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
181화 심상치 않네
까맣던 밤하늘이 밝아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백사장에 사람들이 점점 몰려들더니, 공지혜가 말한대로 바다 한쪽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새해 첫 일출.
매일 뜨는 해가 뭐가 새롭겠냐마는, 새해 첫날이니만큼 의미가 있기는 했다.
뭔가 경건해진다는 느낌이랄까?
가만히 보고 있는데, 해의 끄트머리가 올라왔다 싶더니 금세 바다가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오빠, 소원 빌어요.”
“아! 그렇지.”
강형우는 눈을 감았다.
소원이라.
지금 당장은 공지혜가 떠올랐다.
어리버리하게 같이 살자고 했는데, 항상 옆에 있어주겠다고 했다. 일단은 거절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던 것이다.
물론 이대로 쭈욱 같이 있으려면 더욱 큰 노력이 필요했다.
많이 부족한 건 나였다.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잘 챙겨주지 못했고 같이 있는 시간도 남들에 비해 많이 부족했으니까.
그걸 이해해 주는 게 고마웠고, 또 미안했다.
그 직후 다른 여러 가지가 떠올랐다.
일단 회사가 잘됐으면 좋겠다.
3호점도 예상한 대로 되었으면 하고, 그동안의 노력들이 보상을 받았으면 좋겠다.
또 영지도 인정둥이들도 잘 지냈으면 좋겠고, 어머니의 건강도 빌었다.
그러다 뭔가 이상한 기척에 눈이 떠졌다.
바로 앞에 공지혜가 있더라.
해를 등지고 내 얼굴을 빤히 보고 있는데,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왜?”
“그냥요. 이 오빠가 내 남자 친구구나 싶어서요.”
“그게 무슨 말…….”
공지혜가 두 팔을 뻗더니 갑자기 내 머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엉겁결에 고개를 숙였는데 공지혜가 귀에 속삭이듯이 말했다.
“고마워서 그래요. 고마워서.”
대체 뭐가 고맙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공지혜는 이어서 말했다.
“가끔은 괘씸하고 밉고 화나게도 하지만, 그래도 속마음을 말해줘서 고맙다고요.”
그 직후 손을 풀더니 공지혜가 이마에 뽀뽀를 했다.
아오, 보는 사람들도 많은데…….
당황하고 쑥쓰러워하는데 그제야 공지혜가 손을 풀었다.
그런 뒤, 환하게 웃으면서 팔짱을 끼더라.
“오빠는 새해 소원 뭐 빌었는데요?”
“그냥… 뭐, 이런 거 저런 거?”
“그 안에 나 있음?”
“당연히 있지.”
나름 자신있게 말하자, 공지혜가 헤실거렸다.
“나도 소원 빌었어요. 오빠 항상 건강하고, 장사도 잘되라고요. 그리고 하나 더 있는데… 들어줄 수 있어요?”
“어? 뭔데? 어려운 거 아니면 해줄게.”
가볍게 대답했다가 외통수를 맞았다. 모든 남자 친구들이 가장 어려워한다는 바로 그거였다.
“이번 설에 우리 집 갈래요? 아빠, 엄마 보러?”
***
“민석아, 맛 봐봐.”
김창주가 육수를 따로 덜어서 그릇을 내밀었다.
조심스럽게 맛을 본 김민석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김창주도 맛을 본 뒤 엄지를 척 들었다.
하지만 육수통은 그거 하나가 아니었다. 무려 여섯 개나 되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또다시 맛을 보고 각각의 육수를 조심스럽게 하나로 섞었다.
“흐음, 이거 확실히 깊이가 더 있네.”
“그러게요. 대량으로 해서 그런 건가?”
김민석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마침 강형우가 들어왔다.
“형! 지금 뭐하는 거예요?”
“어? 왜? 육수 확인하고 있잖아.”
“아오~ 제가 몇 번을 말했어요. 위생복, 조리 모자하고 입 가리개 하고, 앞치마 착용, 그리고 항상 세정제로 손 씻고 조리실로 들어오라고 했잖아요.”
강형우는 울컥하는 걸 억지로 참고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형~ 여긴 회사예요. 규정이 있고, 반드시 지켜야 할 게 있다고요. 불시에 담당 공무원이 왔을 때도 그러고 있으면 큰일 나요.”
“어, 미안.”
