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십이 층 - [1] >
용의 목구멍이 용암처럼 달아올랐다.
그 아가리에서 불길이 뿜어져 나온 순간, 롤랑은 멀뚱히 서있던 제이슨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나병환자들 사이에 있던 흑기사는 정 반대로 반응했다. 흑기사는 방패를 앞세우고 용을 향해 달려들었다.
용의 불길이 일행을 덮쳤다.
불길의 절반은 흑기사와 그가 든 방패에 가려졌다. 불길에 정면으로 맞선 흑기사가 찬란할 만치 달아올랐다. 이내 불길이 꺼진 순간 흑기사는 소멸하고 말았다.
물론 이 정도는 감수할 만한 희생이랄 만했다. 그러나 미처 피하거나 보호받지 못한 나병환자 한 명이 그 불길에 노출되었다.
비명소리조차 없었다.
불길이 사라진 후 그 자리에는 갑옷 이음새가 죄다 녹아버린 사람의 잔해가 남아있었다. 갑옷 자체가 나병에 걸린 것 같은 꼴이었다.
롤랑은 도저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래서 이 상황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이 아말릭이라는 사실은 특기할 만했다.
아말릭은 불타버린 나병환자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카람스!”
롤랑은 온몸이 굳은 채 그저 칼만 움켜쥐었다.
저게 뭔가? 간단했다. 용.
대표적인 환상의 괴물. 전설, 신화, 무훈 시 따위에 지겨울 만치 등장하는 대표적인 강적.
게임 메디아에도 존재하기는 했다. 그러나 모두가 레이드 보스였다. 설정 상 어딘가 불구라든가 다쳤다든가 하는 설정이 있는 용들조차.
그리고 저 용은 충분히 커보였으며, 전신이 멀쩡해 보였다.
승산이 없음을 판단하는 데 게임 지식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롤랑은 강적 앞에 나설 때마다 공포를 느끼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언제나 느끼던 그 느낌 이상이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목숨이 경각에 달한 공포. 이런 것은 언제 느꼈더라?
신전에서 습격당했을 때······.
공포에는 꽤나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거대한 괴물 상대로 쉬이 달려들 만큼, 꽤나 속이 무뎌졌다고 느꼈는데. 실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롤랑은 떨지 않기 위해 모든 여력을 발휘했다. 그러고는 당당히 검을 들어올린 채 물었다.
“뭐냐?”
대답을 바라지는 않았다. 별로 지성적으로 생긴 괴물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의외로 대답이 돌아왔다.
용이 말했다.
“코끼리 좀 구우려고.”
여성적인 목소리. 도저히 저 괴물의 성대에서 난 것 같지 않았다. 심지어 그 목소리는 유들유들하기까지 했다. 습격에 실패한 변명을 하는 악당답게도.
롤랑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목적이 뭐지? 무슨 이유로 습격한 거냐?”
“코끼리 좀 구우려 했대도. 꽤 전부터 노리던 놈이었지. 나무코끼리 영매의 뇌를 먹으면 영적으로 도움이 될 것 같잖나.”
여기서 추궁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롤랑이 말했다.
“네놈이 동료를 해쳤다.”
용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음, 그래? 미안하네. 그런데 어디서 본 얼굴인데. 너······ 롤랑인가? 발할라의 그?”
어떻게 알아보았나? 당장 신경 쓸 수 없었다.
롤랑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마는.”
“제길, 잘못 건드렸네. 그럼 복수하려고? 그러지 말아주면 안 될까?”
용의 어조는 간드러졌다.
얼핏 듣기에는 애걸하는 것 같아도 간절함이 없었다. 오히려 이 상황을 흥미로워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저 용은 롤랑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로 보아 엄청난 거물일지도 모른다. 발할라에 몇 번 드나들어 봤거나, 아니면 고대로부터 살아남았다거나.
롤랑은 직감했다. 절대 싸워서는 안 된다. 절대.
그러나 약해보여서도 안 된다. 저 용은 이쪽이 롤랑임을, 꽤 고명한 전사임을 눈치 채고 싸움을 마다하고 있다.
그러니 이쪽이 싸움을 피하길 원한다는 것을 눈치 채여서는 안 된다. 자고로 약해보이는 놈은 물어뜯기기 마련이다.
할 말을 골라야 한다. 신중하게.
롤랑은 그 어느 때보다 필사적으로 대사를 골라냈다.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라도?”
“그럴 상황이 아닐 테니까.”
