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25화 이야기나 들어봅시다
“괜찮다니까 그러네?”
조성기는 대인배라도 되는 양 피식 웃었다.
강형우는 당당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리 친구 사이라도 지킬 건 지켜야지.”
“야. 우리 사이에 니 돈 내 돈이 어디 있냐? 오히려 고마운 건 나지.”
조성기는 그렇게 말하며 2,000만 원이 적힌 수표를 내밀었다.
하지만 강형우는 완고했다.
“내가 동업 제안한 건, 돈 때문이 아니다!”
“알아! 안다고. 그리고 뭐, 내 돈도 아니고 아버지 돈인데… 차라리 잘됐지. 적어도 당분간은 잔소리 안 들을 거 아냐?”
군대 전역하고도, 조성기는 취직을 못 했다.
대기업은 이력서조차 받아주지 않았다.
고졸에 특기 없음. 자격증은 운전면허 하나.
그러니 꿈도 꿀 수 없었다.
조금 작은 회사는 의가사 제대를 걸고넘어졌다. 정신 병력으로 나왔으니 고용하기를 꺼려한 것이다.
아주 작은 회사는 조성기가 싫어했다.
공돌이는 폼이 안 난다.
이런 곳에서는 내 꿈을 키울 수 없다.
모시러 와도 할까 말까 한데, 뭐 하러 후진 회사를 내 발로 가냐?
그런 개소리를 하고 다니면서 취직은 뒷전이었다. 그러다 보니 거의 3년을 PC방에서 살다시피 했다.
속 터지는 건 조원무와 가족들이었다.
그러다 강형우가 가게를 차린다는 말에 도움을 청했다.
우리 성기 일 좀 시키면 안 되겠냐고.
식당 일이라도 하다보면 조금은 철들지 않겠냐고 했다.
해서 당초 계획보다 조금 큰 가게를 얻었다.
그 덕에 비용이 더 늘어났음에도 오히려 조원무는 좋아했다. 돈을 투자했으니 더 열심히 하지 않겠냐면서 말이다.
지금 조성기가 내민 수표가 그것 때문이었다.
“반드시 갚을 거야. 그리고 그건 그거고 공증 받자.”
“에이, 됐다니까?”
“아니야. 이러면 불편해서 안 돼!”
결국 강형우가 우겨서 차용증을 쓰고 공증까지 받았다.
비용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후련했다.
돈 때문에 친구랑 동업한다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이후의 일은 이러했다.
조성기는 건성으로 가게 공사하는 걸 몇 번 확인하더니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심지어 조원무도, 동생 조희애도 연락이 안 된다고 했다.
결국 강형우는 혼자 지성분식을 오픈할 수밖에 없었다.
***
“법적으로 문제 될 건 없습니다. 채무자에게 수차례나 전화통화를 했고 문자까지 남겼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고…….”
확인하니, 정말 문자가 두 통이나 와 있었다.
“채권자 입장에서 봤을 때, 지극히 당연한 권리 행사이며 이후 모든 권한은 저희 업체가 가지고 있습니다.”
이해일은 법이 어쩌고, 판례가 어쩌고 하면서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그걸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불행 중 다행인 건, 결론은 간단하다는 거다.
빠른 시일 내에 돈을 갚든 이자 조율을 통해 지급기일을 연장하든 하란다.
이자율은 연 35%.
한 달에 59만 원이었다.
진짜 칼만 안 들었지, 완전 강도 새끼들이었다.
어쨌든 일주일내로 결정하지 않으면 통장 압류를 걸고, 그 전에 실력행사(?)에 들어가겠다고 협박 비스무리한 소리까지 했다.
“하아~ 왜 그랬던 거지?”
갑자기 후회가 밀려들었다.
강형우는 정말 자신이 있었다.
그 자신감 때문에 일 년 안에 2,000만 원을 다 갚겠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조성기는 이건 없는 거라 생각하라면서, 창업대출부터 갚으라고 했다.
은행대출부터 해결한 건 그래서다.
“아니지. 사실 문제 될 건 없어!”
이해일의 방문 뒤, 며칠을 고민했다.
답은 의외로 금방 나왔다.
애초에 강형우는 조성기의 돈을 쓸 생각이 없었다.
그건 고스란히 보증금으로 남아 있었다.
자기가 망하더라도 조성기한테는 그걸 주면 해결될 거라 판단했던 거다.
문제는, 그렇게 하려면 가게를 빼야 한다는 것!
지성분식을 정리하느냐 마느냐?
이미 결론은 나와 있었다.
장사는 계속 한다!
그래서 강형우는 돈을 마련할 방법을 고민했다.
제일 먼저 생각난 건 엄마 박혜숙이었다. 이야기하면 당연히 집 전세금이라도 빼주려 할 거다.
전에 장사 시작할 때 어마마마께서 그런 적 있었다.
어려우면 언제든 말하라고.
장난삼아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더니 잠시 이산가족이 되면 된단다.
