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차니즘 헌터-4화 (4/160)

▣ 4화

내가 노려보자 이근수가 움찔하고 한 발짝 물러났다. 나 때문이겠지만 주변의 공기가 10도쯤 내려간 것 같았다.

“야! 뭐? 왜?”

이근수는 흐름상 맞지 않는 소릴 하며 자신이 쫄았다는 것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보고도 내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것은 귀찮음과는 전혀 다른 감정이었다.

내가 본능을 따라 이근수 쪽으로 한 발짝 내디뎠을 때 미미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주군! 택시 왔어요!”

“그래?”

나는 이근수를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본 다음 몸을 돌렸다.

‘운 좋은 줄 알아라.’

택시 뒷좌석에 올라타자 미미가 잽싸게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표정이 즐거워 보이는 것은 왜일까?

5

각성 판정을 받으러 헌터 관리소에 도착한 나는 언짢은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이곳에서 다시 이근수를 보게 된 것.

그 역시 각성 판정을 받으러 간다고 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동네가 같으니 같은 헌터 관리소로 오게 된 것이다.

이근수는 나에게 쫄았던 것을 만회하려는 심산인지 옆으로 와서 깐족거렸다.

“이야~ 또 보네? 이럴 줄 알았으면 택시비 아낄 겸 같이 올 걸 그랬다야.”

내가 대답하지 않자 미미에게 말을 걸었다.

“또 뵙네요? 그나저나 철웅이랑 어떻게 아는 사이에요? 둘이 진짜 사귀는 건 아니죠?”

그때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각성 판정을 받으러 오신 분들은 별관에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각성 판정을 받으러 온 사람은 총 십여 명이었다.

모두 헌터가 될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서인지 표정들이 매우 밝았다.

별관으로 이동하니 2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인상 좋은 여자 공무원이 안내사항을 일러주었다.

“각성 판정은 총 세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는 악력기로 근력을 측정할 것이고, 두 번째는 러닝머신으로 주력을 측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두 명씩 짝을 지어서 전투기술 각성 여부를 판정하겠습니다.”

‘세 단계씩이나? 집에 빨리 가기는 글렀네.’

그냥 검지 하나만 갖다 대면 바로 각성 여부를 알 수 있는 기술은 없나?

헌터가 등장한 지 얼마나 오래됐는데 아직도 이런 아날로그 방식을 쓰다니.

하지만 각성을 판정하는 기구는 내가 생각한 만큼 아날로그가 아니었다.

말이 악력기지, 일반인이 사용하는 운동기구와는 확연히 달랐다.

두 손으로 기계의 손잡이를 꽉 쥐면 악력이 수치화돼서 화면에 표시된다.

일반인이 잡으면 아무리 용을 써도 작동 자체를 하지 않고, 각성한 사람들만이 초인적인 근력으로 손잡이를 움직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가장 먼저 기계장치에 앉은 우락부락한 남자가-각성이 꼭 신체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아마 각성 전부터 운동을 열심히 했던 사람인 듯싶었다. 단 한 가지,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반팔 나시를 입고 있다는 것은 좀 깼다.-기계를 작동하고 있는 검사원에게 물었다.

“이거 최고 기록이 얼마인가요?”

안경을 쓴 검사원은 자주 듣는 질문이라는 듯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오성택 씨가 저희 관리소에서 검사를 받았거든요. 그때 수치가 493 나왔습니다.”

“우와~~~”

각성 판정을 받으러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다들 각성 판정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는 모양.

미미가 내게 설명해 주었다.

“가장 평균적 각성자인 C급 헌터가 10에서 20이 나와요. 그리고 B급은 50에서 70, A급은 110에서 150가량이 나오죠. 493이라면 엄청나게 높은 수치에요.”

“오, 그래?”

이렇게 들으니 실감이 됐다. 사람들이 왜 약속이나 한 듯 감탄사를 내뱉었는지.

하긴 오성택은 대한민국에 셋밖에 없는 S급 헌터 중에서도 근력이 가장 센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등급 판정도 아니고 각성 판정에서 이미 그만한 괴력을 발휘했다니, 역시 S급 헌터는 근본부터 다른 모양이다.

‘그렇구나…… 10에서 20 사이라고?’

나는 절대로 필요 이상으로 힘을 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목표는 어디까지나 C급 판정을 받는 것이니까.

오늘 받는 것은 등급 판정이 아닌 각성 판정이지만 쓸데없이 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헌터 길드들의 영입 경쟁이 치열해져 각성 판정 결과부터 눈여겨보는 경우가 많다고 하니까.

딱히 비공개 정보가 아니라서 모든 길드가 각성자들의 판정 결과를 열람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절대 튀면 안 돼!’

나는 돈과 명성보다도 그저 귀찮지 않은 삶을 원할 뿐이다.

6개월에 한 번씩 사냥하고, 나머지 시간은 집에서 TV를 보거나 게임을 하며 뒹굴거릴 완벽한 계획도 세워두고 있었다.

‘생각만 해도 개꿀.’

행복한 상상을 하는 중에 이근수가 옆으로 다가왔다.

“와, 이거 긴장되네? 어째? 너는 잘 나올 것 같아?”

놈의 표정을 보자니 자기가 나보다 수치가 높게 나올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는 듯했다.

고등학교 때 무엇이든 나보다 조금씩 앞섰으니 학습된 우월감이라는 게 있을 수도 있겠지.

‘그게 영원할 줄 아는구나…….’