“설명해라, 용. 납득시키지 못할 경우 롤랑과의 일전을 각오하라.”
용은 거 무섭네, 하고 중얼거리더니 이내 말했다.
“너는 나와 싸울 여유가 없어.”
“그리 보이나?”
“이해를 못하나 보군. 방금 코끼리 울음소리 들었나? 그 울음에 섞인 사념은? 읽을 수 있었나? 없었을 거 같은데. 설마 발할라에서 코끼리어를 배운 건 아닐 테니까. 그러니 대신 해석해주지······. ‘동족이여, 코를 울려 출전을 선포한다. 흉악한 원숭이들의 뒤를 칠 때가 당도했다.’ 여기서 그 흉악한 원숭이가 뭔지 아나? 바로 너희를 말하는 거였어. 롤랑.”
“무슨 뜻인가?”
“나무코끼리들이 세계수에 올라온 너희 군대의 뒤를 칠 거야.”
너무나도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소리.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롤랑은 눈썹을 꿈틀거렸고 용은 계속 말했다.
“위 층에서는 지금 전투가 한 판이지. 인간 군대와 거인 부대와의 전투. 그에 앞서 코끼리 원로는 거인 지휘관들과 협약을 맺었어. 나무코끼리들은 그 전쟁에 끼어 인간 군대의 뒤를 후려갈길 거야. 그리고 그때가 바로 지금이야.”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애초에 예상하려 하지도 않았던 말들이 술술 튀어나왔다. 물론 롤랑은 그 소식에 흥미가 없었다.
그러나 관심 있는 척해야 했다. 영웅적인 기사 롤랑이라면 필시 그러할 것이므로.
롤랑은 의문쩍다는 듯이 물었다.
“어떻게 아는 건가?”
“놈들의 밀약을 직접 들었지. 그 자리에 있었거든······ 그래서 어찌할 텐가? 집채보다 큰 코끼리들이 뒤를 후려갈기면 자네 동족들의 군대는 꽤나 아파할 텐데. 용과 일전을 벌이는 영광을 위해 그들을 내버려둘 텐가? 아니면 이 큰 도마뱀은 그냥 코끼리 뇌나 퍼먹게 내버려두고 동족들에게 달려가 급보를 전해줄 텐가?”
용은 롤랑에게 싸움을 피할 명분을 주고 있었다. 설령 이길 수 있는 상대일지 몰라도, 어쩌면 자신한테 상처 정도는 낼 수 있을지 모를 상대이기에. 롤랑은 그 사실을 이해했다.
결국 내놓을 수 있는 답변은 정해져 있었다. 롤랑은 그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굳은 얼굴로 롤랑이 물었다.
“위 층이라고 했나?”
용은 그 거대한 머리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리하여 롤랑은 일행에게 손짓했다. 가자고.
아말릭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나 무어라 반대하지는 않았다.
롤랑은 묵묵히 다가가 불탄 시체를 짊어졌다. 그리고 뒤를 힐끗거리며, 용을 경계한 채 걸어 나갔다.
한편 코끼리 뇌가 탐난다는 것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용은 아가리를 크게 벌렸다······.
용을 뒤로하고 일행은 멀리 떨어졌다. 이내 용이 보이지 않을 거리가 되었을 때, 롤랑은 무릎 꿇고 기도 올렸다.
오딘에게. 이 가엾은 시체를 살려달라고.
그렇게 소생 주문을 읊었으나 예상했듯 효과가 없었다. 시체에는 빛이 감돌다 말고 사라졌다.
하기야 게임에서도 소생이 가능한 것은 신성한 영혼뿐이라 했던가.
이내 롤랑이 말했다.
“발할라가 그를 받아들였노라 믿소.”
아말릭이 안면가리개를 벗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시체의 불타 쪼그라든 손을 붙잡았다. 그러나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롤랑은 생각했다.
‘그래서 이제 어째야 하나.’
상황이 너무 갑작스럽고 뜬금없다. 게임에서 벌어져도 심히 당황스러울 강제 이벤트라니.
용이 뭐라고 했던가? 코끼리 군대가 전투 중인 인간 군대의 후미를 기습?
그래서 대체 어쩌란 말인가?
‘위에서 전쟁이 벌어지건 말건 무슨 상관이냐? 지금 내 몸 간수하기도 벅찬 마당에.’
