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
182화 시켜만 주십시오
-형, 전화 끊지 마요.
너무도 다급한 목소리에 강형우는 화들짝 놀랐다. 그러다 너무 익숙한 느낌에 번호를 확인했다.
확실히 모르는 번호였는데, 곧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수신자 부담이었던 것이다.
-형! 형~
“귀 안 먹었다. 무슨 일이냐?”
강형우는 애써 태연히 말했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여전히 급한 것 같았다.
-그게요. 차비 좀… 보내주세요.
“차비?”
-형. 우리 계좌 알죠? 우체국.
“아는데, 왜?”
-형, 전화 카드 돈 다 됐어요. 이게 끊길지도 몰라요. 형 부탁 좀 할…….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신종 보이스 피싱인 줄 알 거다. 게다가 숨넘어가는 목소리를 들었다면, 깜빡 속아넘어갔겠지.
하지만 강형우는 대한민국 예비군이었다. 이미 상황을 눈치챘고, 무엇보다 연기가 너무 어색했다.
“인우야, 이거 수신자 부담이다.”
-헉.
“내 전화비 나가니까, 상세히 설명하렴. 아니면 차비 없이 휴가 나오든가.”
순간 수화기 너머에서 다급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인정둥이가 손짓 발짓으로 신호를 교환하는 게 뻔히 보였던 것이다.
“말 안 하면 끊는다?”
-형, 형~
역시나 인정둥이 이놈들은 쉽게 불지 않았다. 부처님 손바닥의 손오공처럼, 버티고 버티다가 최대한 개기고 나서야 포기하고 마는 것이다.
사연은 간단했다.
말년 휴가가 갑자기 땡겨졌단다. 그런데 차비가 없어 부산까지 내려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너희들 돈 너무 막 쓰는 거 아니냐?”
-형도 알잖아요. 군인 월급 진짜 발톱 때만큼 나오지, 훈련 한번 가면 드는 돈도 많고, 또 우리가 병장이잖아요. 외박 한 번 나가면 한 달은 거지예요.
안다. 너무 잘 알아서 짜증이 날 정도였다.
요즘 얼마나 받는지는 모르겠는데, 한 달에 십오만 원이 안 된다고 들었다. 그걸로 애들 한 번 데리고 냉동식품 회식하면 단숨에 거덜난다.
또 외박 한 번 나가면 일이십만 원은 그냥 깨진다. 저녁 먹고, 좀 놀다가 술 한잔하고 여관 잡으면 순식간에 날아가는 것이다.
물론 인정둥이들이 휴가 나올 때마다 벌어가는 돈도 적지는 않았다.
하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 수준에 불과했다. 결국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야 그나마 원활한 군 생활이 가능한 것이다.
-누나도 연락이 안되고, 엄마는 전화도 안 받고…….
영지야 해외에 나가 있었고, 엄마는 저녁시간 때 무지하게 바빴다. 게다가 지금처럼 추운 계절에는 손님들로 미어터지는 수준이라 통화는 거의 포기해야 했다.
결국 가장 꺼리는 나한테 전화한 게 그래서였다.
“근데, 휴가가 땡겨졌다고? 그런 경우가 있나?”
보통 말년 휴가 나왔다 들어가면, 며칠 있다가 바로 제대였다.
짧으면 이삼 일, 길면 열흘 정도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정둥이는, 아직 제대 날짜 까지는 한 달이 넘게 남아 있었다.
그게 이상해서 물어보려는데 인우가 먼저 설명했다.
-그게요. 형… 꼬여서 그래요.
들어보니 웃음이 나왔다.
중대장이 진급이 코앞이란다. 그래서 무척 중요한 혹한기 훈련을 무사히 마쳐야 하는데, 반대로 병장들은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했다.
지금이야 군복무가 줄어서 그런 일은 없지만, 강형우 때는 그랬다.
제일 재수 없는 놈이 유격 훈련 세 번, 그다음이 혹한기 훈련 세 번 하는 경우라고.
그만큼 춥고, 배고프고, 힘들고, 서러운 훈련이 혹한기였다. 어떻게든 빠질 수 있으면 빠지려고 발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행히 인정둥이는 해당되지 않아서 마음을 놓고 있었단다.
훈련 기간이 말년 휴가랑 겹쳤기 때문이다.
그랬는데, 뒤통수를 맞았다.
중대장이 그랬다.
휴가 먼저 갔다 와서 혹한기 일주일 뛰고 제대하라고. 싫으면 영창 가서 이 주 늦게 제대하라는 것이다.
진짜 날벼락 같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까라면 까는 게 군인 아니겠는가?
결국 인정둥이는 중대장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게다가 남은 포상 휴가까지 붙이니 바로 다음 주 화요일날 나오게 됐다는 것이다.
