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130화 고백할 게 있어요
한 달에 두 번 있는 회식이었다.
다들 간만에 입 호강을 시키겠다는 듯 전투 의지가 장난이 아니었다. 심지어 저녁을 위해 브래이크 타임에 하는 식사조차 위를 달래는 정도로만 했다는 것이다.
하필 소갈비 사는 날 이렇게 의지를 불태우다니.
아무래도 우리 지성분식 식구들은 내 통장을 텅장으로 만드는 게 즐거운 모양이었다.
회식은 예정대로 1차 소갈빗집이었다.
그 때문일까?
강제 참석도 아닌데, 전부 다 왔다. 게다가 이은주가 흥분했는지 1인 3인분은 기본이란다.
다행히 2.7인분에서 그쳤지만 인원수가 많다 보니 엄청나게 나왔다. 만약 식사를 조금만 늦게 시켰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던 것이다.
그렇게 1차를 끝내고, 순이 이모한테는 몰래 소갈비 3인분을 따로 들려 주었다.
어차피 2차는 못 가니까 미안해서였다.
2차는 늘 가던 대로 노래주점이었다. 한창 소리 지르고 뛰어놀고 꼬장을 부릴 나이라 그렇게 정해진 것이다.
다행히 술을 주문하면 두 시간은 무료였다.
강형우는 슬며시 눈치를 보면서 제일 구석 자리로 향했다. 괜히 눈에 띄었다가 날벼락을 맞으면 곤란했으니까.
“자! 첫 곡은 우리 자알생기신 싸장님께서 부르시겠습니다.”
제길, 홍성구 녀석.
이런 날은 아부 좀 안 해도 좋으련만.
특히 잘생겼다는 말에 약간 짜증이 났다.
아까 소갈비 집에서 여자들끼리 장난삼아 남자 외모 순위 투표를 했다.
1위가 신원이 형이었고, 2위가 이강석이었다.
3위는 홍성구, 4위가 나였고, 박호성과 이영제는 공동 꼴찌였다.
홍성구의 멘트는 그걸 되살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참고로 내가 얻은 두 표는 순이 이모와 공지혜였다.
나쁜 것들 같으니라고, 월급 주는 사람이 난데 한 표 정도는 더 쓰지.
그런 울분을 담아 노래를 불렀더니 공지혜가 1절만 하자고 하더라.
어쨌든 오늘은 직원들 스트레스를 풀어주기 위한 날이었다. 그러니 좀 구박받고, 갈굼당하고, 무시당해도 괜찮았다.
다들 악의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즐거운 술자리가 이어지는데, 이강석이 조용히 불렀다.
“형, 잠깐 나가요.”
수신호를 보니 담배였다.
강형우는 잠깐 눈치를 보다가 이강석과 함께 방을 빠져나갔다.
“휴우, 괜찮냐? 많이 마셨어?”
“조금요.”
이강석이 대답을 하는데, 보니까 살짝 눈이 풀려 있었다.
최근에 와서 느낀 건데 컨디션이 안 좋으면 빨리 취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입대가 코앞이니 제대로 술이 넘어가질 않겠지.
“형, 사실 고백할 게 있는데요.”
“뭔데?”
강형우가 담배를 물면서 묻자, 이강석이 불을 붙였다.
“이제 가는 마당이니까 다 말하려고요.”
“나 좋아한다는 말은 사절! 남자는 별로야.”
“저도 형 싫어해요!”
한심스러운 농담도 이강석은 잘 받아주었다.
곧 두 사람은 피식 웃으면서 연기를 내뿜었다.
“저 본점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한 거 있잖아요.”
“어.”
“그거, 협박받아서 그런 거예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전혀 예상치 못한 단어 때문이었다.
“협박?”
“예. 은주 누나가 2호점으로 가고 싶다고 해서…….”
들어보니 황당했다.
이은주가 따로 요리를 가르쳐 주는 대가로 나중에 소원 하나 들어주기로 했었다. 그래서 서로 일하는 곳을 바꾸기로 했다는 것이다.
살짝 배신감이 들었다.
“그런 거라면 미리 말을 했어야지? 근데 왜 그랬는데?”
“은주 누나가 신원이 형이 마음에 든대요. 그러면서 요리 가르 쳐줄 때마다 중식도를 휘두르는데, 솔직히 오래 살고 싶어서 그랬어요.”
정말 많이 무서웠던 모양이었다. 그때를 떠올렸는지 몸을 부들부들 떨었던 것이다.
“헐, 그래도 그렇지. 내가 사장인데…….”
