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46화 (46/164)

< 오십이 층 - [2] >

이 급박한 상황에 제이슨은 멀거니 서있었다.

모지가 재촉했다.

“뭐해? 빨리 가지 않고.”

“아니, 그냥······”

제이슨은 빠른 속도로 멀어져가는 동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토록 영웅적인 모습이라니.

미친 듯이 달려나가는 모습이 실로 초조해 보였다. 그 모습에 제이슨은 의문이 들었다.

‘지금 저토록 애가 탈 상황인가?’

용과 싸울 상황을 모면하고 그 핑계로 써먹은 위기상황. 거기에 대처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저것은 너무 과하지 않나?

제이슨이 생각하기에는 위 층에 있다는 군대가 알아서 잘 대처하려니 싶을 뿐이었다. 뭐 그러지 못한다면 꽤 죽을 테지만 사실 그러든 말든 알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토록 긴장하여 대처할 정도인가? 역시 제이슨은 공감할 수 없었다.

‘저 새끼 연기가 너무······. 가끔 보면 기사 코스프레하는 현대인이 아니라 현대인 코스프레 하는 기사 같단 말이지?’

어쨌건 보는 눈이 있으니 당장 행동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제이슨은 머리를 긁적이면서도 이내 발걸음을 서둘렀다.

유령 군마를 인원수만큼 불러낼 수는 없었다. 그 마법의 탑승물에는 모지만 타기로 하고 나머지는 그저 냅다 달렸다. 세계수 내 승강기를 향해서.

나병환자들이 헉헉거렸지만 지금 배려해줄 상황이 아니었다.

*******

유령 군마와 그 위에 탄 기사는 환영처럼 세계수를 가로질렀다.

달려나가는 도중 아까는 보지 못한 나무코끼리들이 보였다.

홀몸인 코끼리, 가족 단위 코끼리들, 혹은 아예 군락을 형성한 코끼리 떼까지.

나무코끼리는 높다란 곳에 달린 나뭇잎을 먹고 살기에 딱히 먹이 경쟁을 하지 않으며, 천적도 많지 않다는 사실은 들어 알고 있었다. 그 덕에 꽤 번성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 수많은 괴물들을 보며 롤랑은 전차를 생각했다. 저 괴물들에게 당장 보병들이 가진 창칼은 통하지 않는다.

활이든 쇠뇌든 마찬가지다. 그나마 통하는 것은 대포일 것이다.

비카파에게 포병이 있다던데, 지금 위에 있는 군대에도 포병이 있을까?

없을 것 같다. 화기가 썩 발달하지 않은 이 시대라면 야포의 크기는 비정상적으로 육중할 것이다. 그런 물건을 그놈의 부실한 승강기로 끌어올릴 수나 있을까?

‘어쩌면 비카파 또한 자기 포병을 이 위까지 끌고 오지 못할 수도 있다······.’

아예 저 괴물 코끼리 군대와의 일전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리라. 그리 생각했기에 롤랑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계속 말을 달렸다.

운 좋게도 그다지 헤매지 않고 계단에 도달했다. 슬슬 유령 군마가 희미해져갔다. 소환물이 사라질 징조였다.

미련 없이 그 위에서 내린 뒤 롤랑은 죽어라 달렸다.

그리하여 군 야영지에 도달했다.

여러 깃발이 나부끼는 가운데 천막이 여럿 설치되어 있었다. 장기 체류를 가정한 듯 변소까지 설치된 것이 보였다.

‘앞으로 우리도 이런 식으로 세계수 안에서 살아야겠지.’

그 주변에는 병사들이 빵을 씹거나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롤랑은 안심했다.

‘다행히 전투 중이 아니야.’

야영지 사이를 가로질러 가장 화려한 깃발이 나부끼는 거대한 막사를 향했다. 그곳이 아마 사령관 천막일 듯했다.

그 짐작이 맞았는지 천막 앞에는 보초까지 서있었다. 막사 입구를 막아 선 병사가 말을 걸어왔다.

“누구십니까?”

“기사 롤랑. 지휘관을 뵈러 왔다.”

병사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몇 번이나 깜박이더니 이내 겨우 대답했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곧 입실 허가가 나왔다.

롤랑은 그 안으로 들어간 동시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막사 안은 축축한 분위기였다. 지휘관일 터인 자들 대부분이 팔에다 부목을 대고 있었다. 지휘관답지 않게 몸소 최전선에서 싸우기라도 한 것일까.

맨 왼쪽, 대머리에 피부가 붉은 남자가 말했다. 그 남자의 이름을 롤랑은 기억했다.

‘보어조아였던가?’