무슨 소린가 했더니 자신은 국밥집에서 지내면 되고, 영지는 학교 앞에 자취방 하나 잡아주면 된다.
또, 인정둥이들은 외가로 보내겠다고 했다. 시골이라 사람 손이 많이 필요하니 환영받을 거라고.
강형우는 기겁하고 말았다.
강영지의 살기 어린 눈빛은 애초에 그럴 일을 만들지 말라고 하고 있었다.
인정둥이들도 국밥집보다 더한 일지옥을 상상했는지 절망하는 표정까지 지었다.
여기서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가정불화(?)를 피워낼지도 몰랐다.
그랬기에 자신만만하게 말했었다.
죽어도 집에 손 벌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다음이 지인들 찬스였다.
적나라한 표현이지만 홍태구는 거지였다. 오연희는 카페 장사가 어려웠고, 박정수는 중국에 있어 연락이 잘 안됐으며 최기성은 학자금 대출에 허덕였다.
마지막으로 이지애는… 아직 취직도 못했다.
그렇게 친구들을 하나하나 떠올렸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대부분 사회 초년생이었고, 제대로 자리조차 잡지 못한 상황이었으니까.
물론 그 외의 인맥들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일단 창주 형과 친구들이라면 이 정도 금액은 선뜻 도와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왠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럼 남은 사람은……”
가장 큰 지지자이자 열성적인 팬 1호.
바로 정분석이었다.
문제는 그래서 가능성은 반반이라는 거다.
빌려준다면 무이자에 무기한 일 터!
반대로 아예 안 해줄 수도 있었다. 내가 장사 접는다고 하면 제일 좋아할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다음 사바사바 꼬셔서 자기 회사로 끌고 가려 하겠지.
“어째 사람은 많은데, 좀 그러네.”
이럴 때 주변에 돈 많은 부자 하나 있었으면 좋을 텐데.
이자 필요 없으니 자기 돈처럼 쓰라고, 몇천만 원 툭 내줄 수 있는 그런 사람.
아! 한 명 있구나.
조성기, 이 양아치 자식.
하지만 놈을 찾아갈 생각은 개똥만큼도 없었다.
이젠 친구도 뭐도 아닌 놈이었으니까.
아니, 지금 심정으로는 내 눈앞에 띄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랬다간 정말 살인날지도 몰랐으니까.
그때 공지혜가 뜻밖의 말을 던졌다.
“은행 대출 받으면 되죠.”
“뭐?”
“오빠! 청년창업 대출인가 받았잖아요. 그거 다 갚았다면서요?”
맞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당시 정분석이 아는 분을 소개시켜 줬다. 전직 은행원인데 회계, 법무 관련 일을 하고 있다며 적극적으로 나서 주었던 것이다.
미래의 고객을 위한 서비스라나 뭐라나?
어쨌든 필요한 서류를 준비했고, 몇 번의 은행방문 끝에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그걸 다 갚았으니 신용등급도 올라갔을 터!
“그래, 그쪽으로 알아보자.”
어차피 이번 일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야 했다.
강형우는 곧 바로 은행으로 달려갔다.
***
“그러니까 계약서에 서명을 하든지 돈을 갚든지 하시라고!”
이해일의 세 번째 방문.
이번에는 공손하지 않았다. 아니, 원래의 목적이 이거라는 듯 강압적으로 나왔다.
“야! 돈 없으면 가게라도 팔아!”
“사인만 하면 기다려 준다니까?”
그러면서 계약서를 내미는데, 아무리 봐도 노예 계약 같았다.
서명하면서 첫 이자 납입.
매달 25일 수금원에게 이자를 지급할 것.
날짜 어길 시, 원금에서 이자 10% 추가.
미지급이 한 달 이상일 경우, 원금에서 또 이자 추가.
와! 영화로나 봤지, 실제 이런 게 있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대충 계산을 뽑아 봤다.
이천만 원이 삼천만 원 되는데 반년도 안 걸리네그려.
왜 사채! 사채! 하는지 알겠다.
게다가 이런 분위기라면, 열에 아홉은 바로 서명할 게 분명했다.
올백머리에 금목걸이, 알록달록 꽃무늬 셔츠에 백바지였다.
동네 껌 좀 씹던 애들이 죄다 몰려온 듯한 기분까지 들었던 것이다.
강형우는 몇 번 심호흡을 하자, 금세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다행이 지금의 거지 같은 상황도 별것 아닌 것처럼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역시 장백호의 경험은 멘탈 관리에 효과적이었다.
무엇보다, 대출심사 준비가 차근차근 되고 있는 상황이니 굳이 분란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이게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겁니까?”
“당연합니다.”
“이상하네요. 그럼 확인해 보게 계약서 두고 가세요. 저도 좀 알아볼 테니까.”
강형우의 말에 양아치들이 버럭 했다.
“아니, 이 양반이? 바쁜 사람 몇 번이나 오라 가라 시키는 거야?”