애초에 무슨 상황인지 감도 잡히지 않고 위기감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뭔가 급박한 위기라는 것은 알겠는데 현실성을 느낄 수가 없다. 코끼리가 인간을 기습한다니, 동화도 아니고 대체 뭔가.
이 상황을 어찌 넘겨야 하나 생각하던 차였다.
세상이 흔들렸다.
순간 지진인 줄로만 알았다. 땅이 흔들리고 거센 천둥이 울리니 정말 그런 줄 알았다. 나병환자 두 명이 엉덩방아를 찧었을 정도의 진동이었다.
그러나 저 진동이 꽤나 익숙한 형태임을 롤랑은 알아챘다. 롤랑은 그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흙먼지를 나부끼며 이동하는 거대한 덩어리가 보였다.
용이 말했던, 코끼리 괴물 군대가 진군하고 있었다.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도 놈들의 형체는 똑똑히 보였다. 놈들의 크기가 너무 거대했기에.
선두에 선 놈들의 덩치 때문에 후열이 가려져 정확한 수는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앞서 그 군락에서 보았던 수, 그러니까 스무 마리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그 갑절을 훌쩍 뛰어넘은 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곳곳에서 작은 지진이 울렸다. 방금 그 울음에 응하여 각 곳에 흩어져 있던 코끼리 괴물들이 무리에 합류하고 있었다.
그 모습과 진동을 실제 보고서야 롤랑은 느꼈다. 저 괴물들이라면 실제 군대에 엿을, 그것도 아주 큰 엿을 먹일 수 있으리라고.
저들은 사람을 꽤나 많이 죽일 수 있으리라고.
그러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 도의상, 그리고 영웅을 연기하는 이상.
롤랑은 이미 용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것도 현지인 동료들 앞에서. 그렇다면 피할 수 없다. 할 일을 해야한다.
롤랑이 중얼거렸다.
“후미를 기습? 그러기 전에 소식을 알려야겠지.”
롤랑은 문득 제이슨의 표정을 보았다. 진심이냐는 표정.
생각해 보니 그 날뛰는 성정에도 불구하고 동료를 불태우고 등장한 용에게 제이슨은 별 말이 없었다. 그 사실이 문득 떠오름과 동시에 롤랑은 느꼈다.
역시 저놈에게도 공포가 있다. 다른 사람들만큼은 아니지만 어쨌건.
‘그렇다면 저놈도 당장엔 빼줘야겠지.’
이내 롤랑이 말했다.
“지금부터 나는 위층에 간다. 너희는 시체를 데리고 아래에 돌아가라. 그리고 비카파 백작에게 이 소식을 알려. 그에게는 포병대가 있다고 들었다. 지원을 요구해라.”
굳은 얼굴로 모지가 물었다.
“네가 가겠다고?”
롤랑이 대답했다.
“그래.”
“혼자서 위까지? 차라리 투명해질 수 있고 유령마를 소환하여 빨리 이동할 수 있는 내가······”
고맙고 나름 타당하기까지 한 제안. 그러나 롤랑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내가 하겠다. 주문이나 걸어라. 최대한 빨리 가야 할 테니.”
이 상황에 유용한 주문이 있건 말건 모지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모지는 언변이 뛰어나지 못했으니까. 전령 역할을 시키기에는 너무.
모지가 머뭇거리는 차 롤랑이 재촉했다.
“자, 빨리!”
이내 모지가 입술을 달싹였다.
주문의 힘이 롤랑을 감쌌다. 우선은 투명화.
그리고 모지는 유령 군마까지 한 마리 불러내주었다. 롤랑은 그 으스스한 말 위에 올라탔다.
모지가 유령 군마에도 주문을 걸어 투명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그 말에다 가속 주문을 걸어준 순간, 롤랑은 지체없이 박차를 가했다.
롤랑을 태운 유령 군마가 달려 나갔다. 롤랑은 허리를 깊이 숙인 채 안달했다.
다음 층 계단이 어디 있던가? 지도를 본 기억이 있기는 했으나 그래도 가물가물하다. 그래도 한시라도 빨리 가야만 한다.
당장에는 투명하지만 그마저 곧 주문이 풀릴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가속 주문도 곧 풀릴 것이며, 유령 군마조차 주문으로 불러낸 이상 언젠가 사라져버릴 것이다.
주문의 정확한 지속시간은? 투명화와 가속의 지속시간은 꽤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유령 군마의 경우는 당최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할 수 없었다.
일행에서 벗어난 채 롤랑은 말을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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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십이 층 - [1]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