다른 기사들도 꽤 낯이 익었다.

“환영합니다, 롤랑 경! 다시 뵙길 오매불망 기다렸지요!”

많은 지휘관들이 롤랑을 환영했다. 이 사실에 롤랑은 속으로 안도했다. 설득이 쉬우리라 예상하고서.

그러나 상석에 앉은, 분명 최고사령관일 터인 남자가 입을 열었다.

“다들 입 다무시오. 명석한 지휘관이라면 사기꾼을 반기지 않소. 자, 활약은 익히 들었소이다. 신비기사? 뭐 하러 왔소? 듀랑달이라도 요구하러 온 거라면 미리 대답하리다. 썩 꺼지쇼.”

대오공국에서 듀랑달을 대관식에 쓰고 있다느니 어쩌느니 이야기는 이미 들어본 바였다. 그 때문에 반기지 않는 것인가? 롤랑을 사칭하는 놈이 보검을 요구할까봐?

롤랑은 애써 대답했다.

“그러려고 온 게 아니오, 사령관. 급보를 전하러 왔소.”

“급보라고?”

“나무코끼리들이 군을 이루어 이곳에 진격해오고 있소.”

“코끼리 괴물들이? 미쳤군.”

“그래, 미친 상황이지. 당장 퇴각해야······”

사령관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괴물을 의인화하다니. 정말 제 정신이 아니군. 무훈시를 너무 본 거 아닌가? 설마 자길 롤랑이라 믿는 것도 정말 미쳐서 그런 건가? 뭐 하여튼 좋소. 대답은 같으니. 썩 꺼지쇼, 신비기사.”

난데없이 모욕이라니. 비카파조차 이러지는 않았는데.

롤랑은 당황했지만 어떻게든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내 신분이 중요한 게 아니오, 사령관. 그 괴물들은 명백한 목적 하에 이곳으로 진군해오고 있소. 곧 퇴로가 막힐 거요. 놈들은 트롤들과 협약을 맺었고 이대로는 양 방향에서 덮쳐올 거요.”

“얼씨구, 협약까지 맺었대? 그 무시무시한 음모를 누가 말합디까? 자기네 흉계를 드러내고 싶어 안달 난 코끼리 장군이 직접 나불나불?”

“용이.”

사령관은 입술을 씰룩였다.

“용이? 아이고, 차라리 하피가 말했다 주장하지 그랬소. 그년들은 사람 입이라도 있으니 더 그럴 듯했을 텐데.”

이 세계에도 용이 말하는 것은 비정상적인 일인가?

갈수록 설득이 힘들어지고 있었다. 롤랑이 힘들어하는 가운데 좌중의 기사들이 고함질렀다.

“이 무슨 모욕인가, 사령관! 미친 건가!”

“누구 앞인지 자각하고 언동을 조심하라!”

사령관은 그들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더니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다시 롤랑에게 말했다.

“아무튼 꺼지쇼.”

“퇴각은? 지금 전투 중이 아닐 때 서둘러야 할 터!”

롤랑이 고함지르자 사령관도 언성을 높였다.

“미쳤나? 여긴 본진이라 평화로울 뿐이다! 지금 각곳에 흩어진 부대가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고 있다. 그 부대 모두에 사절을 보내 이렇게 전하란 말인가? ‘발할라에서 내려오신 롤랑 경 말씀하시길, 웬 용에게 전해 들었는데 이곳에 나무코끼리 군대가 몰려오고 있다는 것 같다! 당장 전투를 중지하고 내빼라! 퇴각 도중에 사망자 좀 여럿 나오겠지만 그쯤은 신경 쓰지 말라! 나무코끼리 군대가 오면 다 끝장이니까!’”

사령관은 지겹게도 비꼬고 또 비꼬았다.

문득 롤랑이 물었다.

“나무코끼리에게 지성이 없다 생각하는 건가?”

“있겠나?”

“있다. 거의 인간과 근접한 수준으로. 코끼리는 꽤 지혜로운 짐승이니.”

“미쳤군. 영혼이 있는 것은 두 종족뿐이다. 인간과 거인 말이다, 이 불학무식한 사기꾼 자식아. 그리고 영혼이 없으면 지성도 없는 거다, 모르나?”

사령관은 그 사실을 매우 보편타당한 사실인 양 말하고 있었다.

난데없이 중세다운 주장이라니. 롤랑은 황당한 동시에 이 상황을 어찌 타파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이 상황에 영혼 따윈 없고 죄다 유전자의 선택일 뿐이라 주장하기라도 해야 하나? 그러지 않으면?

그 순간 다른 장군들이 들고 일어섰다.