“너 돌았냐? 아주 배 째라 이거지? 왜 칼 안 들어가나 함 보까?”
겁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러면서 의자와 테이블을 걷어찼는데 순간 울컥했다.
그때 한 놈이 뒤통수를 건드렸다. 사람 기분 나쁘게 툭툭 치더니 손가락으로 머리를 밀어 버린 것이다.
“너 머리 나쁘냐? 그냥 하라고! 그럼 서로 편하잖아.”
“그래, 이 새끼야!”
탁!
또다시 뒤통수를 맞자 강형우는 벌떡 일어났다.
“마!”
단 한마디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강형우는 천천히 돌아본 다음, 툭 내뱉었다.
“그냥 가라. 죽기 전에.”
“뭐?”
“이 새끼가 겁을 상실했나.”
양아치들이 다가오자 이해일이 몸을 뺐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은 아닌 가게 입구를 막고 섰던 것이다.
6 대 1의 상황.
하지만 강형우는 전혀 겁나지 않았다. 오히려 걱정스러운 건 저 양아치들이었으니까.
두 놈이 먼저 주먹을 휘둘렀다.
퍽, 퍽.
얼굴을 맞은 강형우가 비틀거렸다.
그때 양옆에서 두 놈이 허벅지를 걷어찼다. 무릎을 꿇리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휘청거릴 뿐, 강형우는 쓰러지지 않았다.
오기가 생겼는지 양아치들이 일제히 달려들려 했다.
그때 강형우가 말했다.
“먼저 시작했으니 쌍방 폭행이지?”
잠시 주춤하던 양아치들은 잠시 눈치를 살폈다.
그게 끝이었다.
강형우의 커다란 몸이 움직였다.
주먹이 날아오면 잡고 짝!
발이 날아와도 막고 짝!
그렇게 거의 동시에 양아치들의 얼굴에서 불이 났다.
싸대기 한 방에 눈이 돌아가고 턱이 돌아가면서 휘청하더니 그대로 다리가 풀려 버린 거다.
다행인 건 영혼까지는 날아가지 않았다는 것!
강형우는 이해일을 노려봤다.
“그리고 너!”
“예? 옙!”
“며칠 있다 전화 하면 차용증하고 서류 다 가지고 와라! 바로 돈 줄 테니까. 알아들었어!”
***
젊은 청년과 중년인이 번갈아 가며 도장을 찍었다. 이로써 인수합의서가 법적으로 효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끝났습니다.”
젊은 청년의 말에 맞은편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시원시원하십니다, 강 실장님.”
“굳이 시간 끌 필요는 없으니까요.”
강 실장이라 불린 남자는 그렇게 말한 뒤, 옆을 쳐다봤다.
곧 비서로 보이는 남자가 테이블의 서류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중년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저희가 몇 번째죠?”
“여섯 번째입니다.”
“어휴! 너무 많이 사들이시는 거 아닙니까? 우리야 영세한 편이지만, 다른 곳은 아닐 텐데요?”
강 실장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시간 끌면 몸값만 더 올라갈 테니, 할 때는 확실하게 해야죠.”
“하긴, 그렇기는 합니다.”
중년인은 불과 몇 분 전까지 ‘무조건 대부’의 사장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최근에 ‘철진 기획’에 대한 소문이 돌았다. 막강한 자본력으로 대부업체 여러 곳을 흡수 중이라는 것이다.
알아보니, 자신이 상대할 수 없는 거물(?)이었다.
모기업이 엄청난 매출을 자랑하는 기업이었고, 자회사 형식으로 이번 일을 주도하고 있었던 거다.
그러던 차에 제안이 들어왔다.
적당한 가격에 회사를 넘기란다.
해서 업계 선배들의 조언을 들었는데,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했다.
이번 일에 투입되는 자본만 무려 200억!
게다가 정부 정책이 소규모 대부업체를 규제하는 상황이라 털 수 있을 때 터는 게 현명하다고 했다.
그래서 두 달간의 조율 끝에 도장을 찍었다.
그때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이야?”
사장이 움직이자 강 실장도 밖으로 나갔다.
껄렁한 옷을 입은 사내들이 얼굴을 숙이고 있었는데 죄다 한쪽이 팅팅 부어 있었다.
당황한 사장이 고함을 내질렀다.
“이 새끼들이 뭐하다 온 거야!”
“저 그게…….”
“야! 이 팀장! 니가 말해 봐.”
잠시 주저하던 이해일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게, 얼마 전에 들어온 채권 있잖습니까? 천이백에 가져온 거요.”
“그래서?”
“사장님이 빨리 마무리하라고 시켜서 갔다가, 약간 시비가 생겼습니다.”
“왜, 패싸움이라도 하다가…….”
사장은 아차 싶었다. 강 실장이 뒤에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야.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아니, 아니다. 일단 애들 데리고 들어 가있어.”
그때 강 실장이 나섰다.
아무래도 호기심이 동한 모양이었다.
“그거 이야기 한번 들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