사진 갔다 쓴 거냐? 그렇게 나쁜 놈 취급하면서.”
“그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장사 전에 음식을 제대로 만들어봤다면, 그걸로 사진을 찍었을 거다.
하지만 그러질 못했으니 급하게 폰에 있는 사진으로 메뉴판을 만들었겠지.
“내 친구 홍태구 알지? 그 새끼 성질 더럽거든. 아마 여기 메뉴판 보면 고소할지도 몰라.”
홍태구는 사기도 많이 당했고, 못 받은 돈도 적지 않았다.
이후, 조금 큰 회사 일들은 거절하고 있었다. 해봐야 작업물 뺏기거나 푼돈밖에 남질 않았으니까.
때문에 자신이 작업한 건, 무조건 사인 같은 걸 남긴다고 했다. 디지털 표식이란 게 있다면서 함부로 도용하면 바로 고소한다고 했었다.
“메뉴판은 새로 만들든 사진을 없애든 알아서 해. 그리고 부디 빈다. 너도 직원들한테 내가 준 만큼이라도 월급 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마.”
순간 이영제가 움찔했다.
강형우가 정말 미련 없이 돌아섰다.
더 있어봐야 할 것도 없었고, 해줄 말도 아깝다고 느꼈으니까.
이영제는 한참이나 담배를 피다가 결국 욕설을 내뱉었다.
“씨발, 지가 뭐라고.”
***
“기분 더럽네.”
돈이 중요하긴 하다.
먹고사는 게 제일 우선이니 그게 당연한 거였다.
그래도 그렇지, 조금 너무하다 싶었다.
솔직히 이영제는 나보다 먼저 출근한 적이 없었고, 나보다 늦게 퇴근한 적도 없었다. 그 이전과 그 이후의 내 모습을 모르는 것이다.
동시에 서럽기도 했다.
곁에서 일했던 녀석조차 날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게, 씁쓸했던 거다.
“에이 씨, 지가 알아서 하겠지.”
강형우는 그나마 가지고 있던 안타까움까지 모두 버려 버리기로 했다.
오히려 완전한 타인처럼 생각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놈의 정이 뭐라고, 자꾸 무언가가 발목을 잡는 기분이었다.
역시 이럴 때는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강형우는 옥상에 올라가 한참 동안 심호흡을 했다. 그랬더니 머리가 맑아지고 가슴이 차분히 진정되더라.
그런 뒤 내려왔는데,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오빠, 한잔 어때요?”
공지혜가 그렇게 말하면서 식탁을 가리키는데, 야식치고는 너무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김치전골에 내가 좋아하는 갈비찜. 그리고 소주 한 병!
“애란 이모한테 배웠는데, 입에 맞나 모르겠어요.”
“우리 지혜가 해준 건 다 맛있지.”
동거를 하면서 공지혜가 미안해하는 게 있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밥을 차려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사정이 뻔하니 전혀 미안해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먼 미래(?)를 생각하면 이참에 음식 좀 배워야겠다고 했다. 해서 아침에 애란 이모와 희숙 이모의 일을 조금 거들고 출근했던 것이다.
“오빠, 한잔~”
쪼르륵, 잔에 소주가 채워지자 가슴에서 뭔가 차오르는 게 있었다.
공지혜가 권해서 한 잔 바로 넘겼는데, 짜르르하더라.
그런데 최근에 마신 술 중에 가장 독했다.
이게 인생의 맛이라고 했던가?
“오빠, 저도 한 잔.”
“어.”
강형우가 잔에 소주를 채워주는데, 그사이 공지혜가 김치전골과 갈비찜을 접시에 덜어줬다.
맛있었다.
특별히 대단한 맛은 아니었는데, 그냥 따뜻하다고 해야 할까?
마치 가슴을 포근히 감싸주는 듯했다.
“오빠, 오늘도 고생했어요.”
“지혜도 고생 많았어.”
그렇게 한 잔, 두잔 씩 마시고 나니 금세 소주 한 병이 비워졌다.
안주가 많으니 조금 아쉬웠다.
그때 공지혜가 소주 한 병을 더 가져왔다.
“내일 일 있으니까, 오늘은 이거까지만 마셔요.”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 한 시였다. 일어날 시간을 생각하면 슬슬 잠자리에 들어야 하건만, 왠지 그러기 싫었던 것이다.
공지혜가 그런 마음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두런두런 이야기하다 보니 속에 쌓인 울화가 가시는 걸 느꼈다.
생각해 보니, 굳이 이영제한테 인정받을 필요는 없었다.
이미 공지혜와 신원이 형, 그리고 지성분식 식구들이 나를 알고 있었다.
동시에 우리 동네 사총사 형들과 주혁 형도 내가 맞다고 했었다.
그래. 이영제가 뭐라고!
강형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남은 한 병까지 깔끔하게 비워 버렸다.
마치 미련을 비우듯이 말이다.
***
“역시 예상대로네.”
그 일(?) 이후 일주일이 더 지났다.
지성분식 2호점의 매출이 서서히 올라오고 있었다. 이전만큼은 아니었지만, 거의 80% 선까지 회복된 것이다.
이유는 여럿 있었지만, 강형우가 한 건 딱 하나였다.
맘카페에 정중히 글을 올린 것.
사실 내용은 별것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