“그리고 민석이 너도 인마. 이제 정직원이면 제대로 해야지. 언제까지 어리버리할래? 앞으로 직원 들어오면 네가 다 가르쳐야 하는데, 내가 하나에서 열까지 매일매일 지적해야 되냐?”
“죄송합니다. 형님.”
“사장님!”
“아, 예. 사장님.”
“앞으로 회사에서 형님 소리 한 번만 더해봐? 진짜 주먹 날아간다.”
강형우는 으름장을 놓더니 바로 돌아섰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였다.
현재 회사는 조금 애매한 상태였다.
새해가 지나고 열흘이나 지났지만, 아직 준비가 부족했다.
일단 맛을 내는 건 거의 끝났다.
강형우와 사총사 형들이 번갈아가면서 출근해 김민석을 가르쳤다. 게다가 그전에도 각각의 가게에서 근무하면서 배웠기 때문에 확실히 그 부분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약간의 시행착오가 있기는 했다.
가게에서 음식을 만들 때와 회사에서 만들 때, 환경의 차이가 분명히 있었다. 훨씬 큰 주방에 대용량 육수통, 거기에 화력까지 훨씬 강해서 여러번 조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 과정은 끝났고 이제 하나씩 번갈아가며 생산해 보고 있었다.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 물량을 받아서 만들어보는 중이었던 것이다.
“휴우, 빨리 직원을 구해야 하는데 답답하네.”
필요한 인원은 일단 다섯 명이었다.
각각의 파트 하나씩을 맡길 생각이었는데 새해라 그런지 이상하게 지원자가 없었다.
또, 배달 직원도 구하지 못해서 강형우가 직접 움직이는 형편이었다. 방금도 냉장 탑차를 타고 우리 통닭에 염지닭을 납품하고 온 것이다.
뭐, 그런 것까지는 좋다 이거다.
아직 준비가 다 안 돼서 어수선한 것도 있었고, 일이 중구난방인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심을 잡아야 하는 김민석이 아직 공사 구분을 못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방문했을 때 규정을 지키라고 해야 하는데 아직도 형님 소리만 하면서 다니고 있었으니 답답했던 것이다.
강형우가 위생복을 입고 나오자마자 김창주가 말했다.
“미안하다, 형우야. 그냥 잠시 보고 간다는 게…….”
“형, 우리 약속한 거 있잖아요. 잠깐 보고 가더라도 위생복은 꼭 입으라고요. 그리고 여긴 형 회사이기도 해요. 단속 맞아서 벌금 나오면, 우리 돈 나간다고요.”
“알지. 아는데… 내가 깜빡했다.”
“휴우, 아무래도 프린터 하나 해서 붙여놓든가 해야겠어요. 근데 사람이 안 구해지니… 답답하네요.”
강형우가 한숨을 내쉬는데 김창주가 손뼉을 쳤다.
“아! 안 그래도 그거 이야기 하려고 들른 건데, 야~ 너 전에 내 결혼식 때 와이프 지인들 기억나냐?”
“글쎄요? 좀 오래돼서…….”
“왜, 회사 친구들이라고 한 번 인사한 적 있잖아.”
순간, 머리를 스치는 기억들이 있었다.
“호호, 총각 몸 좋네.”
“그러게, 힘 잘 쓰게 생겼어.”
“아직 장가 안 갔으면, 이 누나는 어때?”
“아서라, 아서. 애 둘인 아줌마가 겁도 없이. 나 돌싱인데 어떻게 시간 좀 돼?”
이 정도가 순화된 버전이었다.
지우 형수 친구들이라며 자신을 둘러싸고 온갖 음담패설에 수작을 부리는데… 누나들이 그렇게 무서웠던 건 생전 처음이었다. 뒷풀이 자리에서 은근슬쩍 더듬기까지 하는데, 소름이 돋았던 것이다.
“그, 근데 왜요?”
“그게, 결혼하면서 회사 그만뒀는데 일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나 봐? 그런데 전에 회사는 자리가 없어서 구직 중이라네?”
“두루 컴퍼니?”
“어. 거긴 들어가고 싶다는 사람들이 넘치잖아. 자리 한 번 빠지면 거의 끝이지.”
진짜 일 잘하는 능력자가 아니면 거의 그렇다고 했다. 이미 입사 지원자만 수백 명이라면서, 퇴사했다가 다시 들어가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몇 명… 이나요?”
“글쎄. 대충 듣기로는 세 명 정도가 있는데, 일단은 너한테 먼저 물어본다고 했거든.”
