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
154화 밥 좀 지어볼까요
“대충은 나왔네.”
원래 예정보다 삼 주나 일이 밀렸다.
벌써 손 떼고 3호점과 다른 준비를 해야 했는데, 하필 타이밍이 애매했다.
신원이 형과 이은주의 결혼식이 딱 이 주가 남았다. 늦가을에 결혼한다고 들었는데 그게 벌써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무엇보다, 아직 신원이 형이 준비가 덜 된 게 컸다.
앞으로 자신과 공지혜가 빠지면 그 자리를 최민지가 맡게 된다.
하지만 신원이 형도 그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했다.
왜냐?
점장은 사장 대리나 마찬가지였다. 가게의 모든 빈 포지션을 대신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카운터를 보거나 손님 대하는 것도 해야 하는데, 아직은 많이 부족해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단골들과 더 깊은 친분을 쌓는다면?
분명 도움이 될 거다. 아니, 확실하게 부족한 부분이 메워질 가능성이 컸다.
강형우가 일일 요리교실을 추진한 건 그래서였다.
물론 그 이외에도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딱 이 주만 더 하고, 신원이 형 결혼식 이후에 지성분식 2호점을 나올 생각이었다.
이후에는 사무실을 알아보면서 여행을 갈 계획이었으니까.
***
“휴우, 긴장되네.”
강신원은 몇 번이나 거울 앞에서 복장을 확인했다. 이번에 강형우가 새로 맞춰준 점장 전용 조리복이었던 것이다.
특히 마음에 드는 게 가슴의 글자였다.
지성이 한자로 되어 있었는데,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에서 따온 거란다.
지극한 정성으로 손님을 대하면 하늘도 알아줄 거라나?
결국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다는 거다.
“맞기는 맞는 것 같은데, 그전에 내가 먼저 손님들을 편하게 대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제일 걱정이었다.
강형우가 말하길 어느 정도는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단다. 이제 영업적인 말로만 끝내는 게 아니라 인간적인 이야기까지 나눌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거다.
그 말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생각해 보니 지금껏 형우한테 많이 의지하기만 했다.
그간의 트레이닝 과정(?)도 전부 자신을 위해서 했던 것이고, 결과로만 봤을 때 큰 성과를 거두었다.
최소한 손님들을 보고 두려움에 떨지 않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강형우가 그랬다.
언제까지 수동적으로만 손님들을 대할 것이냐? 손님들도 눈치가 있으니 결국은 형의 본심이 드러날 거다.
무엇보다, 여기까지가 자신이 도울 수 있는 한계라고 했다.
그래서, 미안해서, 고마워서 반드시 극복하고 싶었다.
“그래, 해보자!”
강신원은 단단히 마음을 먹고 방을 나섰다.
그 모습에 강신애는 마시던 물을 그대로 흘리고 말았다. 앞치마 밑으로 털이 숭숭한 맨다리가 보였던 것이다.
아무래도 너무 긴장한 모양이었다.
“형, 왜 그래요?”
“어? 왜?”
“아니, 식은땀을 흘리고 있길래. 무슨 일 있었어요?”
강형우가 진지하게 묻는데, 강신원은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아니, 그게…….”
아침에 있었던 소소한 에피소드였다.
조리복이 마음에 들어서 걸쳐봤다. 여기에 TV에 나오는 셰프들처럼 멋지게 앞치마까지 두르고 거울 앞에 서서 마음을 잡았는데, 바지를 깜빡하고 그대로 나왔다는 것이다.
“헐.”
“그게 너무 긴장한 모양이야.”
강신원이 쑥스럽게 말하는데, 강형우는 한숨이 나왔다.
이 형, 보기보다 덜렁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바지를 안 입고 나오다니.
만약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큰일 날 뻔했다.
“형, 어차피 옆에 저하고 은주 있잖아요. 뭘 걱정하고 그래요?”
“아, 맞다. 너 인마, 감히 형수님한테. 언제까지 은주라고 부를 거야?”
“에이. 제가 그랬잖아요. 혼인신고 도장 찍고, 식장 입장해서, 신혼여행 갔다 오면 해주겠다고요.”
“야. 이제 결혼식이 코앞인데…….”
“남녀 사이 모르는 겁니다. 식장 앞에서 도망가는 신랑도 있고, 신혼여행이 이혼여행이 되는 시대라는데 무슨~”
그 장난스러운 너스레에 강신원이 피식 웃고 말았다.
덕분에 긴장이 많이 풀어진 모양이었다.
“하이고, 알았다. 알았어.”
“그럼 준비할게요.”
