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십이 층 - [3] >
그 말에 롤랑은 잔뜩 굳은 채 생각했다. 포병을 포함해 일만 병력이나 빠져나가도 괜찮을까 하고.
이 중세에 그 두꺼운 가죽을 넘어 타격을 줄 만한 수단이 있기나 할까? 아마 포격 외에도 있기는 할 것이다. 마법 주문이니 뭐니 하는 판타지 요소들도 있을 테니.
하지만 역시 완벽한 대응책은 못 될 것이다. 그 중전차들이 덮쳐온다면, 남겨진 군대는 설령 전멸하지 않더라도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이다.
그리 된들 롤랑의 탓은 아닐지도 모른다. 영웅의 명성에도 별 영향이 없을지 모른다. 어쨌건 경고는 했으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 괜찮을 것인가?
롤랑이 생각하기에는 괜찮지 않을 것 같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순 영웅 행세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중요한 건 롤랑의 명성을 지키는 게 아니야. 세계수를 올라······ 황금사과를 얻든가 오딘을 구출하든가 해서 목적을 달성하는 게 중요하다. 명성은 그 과정에서 방해받지 않을 방패에 불과해. 그런데 일만 대군이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는다면 앞으로 세계수 공략은 어찌 될지······’
저들은 지난 오십 층을 돌파해온 정병이라 들었다. 그런 병력이 이 시대 기준으로 엄청난 대군인 삼만이나 되는 것이다.
이들의 무리는 실로 강력한 군세이며, 다시 보충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세계수에서 죽고 싶어 안달 난 무리들을 모아 잘 무장시킨들 이 군세에 비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용병 한 명 이기지 못해 비프로스트에 입장을 거부당한 어중이떠중이들, 성벽 밖에 움막촌을 차린 그들의 수조차 수만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저 밉살맞은 사령관과 그 휘하 지휘관들은 도저히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저들은 실로 이 세계수 원정의 주군(主軍)인 것이다.
‘그리고 주군이 반 토막 나는 것은 그 자체로 전멸의 위기 아닌가?’
롤랑은 알지 못했다. 일만이나 데려가면 다행일 것인지. 아니면 일만밖에 데려가지 못하면 그 자체로 패망인 것인지.
잠시간의 생각 끝에 롤랑은 사령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는 그 남자에게 말했다.
“일단 정찰대라도 보내보시오.”
사령관은 무시하려다 말고 결국 대답했다.
“훈수 두지 않아도 이미 잔뜩 운용하고 있는데?”
“후방에다가! 여기까지 온 길에다 보내보란 말이오. 그놈의 허무맹랑한 코끼리 군대가 있는지 없는지 보기라도 해야할 것 아닌가? 이마저 엄청난 병력 손실이 우려되니 못 하겠다 우기진 않겠지?”
다행히 사령관은 그 말마저 잘라버리지는 않았다. 사령관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부관을 불렀다.
그리고 지시했다.
“위대하신 신비기사께서 분부하신 대로 하게. 이미 지치고 지친 내 가엾은 병사들 중에서 불운한 몇 뽑아다 뒤쪽으로 산책 좀 다녀오라 해. 정찰 도중 뿔쥐라도 만나 몇 죽는다면 뭐······ 헬에 가거든 나 말고 이 신비기사를 원망해야 한다는 걸 일러주고.”
부관은 분노 어린 시선을 받으며 막사를 나섰다.
이후로 축축한 침묵이 깔렸다.
그놈의 정찰 결과를 기다리며 롤랑은 다른 막사에 불편하게 앉아있었다. 주변에 수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린 채로.
그 추종자 중의 하나로서 보어조아가 말했다.
“염동검은 어떻습니까?”
롤랑은 슬쩍 웃어보였다.
“나쁘지 않구려. 그대가 고안한 물건인가?”
“정확히는 아닙니다. 발굴했다 하는 게 정확하겠죠. 옛 문헌에서요. 이런 물건도 있었다, 하고 언급된 걸 제가 어찌 재현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군에서 널리 쓰이나?”
“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몇 자루 만들어다 제 휘하 염동력자들에게 쥐어주긴 했습니다. 그네들이 잘 차고 다니긴 합니다마는 그거야 제 비위를 맞춰주고자 그러는 것 같더군요. 쓸모 있어서가 아니라 말이죠.”
“이 검, 보조 무기로 나쁘지 않던데?”
“경께서야 워낙 놀라우신 분이니 뭘 쥐시든 잘 쓰시겠지만 아무래도 범인들이 그러기에는 무리가 따르는지라. 고안자인 저조차 이 검이 특별히 날카롭다는 것 외로는 내세울 점을 모르겠습니다. 보조 무장으로서의 실용성을 따지자니 차라리 명공이 만든 단검이라도 한 자루 차는 게 낫겠더군요. 명예를 신경 쓰지 않는다면 쇠뇌라도······”
그런 잡담을 나누는 와중에도 할 일은 다 마쳐두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지휘관들은 부하들에게 군장을 싸두라 지시해둔 채였다. 언제든 철수할 수 있도록.