강형우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누나들 성격이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았다. 그날 보여줬던 괄괄함(?)을 생각하면 일은 분명 잘할 것 같았지만, 왠지 모를 분란이 예상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가만, 세 명요? 혹시 그중에 경리 직원 할 만한 분 있어요?”
“아니, 다 음식 하는 쪽인데?”
“그래요?”
하긴 창주 형이 바보도 아니고, 회사 일하고 관련이 있으니까 이야기 꺼낸 거겠지.
“세 명이라. 일단…….”
강형우가 말하려고 하는데, 마침 전화가 울렸다.
이번에는 덕수 형이었다.
-형우야, 직원 구했냐?
“아뇨. 아직……”
-그럼 우리 사람 하나만 쓰면 안 되냐? 괜찮은 애 하나 있는데… 그게 좀.
덕수 형이 이런저런 설명을 하는데, 휴우~ 여기도 정말 심상치가 않았다.
절도 전과 4범이란다. 이제 마음 고쳐먹고 제대로 일하려고 하는데, 취직 자리를 구하지 못해 어려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뭐, 경력 같은 거 있어요?”
-그게… 운전은 기가 막히게 잘하거든. 안 그래도 배달 직원 필요하긴 하잖아?
“그야 그런데. 정말 운전 잘해요?”
-당연하지. 외제차 절도가 전문이었으니까.
“헐.”
이 무슨 해괴한 논리라는 말인가?
진짜 어이가 없고 황당하긴 했지만, 덕수 형이 부탁하니 일단 면접은 보겠다고 했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창주 형한테도 말했다.
“형. 그 세 분 일단 면접은 봐야 되니까요. 이력서 들고 한 번 들러달라고 하세요.”
“그래. 알았어. 그리고, 민석이 너무 구박하지 마. 네가 얼마나 갈궜으면, 끊었던 담배를 다시 물겠냐?”
“형도 생각해 봐요. 우리 회사가 조폭도 아니고, 제발 건물 안에서만은 형님 소리 하지 말라고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그거 하나 못 고치고 있잖아요.”
“쩝. 그게 습관이라 그런 거잖아.”
“그래도 고쳐야죠. 공사 구분은 명확해야 하니까요. 막말로 우리끼리 있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죠. 하지만 민석이 입장도 생각해야 하잖아요.”
이제 김민석 부장님이다.
앞으로 직원들 받으면 그렇게 불려져야 하는데, 본인 스스로가 격식이 없으면 지켜지기 어렵다. 게다가 직원 후보(?)들이 만만치 않게 심각하니 이건 확실히 해야 했다.
“그건 네 말이 맞긴 하네. 그건 그렇다 치고, 우리도 좀…….”
이 형이 갑자기 말을 어렵게 하기 시작했다.
“왜요? 뭐, 찔리는 게 있어요?”
“아니, 아니고. 그냥 그렇다고. 하하. 나 이만 간다. 면접은 이야기 해놓을게.”
창주 형은 그렇게 말하고, 민석이한테 인사한 다음 후다닥 사라졌다.
그 이유는 며칠 뒤에 알게 됐다.
***
“야. 태구야.”
-왜?
“인쇄 잘못된 거 같은데? 명함이… 이상해.”
강형우는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명함을 확인했다.
인성식품 사장 강형우.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형들 명함에 직책이 조금 이상했던 것이다.
“이거 왜 이사라고 되어 있냐?”
-너, 형들이 이야기 안 하디?
“뭐가?”
-하! 이 형님들이 구라를 쳤네. 난 이야기 다 된 줄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꿔달라고 해서 너한테 물어본다고 했더니 그냥 하면 된다고…….
홍태구 말이 그랬다.
형들이 몰래 전화해서 직책을 이사로 바꿔달란다.
아무리 동네 회사지만, 사장만 다섯 명이면 이상하다나? 그래서 형들끼리 회의한 결과 ‘이사’로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헐. 그래서…….”
어째 민석이한테 한 소리 할 때 눈치 보던 게 그래서 같았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야. 그런 일 있으면 전화를 해야지.”
-난 잘못 없다.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그리고 입금 좀 빨리 해라. 아무리 친구지만 까먹을 게 따로 있지.
“아~ 미안, 바로 보내줄게. 근데…….”
뚜뚜~ 뚜뚜~ 뚜뚜~
홍태구는 칼같이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순간 욱해서 뭐라 하려는데, 갑자기 폰이 울렸다. 그런데, 조금은 특이한 번호였다.
“여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