“저 군대 가는 것도 사실이잖아요. 형도 거의 2호점에만 매달려 있고, 실제로 우리 가게에서 제일 실력 좋은 건 은주 누나인 것도 맞죠.”
확실히 이은주는 인정할 만했다.
실제로 걔가 오고 나서 편해진 것도 맞았고, 신원이 형이나 영제, 히토미도 솜씨가 많이 늘었으니까.
따지면 강석이의 판단이 합리적이긴 했다.
“고민했는데, 그게 맞는 것 같더라고요. 은주 누나도 좋고, 형도 좋고, 신원이 형은 좀 미안하고.”
“어?”
“그게 은주 누나가 열심히 작업 걸고 있는데, 잘 안 넘어온대요. 게다가 누나 콤플렉스 있잖아요.”
“어? 은주가 그런 게 있어?”
“키요, 키. 말로는 백오십 넘는다는데, 알고 보니 깔창이었음. 큭큭큭.”
“야, 그런 걸로 놀리면 안 돼. 사람 외모가 다가 아니라고.”
“아니, 놀리는 게 아니고요. 그래서 2세 생각하면 무조건 키 큰 남자 만나야 된대요. 신원이 형 찍은 게 그래서고요.”
그러면서 피식 웃는데,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 고백은, 두 사람 좀 잘 챙겨주라는 뜻이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은주와 정이 많이 든 게 분명했다.
그러고보니 요즘 신원이 형이 한 번씩 많이 당황해하는 것 같았다.
가끔은 이유 없이 얼굴이 뻘게지기도 했었고.
짐작 가는 건 또 있었다.
장사 오픈 전에 내온 식사가 뜬금없이 짬뽕밥이었다. 지성분식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메뉴였던 것이다.
그게 그래서였나?
“그리고 형.”
“또 있냐?”
“이제 지혜 누나랑 사귀는 거 이제 이야기해도 돼요.”
“쿨록, 컥… 케헥. 크어억.”
갑자기 기침이 미친 듯이 나오는데, 이강석도 거기에 맞춰서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
“어, 어, 언제부터…….”
“지혜 누나가 형 좋아하는 거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형만 눈치가 없었던 거지.”
그러면서 말하는데, 순간 소름이 돋았다.
전에 술 먹고 내 방에서 다 같이 잤을 때, 그러니까 잠결에 공지혜 끌어안았을 때 다들 깨어있었단다. 실수로 손이 가슴에 닿았던 것도 전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 정은혜가 뒤꿈치로 내 머리통을 찍어버린 게 그래서였다나?
“헐.”
“급하게 자는 척하는 바람에 자세가 엉망이었거든요. 형 진짜 그거 눈치 못 챘다니…….”
충격받은 건 난데, 오히려 이강석이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그래서…….”
“요즘, 지혜 누나가 티를 안 내더라고요. 그래서 잘됐다 싶었던 거죠.”
이야기를 들으니 지혜한테 더 미안해졌다.
하지만 궁금한 게 더 있었다.
“강석아…….”
***
광란의 회식이 끝나고 휴일이 찾아왔다.
강형우는, 통장에서 돈을 뽑아 이강석을 불렀다.
“그동안 수고했다. 이거 어머님하고 맛있는 거 먹고… 월급에 보너스 좀 넣었다.”
입대하는 날이 화요일이라 시간을 내기가 어중간했다.
또, 오늘도 가서 작업 확인을 해야 했고, 내일은 새벽 출근이었다.
정말 하루라도 제대로 쉬었으면 좋으련만.
“형, 진짜 넉넉히 넣은 거 맞아요? 왜 이렇게 얇아요?”
이강석이 장난치듯이 말하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억지로 밝게 웃는 게 너무 티가 났던 것이다.
하긴, 어머니 혼자 놔두고 곧 군대 가야 하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겠지.
“니가 큰 돈을 만져봤어야 알지. 그거 빳빳한 신권 오만 원 짜리야.”
“오오~ 그래요?”
이강석은 바로 봉투를 열어보려고 했다.
“됐고. 오늘 계획은 뭐냐?”
“별건 없어요. 진하에 아버지 산소 갔다가 인사하고, 기장 들려서 꽃게나 먹고 오려고요. 그리고, 내일은 대충 짐 정리하고 푹 쉬어야죠.”
원래라면 더 일찍 쉬게 해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면 잡생각이 많아져서 안 좋다면서 본인이 어제까지 근무하기를 고집했었다.
인정둥이도 이런 건 좀 본받으면 좋으련만, 어찌 도망갈 생각만 하는 건지.
“그리고, 너 퇴직금 있거든.”
“예?”
“그거 어머니한테 맡길 테니까 그렇게 알고.”