어쩌면 오늘 나를 만난 것이 자기에게는 행운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꼴찌는 면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그때 사람들 사이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아아~~”

드디어 근육질 남자의 근력 수치가 나온 것.

기기에 표시된 숫자는 7이었다.

한 마디로 C급에도 못 미친 것.

“잠깐만요! 한 번만 더할게요! 기계가 이상하네!”

남자는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듯 도리질을 쳤다.

검사원은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딱 한 번만 더 기회를 드릴게요.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알았어요! 끄으응~!”

결과는…….

5.

좀 전보다 안 좋은 수치였다.

남자는 얼굴이 터질 정도로 악력기를 꽉 눌렀지만, 수치는 시간이 갈수록 떨어졌다.

4…… 3…….

“에이, 씨!”

결국 굴욕감만 가득 안은 채 남자는 근력 측정기에서 일어나야 했다.

한 번만 더 하자고 떼를 안 쓴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할까?

얼굴이 시뻘건 것을 보니 이 이상 쓸 힘도 없는 것 같지만.

그러게 왜 최고 기록을 물었어.

인간이었을 때의 신체 능력과 각성한 뒤의 신체 능력은 전혀 상관관계가 없다는 게 상식인데 왜 사서 망신을 당하는 건지 모르겠다.

각성 판정을 받으러 온 사람들이 차례차례 기구에 앉았다.

이제껏 나온 최고 수치는 18.

오늘 각성 판정을 받은 사람 중에는 아직 B급 이상이 없는 셈.

측정기는 나름 첨단 기술이 적용되어 있어서 나중에 아무리 사냥을 많이 해도 정해진 수준 이상으로 등급이 나오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말하자면 각성 판정 때 근력 수치가 15가 나왔던 사람이라면 나중에 노력해서 30, 40까지 올릴 수는 있지만, B급 수준인 50 이상에는 절대 이를 수 없다는 식이다.

아직 검사를 받지 않은 사람은 나와 이근수뿐이었다.

이근수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내게 제안했다.

“우리 내기할까? 결과가 더 낮게 나온 사람이 높게 나온 사람 소원 들어주기.”

“싫은데?”

내 단호한 거절에도 놈은 포기하지 않았다.

“에이~ 친구 사이에 재미로 하자는 거지~ 그럼 내기하는 거다? 알았지?”

제멋대로 결정을 내리더니 기구로 걸어가는 이근수.

어째 소원 들어주기라고 하면서 미미를 흘긋거리는 게 수상했다.

미미가 내 귀에 속삭였다.

“주군. 저분이랑 무슨 사이세요? 말씀드리기 외람되지만 주군 친구이신 것 같아서 참고 있는데, 아까부터 엄청나게 거슬리네요.”

“친구 아니야. 적이야, 적.”

“네? 적이요?!”

미미의 두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그녀의 동공이 붉게 물든 것.

나는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 그녀에게 물었다.

“너는 각성 판정 안 받아도 돼?”

“어머 주군, 저는 이미 라이선스가 있어요.”

“응?”

이건 또 무슨 소리? 지구에서 깨어난 지 얼마 안 됐다고 하지 않았나?

헌터 라이선스 이전에, 너 주민등록증은 있냐?

그녀는 허공에 손을 뻗어 무언가를 쓱 꺼냈다.

플라스틱 카드에는 그녀의 증명사진과 함께 또렷한 문자가 적혀 있었다.

[A급 헌터 조미미]

진짜 라이선스가 있었다. 그것도 A급.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녀가 설명했다.

“인터넷에 가짜 라이선스 만들어주는 곳이 있어요. 좀 비싸긴 하지만 감쪽같더라고요. 제 성은 주군의 것을 따랐어요. 헤헤.”

“그거 범죄잖아.”

“저는 이성인이에요. 지구의 법률에 구애받지 않는답니다.”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그리며 얼굴에 갖다 붙였다.

범죄자 주제에 귀여운 표정 짓지 마라.

“그런 게 있었으면 나한테도 알려줬어야지. 왜 귀찮게 여길 온 건데?”

“아니죠~ 주군. 저야 이곳 사람이 아니니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만에 하나 주군 경력에 흠집날 일이 생기면 되겠어요? 다소 불편하시더라도 정식 절차를 밟는 게 좋아요.”

뻔뻔하게 자기와 타인에게 이중잣대를 들이대다니.

미미와 대화하느라 신경 쓰지 못한 사이 사람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

사람들의 시선은 이근수가 앉은 악력기에 향해 있었다.

정확히는 거기 표시된 숫자.

53.

명백히 B급 헌터에게 나올 수치였다.

놈은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하하하!”

기구에서 내려온 이근수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내게 일직선으로 다가왔다.

“기억하지? 우리 내기한 거다?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해~”

‘쳇.’

나는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적당히 하자는 기준을 좀 바꾸기로 했다.

‘53을 넘길 정도로만…….’

내가 이어받은 능력의 주인은 특별했다.

천재 중의 천재.

먼치킨 중의 먼치킨.

하지만 기구에 올라가 손잡이를 잡은 나는 막상 어디까지 힘을 주어야 하는지 헷갈렸다.

‘뭐, 적당히 하면 되겠지.’

내가 살짝 악력기를 쥐자 검사원이 말했다.

“더 세게 쥐셔야 합니다. 기계 안 부서지니까 안심하세요~”

그의 농담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웃었다.

“하하하.”

그중에서도 유독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는 이근수.

“하하하하!”

그 목소리가 귀에 거슬렸던 나는 나도 모르게 악력기를 꽉 쥐고 말았다.

빠각!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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