“이만 닥쳐라, 사령관. 일군을 이끄는 지휘관의 권리로 요구하건대, 당장 퇴각할 것을 요구한다!”

“마찬가지의 권리를 들어 요구하오. 당장 퇴각하시오. 더 늦기 전에!”

사령관이 말했다.

“왜? 위대하신 롤랑 경의 말을 무시할 수 없으니?”

붉은 얼굴의 대머리 남자가 나섰다.

“비꼬는 것은 이미 족하다, 사령관. 당신이 롤랑 경의 진위여부에 의심을 품고 있음은 알고 있다. 하지만 어째서 그 의심이 급보를 무시할 이유가 되는 건가? 아까 우리도 그 거대한 소리를 들었지 않나? 거기에 섞인 가공할 사념파도!”

“그게 코끼리들의 진군나팔이라도 되었다 주장할 셈인가 보군. 그리고 당최 그놈의 사념파 이야기는 뭔지 모르겠어. 당신이 염동력자임을 뻐기기라도 할 셈인가? 딴 사람들이 감지하지 못하는 것을 느낄 수 있노라 자랑하려는 거야?”

사령관은 이죽거렸고 대머리 남자는 계속 말했다.

“자랑하려는 건 아니다마는, 그래. 영능력자로서 발언하겠다. 방금 그 사념파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롤랑 경께서는 그에 따른 구체적인 정보를 가져오셨을 따름이다.”

“그놈의 롤랑, 롤랑······ 저 기사한테 궁성에서 듀랑달이라도 훔쳐다 바칠 모양이군, 보어조아?”

보어조아는 버럭 고함질렀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그러나 사령관은 그저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보어조아는 롤랑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머리를 깊이 숙이더니 이내 말했다.

“사령관을 대신하여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롤랑 경. 이 남자가 말을 듣지 않더라도 저와 저를 비롯한 양식 있는 지휘관들은 경의 말에 따를 것입니다. 우리가 이끄는 군이라도 이끌고 피신하지요.”

이 남자에 대해 롤랑은 이미 알고 있었다. 염동장군 보어조아.

염동검을 이 남자에게서 구입했다. 같은 염동력자로서 재료값만 겨우 받는 것이라 했던가.

롤랑이 물었다.

“고마운 말씀이오만, 이끄는 병졸의 수가 어찌 되시오?”

“좀 줄었습니다마는 이천쯤 됩니다. 그리고 다른 자들도 각기 그쯤 대동했으니 약 일만 군인들이 경 덕분에 목숨을 건지겠군요.”

“그럼 나머지는? 저 사령관은 얼마나 지휘하고 있으며, 얼마나 여기 남겨질 것인가?”

“저 얼간이와 놈을 따르는 지휘관들이 남는다면······ 일만 팔천쯤 남겨지겠지요. 한탄할 노릇입니다. 장군을 잘못 만난 탓에 그 무슨 개죽음이랍니까?”

일만 팔천이나 남겨진다니. 중세답지 않게도 엄청난 대군이 아닌가.

롤랑은 경악하는 동시에 이쯤 해서 만족하는 것이 어떤가 생각했다.

얼마나 남겨지든 적어도 일만은 롤랑으로 인해 구원받는 것이다. 그에 대비되어 저 사령관과 그가 이끄는 대군은 후일 비웃음당하리라. 영웅의 말을 듣지 않은 결과 참담한 피해를 입었노라고.

‘하지만 일만이나 돌아가면 남겨진 놈들은 더욱 대응이 어려워지지 않나?’

롤랑은 문득 외쳤다.

“이중에 포병 이끄는 분 있소?”

만약 남을 사람들의 지휘 하에 포병대가 있다면 미련없이 일만 군대와 함께 돌아갈 생각이었다. 포병대가 괴물코끼리들쯤 알아서 정리해주겠거니 믿고.

과연 대답은 나왔다.

보어조아가 말했다.

“제 휘하에 약간 있긴 합니다. 딱 세 문입니다마는, 그마저도 제 휘하 염동력자들의 조력이 없었으면 여기까지 못 끌고 왔겠지요.”

롤랑은 속으로 욕설을 지껄였다. 제길.

‘유일한 포병대도 같이 귀환해버릴 거라고?’

“그 대포, 여기 남겨두는 것은 가능하겠소? 그 괴물들과 수월히 맞서싸울 수 있도록 말이오.”

롤랑이 제안했으나 보어조아는 말을 흐렸다.

“외람된 대답입니다마는 안 될 말씀입니다. 한 문 만드는 데 저희 가문 재산에서 얼마나 빠져나갔는지······”

< 오십이 층 - [2]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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