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129화 필요한 거
“좋네, 좋아.”
요즘 최민지가 부쩍 가게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손님들 대하는 것도 괜찮았고, 의외로 아주머니 손님들과 호흡이 잘 맞았다.
특히 미희 어머니네와 친했는데 전부터 알고 있는 사이였단다. 게다가 간간이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했고, 임기응변도 뛰어났다.
진상 손님들을 대하는 노하우가 늘어나고 있었던 거다.
또, 맏언니 노력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실제로 주방에선 이은주가 왕이었지만, 홀에서는 최민지가 최고였다. 생활력 강한 아줌마답게 꼼꼼하게 동생들을 잘 챙기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몰랐는데, 얼마 전 선경이한테는 혼자 자취한다며 반찬까지 챙겨줬다고 들었다.
물론 최민지가 나름 활발히 하는 건, 공지혜가 적절하게 양보해서였다.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김밥 싸는 걸 맡기지 않겠느냐고 했던 것이다.
공지혜를 믿기에 그렇게 하라고 했다.
이후 최민지는 더욱 열심히 일했고, 특히 요즘은 사건 사고가 없어 마음이 놓였다.
“그러고 보니 뽑을 때가 생각이 나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때 솔직히 고민 많이 했다.
본인이 먼저 당당하게 그랬다. 아들 하나 있는데 여섯 살이라고.
남편은 없고, 어머니하고 셋이서 산단다. 그래서 일을 빨리 하고 싶은데 바로 할 수 있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조금 난감하기는 했다.
비슷한 시기에 몇 명이 더 면접 보러 왔고, 이틀 안에 연락을 준다고 했었으니까.
그때 정덕수 형이 생각이 났다. 다리 불편한 형을 고용했다는 게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서 물었다. 꾸준히 잘 나올 수 있느냐고.
최민지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시켜만 주시면 가게 없어질 때까지 일할게요.”
환하게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게 너무도 당당했다. 그래서 뽑았는데, 종종 성질을 이기지 못해 문제를 만들었다.
물론 이제는 많이 괜찮아졌지만.
강형우는 슬며시 고개를 들어 바깥을 살폈다.
“손님들이 많아서, 예약 먼저 받을게요.”
공지혜가 나서자 최민지가 펜을 꺼내 들었다.
“혹시 일행이신가요? 예, 여기 메뉴판 있는데 보시고 주문 부탁드립니다. 예, 잠시만요. 기다려주세요. 예~ 폭립 하나요?”
최민지가 체크를 하자, 뒤쪽에서 아쉬워하는 소리가 들였다.
역시나 예상대로 대부분 폭립을 먹으러 온 모양이었다.
공지혜는 일단 순서대로 예약을 받았다.
하지만 줄의 절반 정도를 지나자 벌써 주문 가능 수량을 넘어버렸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한정으로 20인분만 준비하거든요. 벌써 주문이 끝났습니다.”
뒤쪽에서 약간의 소란이 들렸다.
그때, 최민지가 주문을 확인하고, 앞쪽부터 물었다.
“혹시 합석하실 분 계세요? 대신 음료수 서비스로 드릴게요.”
“예? 합석이요?”
“예. 저희가 폭립을 2인분씩만 주문받는데 갑자기 손님들이 몰릴 줄 몰랐거든요. 이렇게 받으면 다른 손님들이 못 드시잖아요. 대신, 커플끼리 같이 앉으면 서비스 팍팍 드릴게요.”
그 말에 먼저 주문한 사람들끼리 눈치를 살폈다.
그때 세 번째 커플 중 남자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기 이 친구하고 일행이거든요. 저희 같이 앉을게요.”
들어보니 커플, 커플이 온 거였는데, 편하게 먹으려고 자리를 따로 잡기로 했었나 보다.
하지만 서비스에 혹한 모양이었다.
“그러시겠어요? 그럼 주문은 어떻게?”
“폭립 하나 하고, 하와이안 돈가스 하나 불돈가스 하나. 이렇게 주세요.”
“예. 감사합니다. 음료수는 1인당 하나씩 서비스로 드릴게요.”
네 개 하면, 6,000원에서 8,000원 정도였다.
따지면 손해이긴 했지만 이런 임시 방편이 장기적으로는 도움이 되리라.
적어도 가게 입장에서 손님들을 생각한다는 이미지는 심어줄 수 있으니까.
“저희도 같이 먹을게요.”
여섯 번째 여자 손님들이 뒤쪽 여자들과 합의를 본 모양이었다.