그리고 시간이 흘러 마침내 정찰병이 귀환했다.
롤랑은 정찰병이 사령관 막사에 들어가는 것을 긴장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혹시 코끼리 대군 따윈 못 보았다 보고하면 어쩌나?’
그리 생각했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곧 사령관이 이쪽 막사에 들어섰다. 그 낯빛이 온통 새파래져 있었다.
그 낭패한 표정만으로도 이미 정찰병이 어찌 보고했나 짐작할 만했다. 어쨌건 롤랑이 물었다.
“어떻던가?”
사령관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더군. 제기랄, 그 헛소리가 옳았다고!”
“코끼리 군세가 목격되었나?”
“그래, 놈들이 입구를 틀어막은 것까지 보고받았다! 이제 좀 만족스러운가? 이제 나보다 나은 것 같아 우월감을 느끼나? 그렇다면 실컷 만끽하시지!”
롤랑은 우월감 따위를 느낄 상황이 아님을 깨달았다. 저놈이 지금 뭐라고 했나?
“놈들이 입구를 틀어막았다고?”
“덕분에 후방이 틀어 막혔다. 이제 철군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어. 현자의 말을 따르지 않은 대가가 참 크군그래? 자, 이제 신비기사 나리? 현자의 말을 무시한 우매한 자에게 조언의 몇 마디 던져주지 않겠나? 응? 이제 어찌 구는 게 좋을까?”
이 와중에도 비꼰다는 사실에 분노할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그럴 여유도 없었지만, 주변 지휘관들이 롤랑을 대신하여 노성을 터뜨렸다.
“이 개자식이, 아직도!”
사령관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맘껏 욕들 하시게! 내 기꺼이 참아주지!”
“참든 말든 비난해주마, 머저리 같으니! 진작 철군했으면 상황이 이따위로 치닫지 않았을 것 아닌가! 다 네 알량한 자존심을 챙기느라 이렇게 된······ ”
후방이 막히다니 이 무슨 정신 나간 일이냐? 다 네 탓이다. 롤랑 경의 말을 따라 진작 철수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대강 이런 골자의 비난들이 사령관을 향했다. 그러나 듣고 있던 롤랑은 저 비난이 합당치 않다고 느꼈다.
애초에 소식을 전하자마자 대군이 바로 철수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설령 저 사령관이 롤랑의 열렬한 추종자였을 경우, 그러니까 롤랑의 말을 따라 바로 대군을 철수시키겠노라 결정했다 하더라도 별 차이가 없었을지 모른다.
철수를 위해서는 유예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그 틈이면 이미 나무코끼리 군대가 당도했을 것이다. 놈들은 너무할 만치 빨리도 도착했으므로.
그렇다면 부리나케 달려가 이 급보를 전하라던 용의 경고는?
‘사실 경고가 아니라······ 함정이었군. 날 엿 먹이기 위한.’
하기야 말 한 마디 던져 고명한 전사를 앞뒤가 막힌 전장에 몰아넣을 수 있다면 남는 장사였으리라.
여전히 주변 이들은 비난하고 사령관은 감내하던 와중이었다. 그 실랑이 한 가운데에 롤랑이 끼어들었다.
“다들 그만!”
모두들 자신을 바라보는 가운데 롤랑이 말을 이었다.
“지금 다툴 때가 아니오. 더 늦기 전에 전투준비를 해야 할 것 아닌가.”
사실 병력은 언제든 임전태세를 갖추고 있었지만 롤랑에게 그리 지적할 사람은 당장 없었다. 사령관조차 당장은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러는 편이 나았으니까.
이내 사령관이 말했다.
“그래, 생산적으로 굴어야지. 이제 어찌 하는 게 좋겠나? 억지로라도 후방을 뚫을까? 하지만 힘들 텐데. 놈들이 층간 입구를 틀어막고 있다면 좁은 길목에서 놈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뜻 아닌가. 어림도 없지.”
누군가가 물었다.
“애초에 놈들에게 포격 말고 통하기는 하는 건가?”
“기병 돌격이면 통하기는 하지. 한번 돌격할 때마다 이쪽도 와장창 깨져나간다는 점이 문제지마는. 내 경험상 그 괴물 한 마리를 상대할 때조차 중보병 부대를 상대하는 느낌이었다. 그게 무리를 지었다면······. 음.”
그런 식으로 지휘관들은 빠르게 토론하기 시작했다. 롤랑은 거기에 몇 마디 섞었을 뿐, 그리 많이 참견할 수는 없었다.
사실 저들의 지식은 군사 문외한의 훈수가 필요할 만치 부족하지 않았으니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세계수에서 오래 싸워왔다. 괴물들과, 목숨을 걸고.
물론 도움이 되건 말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어쨌건 롤랑도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상황을 가정해 보자. 나무코끼리 부대, 그러니까 일종의 전차 부대가 후방을 가로막았다.
이쪽에 전차를 상대할 포는 턱없이 부족하다. 바주카포 비슷한 것도 거의 없다. 이쪽 병력의 대부분은 야전삽 한 자루씩 쥔 것이나 다름없는 보병들이다.