황당한 건, 이 이야기를 불과 어제 들었다는 거다.
인정둥이들이 다급히 날 찾은 게 그래서였다.
“그래서 얼마 필요한데?”
-형님의 사랑만큼 필요합니다.
“날 시험하는 게냐?”
-아닙니다. 주시는 대로 달게 받겠습니다. 장군!
“그래, 휴가가 몇 박 며일이라고?”
또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아무래도 예상보다 훨씬 긴 모양이었다.
어떻게든 며칠이라도 빼서 도망치려는 게 분명했다.
“사랑하는 동생들아. 부산까지 걸어서 내려오렴. 경기도니까 왔다 가면 휴가 끝나겠네.”
-형님, 13박 14일입니다. 내려가는 대로 바로 가게로 출근하겠습니다.
“오케이. 우체국 맞지?”
-옙.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강형우는 피식 웃고 말았다.
진짜 신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 같을 때에 인정둥이가 휴가 나오다니, 정말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누구보다 믿고 맡길 수 있는 충실한 노예(?)들이 아니겠는가?
***
“박은정이라고 해요.”
“한수예라고 합니다.”
“양미루입니다.”
창주 형 소개로 온, 지우 형수 친구들이라고 했다.
다행히 강형우를 스다듬었던 가장 짖궂은 누님들은 보이질 않았다.
해서 이력서를 살펴보니 확실히 경력은 무시 못 할 정도였다.
박은정과 한수예는 지우 형수와 동갑인 친구였고, 양미루는 두 살 어린 동생이었다. 이렇게 셋이서 거의 사 년 동안 양산의 식품공장에서 같이 일했다는 것이다.
현재 서른두 살 친구들은, 애들이 어린이집을 다닌다고 했다. 출퇴근 시간만 조정해 주면 당장 모레부터라도 출근이 가능하다나?
마지막으로 양미루는 강형우와 동갑이었다.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그냥 언니들 따라 일하러 온 듯한 느낌이 강했던 것이다.
그렇게 한 시간 동안 세 사람하고 이야기해 본 결과, 일단 한 달 수습 기간을 두기로 했다.
이후, 무기 계약직으로 일단 연봉 천오백에 일하기로 합의를 봤다.
대신 몇 가지 조건들이 있었다.
무조건 연차나 월차는 확실히 챙겨달라고 했다. 그게 안 되면 바로 그만두겠다는 것이다.
또, 둘 이상은 동시에 쓰지는 않겠단다.
뭔가 이상하다 싶었지만, 주혁 형한테 들은 게 있어서 이해는 되었다. 돈도 돈이지만 가족이 더 우선인 사람들도 많았으니까.
강형우는 그렇게 세 직원을 받았다. 그리고 이날 또 하나의 면접이 기다리고 있었다.
“차인철이라고 합니다.”
의외로 무뚝뚝한 남자였다.
이력서를 보니 올해 스물아홉이었다.
예상과는 달리 평범한 체형이었는데, 그래도 잔근육을 보니 힘 좀 쓸 것 같았다.
“덕수 이사님한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강형우는 면접이기에 직책까지 붙여서 말했다. 그러자 차인철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시켜만 주십시오.”
말투에서 느껴지는 딱딱함이 진짜 그쪽, 조폭 계열처럼 느껴졌다.
덕수 형은 대체 어쩌다가 이런 사람을 알게 된 건지.
“그전에 전과… 있다고 하셨죠?”
“죄송합니다. 어려서 실수를 좀 했습니다.”
강형우는 고민이 안 될 수 없었다.
절도 전과 4범이었다. 이걸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물어보기도 애매해서 조금 당혹스러웠다.
“근무 경력을 보니까, 세차장하고 카센터가 있네요? 그런데 일 년 이상 일한 곳은 없군요.”
“예. 사정이 있어서 그렇게 됐습니다.”
강형우가 가장 꺼려하는 게 이런 쪽이었다.
외식업 계열에서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꾸준함도 높게 평가했다. 짧게 일하고, 수시로 결근하고, 갑자기 연락이 끊기고 하면 같이 일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한 사람이 비는 만큼, 나머지 사람들이 일을 더해야 했으니까.
“그런데 어떤 일인지 알고는 오셨죠?”
“예. 음식 만든 거 배달하는 거라고 들었습니다. 육수나 재료 같은 거만 나르면 된다고.”
“근데 힘이 많이 들어요. 괜찮겠어요?”
강형우가 조심스럽게 묻는데, 차인철이 갑자기 소매를 걷었다.
“제가 이래 보이지만, 힘 하나는 장사입니다. 팔씨름 한 번 해보면 아실 겁니다.”
“예?”
“제가 이기면 꼭 일 시켜주십시오. 대신 지면 두말않고 물러가겠습니다.”
딱 말투가, 방송에 나오는 의리의 사나이와 비슷했다.