이렇게 두 팀이 양보를 한 결과, 네 명이 더 폭립을 먹을 수 있게 됐다.
마지막은 조금 황당한 케이스였다.
최민지가 아주 잘생긴 남자 두 명한테 다가갔다.
“저기 손님요. 남자 두 분 일행 맞으시죠?”
“예. 동생하고 저 둘인데…….”
“그럼요. 저기 저 뒤쪽에 여자 손님들하고 같이 안 드실래요?”
“예?”
남자가 당황해하는데, 동생이란 사람이 뒤를 쳐다봤다.
그 직후, 형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두드렸다.
“하자. 하자. 하자.”
“뭐?”
“하자고, 합석.”
형이 갈등하는데, 최민지가 빨랐다.
“예. 합석 받았습니다. 일단 뒤쪽 손님들한테 한 번 물어보고 좋다고 하면 같이하는 걸로 할게요.”
최민지가 사인을 보내자, 공지혜가 바로 받아서 물어봤다.
다행히 뒤쪽 여자 둘도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그렇게 합석 콜이 떨어지자, 뒤쪽에 남자 둘이 온 일행도 손을 들었다.
“저희도 하면 안 돼요?”
아쉽게도 더 뒤쪽의 여자들이 단호히 거절하더라.
“자, 서두릅시다.”
주문이 들어오자 강형우는 곧바로 포스기에 입력을 했다.
그걸로도 모자라 주방으로 향했고, 강신원과 함께 폭립의 진공 포장을 벗기고 소스를 바르기 시작했다.
그사이 이은주는 주문을 확인하고 이영제와 히토미를 불렀다.
“일단 하와이안 돈가스 넷, 불 돈가스 둘. 이영제는 파인애플하고 폭립 토핑 확인. 히토미는 바로 접시 플레이팅.”
지시가 떨어지자 둘은 착착 움직였다.
동시에 이은주도 돈가스를 튀기기 시작했다.
홀도 마찬가지였다.
공지혜가 손짓하자 최민지가 바로 김밥 써는 곳으로 향했다.
은선경도 그 신호에 맞춰서 각 자리마다 차가운 물과 컵을 가져다 놓았고 인원수에 맞게 수저와 나이프를 놓았다.
폭립이 오븐에 들어간 사이, 강형우가 바깥으로 나왔다.
이미 홀은 손님 맞을 준비가 끝나 있었다.
마침 공지혜가 메모장을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1번 손님 이쪽으로 오세요. 예. 저쪽 안쪽 테이블에 앉으시면 됩니다.”
그 손님들을 시작으로 착착 가게가 채워졌다.
강형우는 그걸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오늘이 오픈 석 달째였다.
몇 번의 시행착오는 있었지만, 이제 모든 게 딱딱 맞아 들어가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계속되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세상 일이 참, 뜻대로 안 되더라.
***
“이모, 괜찮겠어요?”
강형우가 조심스럽게 묻는데, 순이 이모는 오히려 등을 팡팡 두드렸다.
“괜찮은 게 어디 있어? 사장이 하자면 해야지.”
“바쁠까 봐. 그러죠.”
“하이구. 고마워라. 난 매상 떨어진 거 잔소리하면 어쩔까 했는데, 오히려 일 늘어나면 나는 좋지.”
순이 이모가 웃으면서 말하는데, 괜히 미안했다.
어제 갑자기 손님들이 몰린 터라 이대로는 곤란하다 싶었다.
하지만 지성분식 2호점이 소화할 수 있는 물량은 하루에 고작 30인분이 한계였다.
결국 본점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왕창 맡길 수는 없는 노릇.
해서 일단 10인분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다. 그 전에 충분히 여유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게 순서였고.
현재 지성분식 본점은 순이 이모가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메인 주방장은 홍성구였고, 정은혜가 보조였다.
옵션으로 이강석이 있었는데 아쉽게도 오늘이 마지막 날이었다.
사흘 뒤, 군입대를 해야 했으니까.
서빙은 임정은과 박호성이었다.
좀 더 경력이 있는 임정은이 김밥과 카운터였고, 박호성은 서빙과 잡일 담당이었다.
나이는 스물다섯 동갑내기였다.
임정은은 다른 식당에서 일하다가 온 거였고, 박호성은 홍성구 후배였다. 편하게 부려먹을 인재(?)를 물색하다가 레이더에 걸리고 만 것이다.
사실 본점은 크게 걱정할 일이 드물었다.
이미 손발을 2년이나 맞춘 순이 이모가 전체를 컨트롤하고 있었고, 홍성구의 경우 내 말이라면 껌뻑 죽는 시늉까지 했던 것이다.