강형우는 정말 고민 많이 했었다.
사실 이강석은 공지혜와 순이 이모를 제외하고 가장 오래 일했다. 게다가 군대 때문에 그만두는 거지 아니었으면 계속 데리고 있을 녀석이기도 했다.
그게 아쉬워서 뭐라도 해주고 싶었다.
“근데, 형! 알바도 퇴직금이 나와요?”
“어. 많지는 않지만, 조금.”
알아보니 일 년 이상 일했을 때, 대략 한 달치 이상을 주면 된단다.
이게 올해 초에 결정된 건데 작년까지는 통상 임금의 50%를, 올해부터는 100%를 지급하게 되어 있었다.
“하여간 군대에서 돈 필요하면 어머니한테 그거 보내달라고 그래. 너무 흥청망청 쓰지는 말고.”
“알았어요.”
이강석이 대수롭지 않게 웃는 걸 보니 얼마 안 된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하긴, 주변에 알바 하는 친구들 중에 퇴직금 받는 애가 있을 리가 없으니 그런 반응도 당연하다 싶었다.
사실, 방금 준 봉투에는 월급+보너스가 들어 있었다.
200만 원을 넣었는데, 퇴직금도 넉넉하게 같이 잡았다.
하지만 군대 갈 애라 한꺼번에 주기에는 너무 큰 돈이다 싶어서 김복희 여사님에게 맡기겠다고 한 것이다.
“뭐, 난 확실히 줬으니까 나중에 딴소리하지 말고, 그 돈 가지고 어머니 잘 모시고 다녀와라.”
“알았다니까요.”
이강석이 투덜대는 걸 보니, 자꾸 잔소리만 하는 것 같았다.
강형우는 피식 웃은 뒤, 이강석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파이팅!”
***
쉬는 날이 쉬는 날이 아니었다.
강형우는 오전에 볼일 좀 보고, 오후 늦게 지성분식 2호점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신원이 형이 있었다.
그리고 예상 밖의 두 사람이 더 있었는데, 이은주와 강신애였다.
뭐지? 이 묘한 상황은?
“형?”
“어, 형우 왔어?”
“예. 좀 늦었어요. 그런데…….”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에는 조금 애매했다. 상황을 알아야 뭐라도 말할 것 아니겠는가?
사실 강신애가 쉬는 날 한 번씩 가게 오는 건 알고 있었다.
신원이 형이 하는 일도 돕고, 겸사겸사 맛있는 걸 얻어먹기도 했으니까.
나중에 들어보니 강학희도 두어 번 왔다 갔단다.
이걸 오해하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었지만, 강형우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애초에 가게 관리를 신원이 형한테 맡긴 사람이 자신이었으니까.
실제로도 제일 적합한 사람이 강신원이었다.
집도 바로 위라 수시로 왔다 갔다 할 수 있었고, 지성분식 주방에서 음식 공부하는 게 훨씬 편하다고 했으니까.
“은주 너는 왜…….”
“아, 그게요.”
이은주가 잠시 머뭇거리는데, 강신원이 선수를 쳤다.
“궁금한 게 있어서 물어보려고 불렀어요.”
“그래요?”
“아, 형우야. 마침 잘됐다. 방금 만들어본 게 있는데, 갑자기 날이 더워가지고 간단하게, 했거든.”
강신원이 그렇게 말하면서 그릇을 하나 더 가져왔다.
하지만 그 속에 있는 허둥거림이 너무 뻔하게 보였다. 평소와는 다르게 말도 꼬였고 행동도 어설폈던 것이다.
그걸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방금 만든 건데, 다 같이 먹으려고… 근데, 형우 너 타이밍 참 좋다.”
항상 오는 시간보다 조금 늦었는데 딱 좋다니…….
조금 어이가 없기는 했지만, 분위기상 모르는 척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하하하, 하하. 예. 먹어보죠.”
“잠시만.”
강신원은 채반에서 면을 가져와 각 그릇에 담았다.
그런 뒤 순서대로 고명을 올리더니 바로 육수를 부어버렸다.
메뉴는 지성분식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았다. 황당하게도 투명한 냉짬뽕에 가까웠던 것이다.
“형, 이건?”
“아, 그게 요즘 아버지가 입맛이 없다고 해서 괜찮은 음식 있는가 은주한테 물어본 거야.”
“맞아요. 오빠! 사실 이거 우리 집안에서만 먹는 음식이거든요. 여름 별미예요. 별미!”
이은주까지 나서서 변명을 해주는데, 두 사람이 당황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결정적인 건, 강신애였다. 강형우가 혼란스러워하는데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언니가 그렇다잖아.”
“어?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