어찌 해야 하는가? 이쪽 보병은 실로 용감무쌍하니 삽으로도 전차의 갑판을 두들겨 깨부술 수 있으리라 믿어야 하나?
그러기 싫으면?
모두가 고민하는 사이에도 상황은 급변했다. 지휘관들의 토론을 잠재우고 고둥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적들의 접근을 알리는 나팔 소리.
‘부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트롤 군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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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강기에서 내리자마자 제이슨은 냅다 달렸다. 그리고 거대한 성을 향해 달렸다.
목적지에 당도한 순간, 분명 자신보다 앞서 도착했을 텐데도 아직까지 검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는 모지를 발견했다. 제이슨은 즉시 욕설을 지껄였다.
“아 씹할, 저 병신 새끼가?”
제이슨은 용병 둘에게 가로막힌 모지를 밀쳐내고는 그 자리에 대신 섰다. 그리고 고함질렀다.
“좆나게 급박한 상황이다! 당장 백작 불러와!”
용병이 물어왔다.
“귀하는 또 누구······”
“작작 씨부려라, 개새끼야! 나? 메디아 백작 제이슨이다! 백작이다 백작! 높지 응? 그럼 빨리 너희 두목한테 가서 전해! 롤랑 경에 붙어 다니는 새끼 중 하나가 좀 뵙자 한다고!”
그제야 용병이 움직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문이 열리더니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프로스트 백작 비카파가 말했다.
“뭔 용무요? 무례하게 선약도 없이.”
상대의 지위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제이슨은 그저 자기 기분에 맞게 고함질렀다.
“뭔 예의 타령인가? 급박한 상황이란 말요!”
제이슨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괴물 코끼리 군대가 인간 군대의 후미를 노리고 있으며, 당장 놈들을 상대할 지원 병력이 필요하다고.
그러나 비카파는 난색을 표했다.
“지원 병력이라니, 대포?”
“그렇소!”
“상황이야 알겠는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이어야지. 대포 직접 보신 적이나 있소? 척 보기에도 끔찍하게 크다오. 철 덩어리니까 당연히 보기보다 무겁고. 승강기로 옮기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고 따로 기구를 써야 겨우겨우 계단 위로 올릴 수 있는데 그런 작업을 오십 층 높이까지 하자니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지. 그래서 지금껏 그 코끼리 놈들 상아 가격에도 불구하고 내버려뒀던 거요.”
“그럼 지원 못 한다고?”
“나무코끼리를 상대해야 한다면야 뭐, 기병이야 좀 보낼 수 있겠는데. 음. 각 통로가 말이 다니기 적합한 곳이 아니라서 놈들 옮기기도 꽤 고역스러운 일이지. 지금 최전선에서 기병 운용하는 분들은 정말이지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거요. 승강기로 옮기는 것은 한 세월이니 그리 보내봤자 도움이 안 될 테고 지금 지원을 보냈다가는 하루를 넘길 텐데······”
“하루 넘기든 말든 일단 보내기나 해야 할 것 아뇨!”
비카파는 눈살을 찌푸린 채 말했다.
“누가 보내기 싫다고 지껄였나? 보낸다니까. 다만 시간에 맞을지가 의문이란 말이오.”
“애초에 승강기도 몇 없고, 뭐 이래? 당신이 여기 책임자면서 뭔 놈의 설비가 이따위인가!”
“달리 뭘 더 할 수 있었겠나? 계단이라도 설치해서 그나마 다행이지 그마저 없었더라면······”
거기까지 말한 순간이었다. 순간 이 자리에 없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없으면 큰일이란 말이군?”
여자 목소리였다. 어디서?
모두들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어디를 봐도 순 남정네뿐이요, 저 나무 위에 암컷일지 어떨지 모르는 까마귀 한 마리 보일 뿐이었다.
그 까마귀가 날아올랐다. 하늘을 향해 나풀나풀.
그리고 그 작은 몸이 부풀어 올랐다.
검은 깃털이 흑요석 같은 비늘이 되고, 앙증맞은 부리는 흉악한 주둥이가 되었다. 꽁지깃은 거대한 꼬리가, 온통 검기만 한 조류의 눈에 날카로운 파충류의 동공이 떠올랐다.
거대한 흑룡이 홰를 치고 날아올랐다.
모두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와중이었다. 용은 세계수의 뿌리를 향해 똑바로 날아갔다. 그리고 근방 초소와 입구, 그곳의 계단을 향해 주둥이를 벌렸다.
그 속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더니, 불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불에 닿은 모든 것이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초소도, 그 위의 용병도, 세계수 입구에 설치된 사다리와 계단도 모두.
일련의 작업을 마친 용은 이내 철수를 결정했다.
용은 테두리가 지글지글 달아오르는 세계수의 입구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 몸이 순식간에 줄어들어 까마귀가 되더니 이내 동굴 안에 들어가 사라져버렸다.
*******
< 오십이 층 - [3]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