강형우는 그렇게 말한 뒤 미리 재료를 확인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이 이런저런 준비를 하고 있는데 공지혜한테 전화가 왔다.
가게 입구로 나와달란다.
강형우가 나가 보니, 세상에나 아직 시간이 20분이나 남아 있었는데 벌써 아주머니들이 다 모여 계셨다.
“벌써 오셨어요?”
“안달 나서 기다릴 수가 있어야죠. 오늘 단단히 준비하고 왔어요.”
미희 어머니의 말에 다른 아주머니들도 맞장구를 쳤다.
대체 그 1008호 아줌마가 얼마나 진상을 부렸기에 이러는지 모르겠네.
강형우는 일단 아주머니들을 주방쪽으로 안내했다.
그러다 의외의 불청객(?)을 볼 수 있었다.
바로 박미희였다.
“아니, 너?”
“헤헤~ 사장님, 이런 자리에 지성분식의 열혈 팬인 제가 빠질 수 없죠.”
그러면서 카메라를 드는데, 순간 소름이 돋았다.
이거 아무래도 영업 비밀을 털려는 스파이 분위기인데?
“근데 너 고3이잖아. 다음 달이 수능인데… 이럴 시간 있어?”
“전, 이미 수시 합격!”
“헐.”
“사장님이 몰라서 그런데, 이것도 일종의 현장 학습이라고요.”
그러면서 말하는데, 내신이 좋고, 평소 수행평가도 높은 데다가, 블로그 미디어를 운영하는 게 가산점이 돼서 합격했다는 것이다.
무슨 디지털 미디어학과라는데, 처음 듣는 거였다.
잠시 고민했지만, 나쁘지는 않다 싶었다. 실습에 참여할 자리가 부족한 것일 뿐 그 외의 공간은 널널했으니까.
“하아, 별수 있나. 대신 나중에 사진 찍은 거 다 보여줘야 한다?”
“왜요?”
“우리 가게 음식에는 마약이 들어가거든. 잘못하면 너 잡혀가.”
초등학생만 되도 안 믿을 내용이었지만, 미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 마약 김밥 같은 거 만드는 거예요?”
오히려 당황한 건 강형우였다. 오늘 메뉴 중에 하나가 그거였던 것이다.
***
오늘의 메인 강사, 강신원.
조리 보조, 강형우. 이은주.
잡일 담당, 공지혜.
일단 그렇게 잡고 일일 요리 교실이 시작되었다.
사실, 뭐 그렇게 특별한 건 없었다. 평소 가게에서 준비하는 걸 설명하면 그만일 뿐이었으니까.
강형우가 슬쩍 밀자, 강신원이 앞으로 나섰다.
“예. 일단,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지성분식 2호점의 점장을 맡고 있는 강신원이라고 합니다.”
“오, 점장님 잘생겼어요.”
박미희가 손뼉을 치자, 아주머니들도 웃으면서 환호를 했다.
순간 이은주의 표정이 굳었지만 그걸 본 건 강형우 혼자였다.
이거 아무래도 긴장해야겠는데?
“하하, 감사합니다. 사실, 다들 아시다시피 얼마 전에 이 자리에서 카페를 했습니다. 능력이 부족해서 말아먹었지만요.”
자칫 심각할 수 있는 이야기였지만 강신원이 웃으며 말하자 다들 편하게 넘어갔다.
“일단 오늘 배우실 게 김밥인데, 전체적으로 보면 특별할 건 없습니다. 단지 저희 가게는 좀 더 정성을 기울이는 것에 불과하죠.”
강신원은 그렇게 말한 뒤, 뒤쪽은 큰 기계를 가리켰다.
동시에 강형우와 이은주가 그쪽으로 향했다.
“김밥에서 제일 중요한 건 밥이라고 생각합니다. 밥만 맛있으면 기본 이상은 한다고 보거든요. 여기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게 바로 쌀 도정기입니다.”
이은주가 뚜껑을 열자 강형우는 재빨리 쌀자루를 들고 와서 그 위에 넣었다.
그 직후 이은주가 버튼을 누르니 우우웅, 우웅 하고 기계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강신원이 말했다.
“원래 쌀은 껍질을 벗기면 산패가 시작되거든요. 보통 반나절이면 영양 세포가 뭉그러지고요. 이 상태로 이 주가 지나면 수분과 영양소가 줄어들면서 산성화 현상이 일어납니다.”
“말이 좀 어려운데요?”
박미희가 손을 들자 아주머니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본 강형우는 피식 웃었다.
확실히 신원이 형한테 가르친 건 자신이었다. 또 오늘의 대본을 줬고, 그걸 달달 외우라고 시켰다.