“사실, 매상이 많이 줄고는 있거든.”
돈가스 맛집, 그리고 저렴한 가격에 파스타를 파는 곳.
김밥이 입에 잘 맞고, 해장 잘되는 라면집.
깔끔한 덮밥을 팔고, 사골 만둣국도 수준 이상.
강형우가 인터넷을 뒤져보니 현재 지성분식 본점은 이런 평가를 받고 있었다.
매상의 절반이 돈가스였지만, 대체적으로 다른 음식도 반응이 좋았다. 뭘, 시켜도 평균 이상의 맛을 낸다는 것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2호점이 생기면서 손님 일부가 빠졌다. 파스타를 몰아주어 어느 정도 매상이 회복되기는 했지만 하락세인 것도 사실이었다.
“이모, 걱정하지 말아요. 계절 타는 거 어쩔 수 없잖아요. 그리고 아낀다고 너무 그러지 말고. 에어컨도 빵빵 틀고 서비스도 팍팍 주고 그래요.”
순이 이모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치 어디서 감시하다 온 게 아니냐는, 그런 느낌이었다.
“이모 성격에 뻔하죠. 하여간, 뭐 더 필요한 거 없어요?”
“필요한 거?”
“예. 수리 하거나, 뭘 좀 사거나 하는 거.”
사실 아침에 들려서 돌아보지만, 모든 걸 꼼꼼히 확인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런 부분은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 제일 잘 아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 여름 메뉴 만들면 안 될까?”
“예?”
“그러니까 냉면이나 밀면 같은 거 있잖아. 냉국수나 비빔국수 같은 게 여름에 잘 나가거든.”
바쁘다 보니 미처 고민하지 못한 거였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순이 이모의 입에서 정말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다.
팥빙수 기계를 들여놓자. 아니면, 냉채 같은 걸 해보면 안 되겠느냐?
요즘 쫄면도 돈가스랑 괜찮다던데…….
빠짐없이 메모했지만, 딱히 이거다 하는 건 없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필요하다는 건 깨달았다.
“일단 제가 생각해 볼게요. 그리고 오늘 저녁 회식 아시죠?”
“알지. 근데 소갈비 먹을 거야? 많이 나올 텐데?”
“왜요? 다른 거 드시고 싶으신 거 있으세요? 이모가 말만 하면 제가 직접 소도 잡아 올 건데, 진짜요.”
“하이구, 고마워라. 됐고, 마치면 갈 테니까 그렇게 알아.”
“예. 나중에 전화 주세요.”
강형우는 서둘러 지성분식을 나온 뒤, 정재일과 이지애가 운영하는 부부정육점으로 향했다.
“친구야, 나 왔다.”
그 순간, 진짜 칼이 날아오는 줄 알았다. 정재일이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야, 왜?”
“화환.”
“아! 그거. 하하, 하하하. 그러지 말고.”
고기 정형하는 데 쓰는 날카로운 칼이 진짜 코앞에 있었다.
아무래도 적절한 해명 없이는 내가 뼈와 살이 분리가 될 것 같았다.
“그래도, 친구들 중에 화환 보낸 사람은 나밖에 없었잖아. 축의금도 20만 원이나 했는데…….”
“그래서 그런 거 써서 보낸 거냐?”
“아니, 내가 아니고. 태구가 쓴 거다. 진짜 오해하지 말라고.”
이렇게 쩔쩔매는 건 이유가 있었다.
<속도위반 계획 성공, 진심으로 축하한다.>
이게 내 이름으로 보낸 화환에 적혀 있던 거였다.
당연하게도 문구는 홍태구가 결정했고, 결혼식 날 확인했던 것이다.
이날 정재일은 무수히 많은 친지 어르신들에게 저 질문이 사실이냐고 들어야 했었다.
“태구가 니가 정한 문구라던데?”
“그, 그럴 리가 있냐? 나 그런 센스 없잖아. 그리고 나 정말 몰랐어?”
순간 납득했는지 정재일이 고개를 끄덕인 뒤 칼을 치웠다.
“그럼 용건을 말해라.”
“그게… 물량을 좀 늘려보려는데.”
최종적으로는 폭립을 50인분까지 판매할 생각이었다.
본점에서 20인분 정도를 추가로 만들어주면 충분히 가능했으니까.
강형우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정재일의 표정이 조금씩 풀어졌다.
역시나 장가가니 먹고살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정재일이 처음으로 배웅까지 해줬던 것이다.
나중에는 정말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이 말까지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