문제는 내 체격이었다.
아무리 힘이 좋다고 하지만, 이미 체급에서 두 계급 이상 차이가 났다. 게다가 팔씨름으로 져본 적이 없기에 무모한 도전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차인철은 당당하게 책상에 팔꿈치를 올렸다.
강형우가 잠시 망설이는데 차인철이 말했다.
“빵에서도 한 번도 진적이 없습니다.”
“그래… 요?”
“예. 제가 지면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아오~ 정말 싫은 말이었다.
그놈의 형님, 형님.
대체 저쪽 동네 사람들은 왜 그 말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그렇다고 대놓고 도발을 하는데, 그냥 무시하고 넘기기도 그랬다.
“한 번 해봅시다.”
강형우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차인철의 손을 잡았다.
결과는 뭐, 보나마나였다.
***
“태어나서 처음입니다. 형님.”
차인철이 그렇게 말하니 식당 손님들이 힐끔힐끔 쳐다봤다.
잘못 들으면 이상한 쪽으로 오해할 만했으니까.
조금 난감했지만, 정덕수가 이해하라면서 어깨를 두드렸기에 그냥 한숨만 내쉴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힘은 좋았다.
덕수 형이나 민석이가 엄두를 못낼 정도로 팔 힘이 장난이 아니었다. 손을 맞잡을 때 살짝 꺾는 것부터, 몸 쪽으로 당겨서 내리찍는 것까지 치면 팔씨름 고수라고 불릴 만했던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나였다.
한 30초 정도는 얼마나 힘 쓰는가 받아줬다. 그런 뒤, 가볍게 팔을 당겨 팔씨름을 끝내 버렸다.
작정하고 힘을 줬다면 지금 숟가락도 못들고 있을 게 분명했으니까.
“제가 졌으니까, 깔끔하게 물러나겠습니다.”
차인철이 고개를 숙이니, 이상하게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딱히 호감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진실되어 보인다고나 할까?
“형우야. 얘, 괜찮아. 그냥 쓰자.”
“그게요. 참 뭐라고 해야 하나?”
역시나 걸리는 건 전과였다. 한두 번도 아니고 무려 네 번이라니.
들어보니 그것도 비싼 외제차만 골라서 훔쳤다는 것이다.
덕수 형이 차인철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야, 니가 니 입으로 말해. 괜히 오해하잖아.”
“그럼 소주 한 병만 시켜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덕수 형이 눈치를 보자, 강형우가 먼저 소주 한 병을 시켜 버렸다. 어차피 오늘 일은 이걸로 끝이었고 안 그래도 한잔 생각이 간절했던 것이다.
그러게 두루치기 정식이, 안주로 바뀌었다.
동시에 술병이 늘어나면서 차인철의 인생 이야기도 길어지고 말았다.
“처음에는 실수였습니다.”
군대 갔다와서 카센터에 취직을 했다. 숙식 제공에 기술 가르쳐 준다고 해서 월급 오십만 원만 받기고 일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처음 하는 일은 세차였다.
그러던 중에 비싼 스포츠카를 맡게 됐는데, 호기심이 생겼단다.
이런 차를 타면 기분이 어떨까?
“그때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철이 없고 많이 모자랐죠.”
세차를 끝낸 뒤 시동을 걸고 한 바퀴를 돌았다. 그러다 욕심이 나서 동네를 한 번 더 돌았단다.
그 시간은 불과 10여 분.
“주인이 차량 절도로 신고를 했더라고요.”
황당하게도 그게 전과가 됐단다.
고작 카센터 직원 새끼가 기름때 묻은 옷 입고 자기 차를 몰았다나?
그게 기분 나쁘다고 합의를 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돈 많은 사람들은 그런 거 봐주는 거 없다고 하네요. 경찰이 중간에서 선처를 부탁했는데, 그냥 깜빵 보낼 거라고 난리를 쳐서…….”
다행이 벌금 내고 나왔지만, 전과는 전과였다.
이후에도 어이 없는 일이 생겼다.
어떤 사람이 차 문짝 좀 따달라고 해서 출장을 갔는데, 차주가 아니었다. 진짜 전문털이범이라 졸지에 공범으로 몰려서 또 전과를 달게 된 것이다.
“점잖은 노신사였습니다. 고생했다고 십만 원이나 주는데, 그게 문제였죠. 진짜 멍청했던 겁니다. 솔직히 그런 게 죄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요.”
차인철은 그렇게 말한 뒤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덕수 형이 잔에 술을 따라주면서 말했다.
“무조건 변호사 사서 방어를 해야 되는데, 너도 봐서 알겠지만, 애가 말주변이 없어. 오해 사기 딱 좋은 성격이랄까?”
그렇게 어리버리하게 전과가 두 개가 달렸다.
차인철은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넣고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