물론 풀어서 이해시키는 건 강신원의 몫이었다.
“하하. 쉽게 이야기하면요. 이렇게 껍질을 벗기면 공기에 노출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영양소가 빠져나간다 정도로만 보시면 됩니다.”
그때 박미희가 수첩을 꺼내서 적기 시작했다.
이후 강신원은 천천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도정해서 오래 둔 쌀은 탄수화물 덩어리가 된다. 원래 쌀이 가지고 있는 영양분이 빠진다는 것이다.
때문에 지성분식에서는 쌀을 오래 비축하지 않았다.
“저희도 몇 번 쌀을 바꿨습니다. 농협 쌀도 써봤고, 철원 오대미도 받아봤고, 유명한 이천 쌀도 시험해 봤습니다.”
“그럼 지금은요?”
“가까운 김해에서 쌀을 주문해서 씁니다. 열흘에서 보름에 한 번, 차로 가져오거든요.”
원래는 인터넷 주문을 했는데, 물량이 많다 보니 직접 차로 배달이 오더라.
덕분에 가격은 조금 올랐지만 이전보다 편하게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바로 도정한 쌀은, 쌀알 자체가 탄탄하고 수분이 많아서 오래 불리지 않아도 됩니다.”
강신원이 말하자, 강형우는 곧바로 도정기에서 나온 쌀을 싱크대로 옮겼다. 그런 뒤, 아주머니들이 보기 쉽게 천천히 씻기 시작했다.
“쌀을 좀 불려야 하니까, 시원한 커피 한 잔씩 하세요.”
그때 공지혜가 미리 준비한 아이스 커피를 가져왔다.
그렇게 잠시 휴식하는 사이, 아주머니들이 말문이 터졌다.
“진짜 옛날 시골 가면 다 저렇게 했거든. 정미소에서 쌀 받아서 가마솥에 앉히면, 밥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더라고.”
“맞아. 아파트 살면서 그냥 배달해서 먹지 도정하는 건 처음 보네.”
그때 폰을 만지작거리던 박미희가 갑자기 손뼉을 쳤다.
“엄마, 엄마. 찾았어요.”
“뭔데 그래?”
“저 기계, 이백오십만 원 짜리에요. 엄청 비싸다.”
그 순간 아주머니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너는, 뭘 그런 걸 찾아보고 그래?”
“엄마는~ 신기하잖아요. 저 태어나서 저런 거 처음 본단 말이에요. 학교에서도 이런 거 안 가르쳐 줘요.”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기는 했다.
요즘 애들이 직접 쌀 도정하는 걸 볼 기회가 있기나 하겠는가?
다들 수긍하는 가운데, 미희 등짝에 불이 났다.
어머니 손맛이 작렬한 것이다.
“그런 거보다, 왜 도정한 쌀이 좋은지를 찾아봐야지. 기계값 알아서 뭐 하려고?”
“에이, 싸면 하나 사려고 했죠. 요즘 블로그 광고 붙어서 수입 좀 나온단 말이에요.”
오호, 저런 생각도 할 줄 안다니.
나름 기특하다는 생각에 강형우가 끼어들었다.
“요즘 가정용으로 저렴한 거 많이 있습니다. 보통 20만 원 선에서 시작해서 60만 원까지 있는데, 식구 수나 한 번에 사용하는 양에 따라서 구하시면 됩니다.”
강형우는 몇 가지 설명을 덧붙였다.
작년하고 재작년 사이에 쌀 자판기가 잠깐 히트를 쳤다. 동전을 넣으면 바로 쌀이 도정되서 나오는 기계들이 각종 대형 마트에 팔렸다는 것이다.
“그걸 계기로 일반 소비자들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거든요. 이후 몇몇 브랜드들이 가정용 제품을 내놔서 가격이 적당하게 나왔습니다.”
“어머, 그래요?”
“예. 저희야 워낙 나가는 게 많아서 업소용으로 좋은 걸 가져다놔 비싼 거지만, 집에서는 저렴한 거 쓰셔도 충분합니다.”
그 짧은 설명을 하는 동안, 강형우는 몇몇 아주머니들 눈빛이 바뀐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하긴, 아파트 사니까 그럴수 있다 싶었다.
그때 공지혜가 말했다.
“오빠, 쌀 적당히 불은 것 같은데요?”
“그래.”
강형우는 환하게 웃은 뒤, 강신원을 쳐다봤다.
다음 진도를 나가라는 의미였다.
강신원은 소매를 걷으며 아주머니들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그럼, 우리 밥 좀 지어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