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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차니즘 헌터-5화 (5/160)

▣ 5화

“……안 부서진다면서요?”

나는 적반하장의 표정으로 검사원을 바라보았다.

‘내 힘이 이렇게 세다니.’

도저히 조절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어어?”

검사원이 안경을 추어올렸다.

부서진 악력기를 한 번, 내 얼굴을 한 번 보더니 뒷머리를 긁적였다.

“왜 부러졌지……?”

곤란한 표정으로 그는 열심히 장치의 이곳저곳을 들여다보았다.

“다른 기계는 없는 거죠? 에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그냥 적당히 15 정도로 해주세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다른 헌터 관리소에 가셔서 새로 검사를…….”

“이것 보세요.”

나는 엄한 표정을 지었다.

“기계가 부서진 게 제 잘못입니까? 다른 헌터 관리소가 제가 있는 곳으로 오는 것도 아니고 저더러 가서 새로 검사를 받으라고요?”

“그, 그게…… 물론 죄송하기는 하지만…….”

“됐어요. 어쨌든 기계는 반응을 한 거잖아요? 저는 각성 판정받으러 왔지, 등급 판정을 받으러 온 게 아닙니다. 그냥 넘어가요. 아셨죠?”

“음……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당황한 검사원은 우물쭈물 대답했다.

‘잘됐네, 잘 됐어.’

솔직히 B급 이상의 수치가 나오면 곤란하다고 생각했는데, 대충 무마할 수 있어 다행이다.

다만 이근수만은 똥 씹은 표정이었다.

“하필 이때 기계가 망가지냐?”

다른 사람들은 ‘기계가 부서질 만큼 힘이 센 거 아니야?’, ‘나 악력기 부서졌다는 말 처음 듣는데?’ 같은 말을 하고 있었지만, 이근수의 머릿속에는 내가 자기보다 힘이 셀 거라는 가정은 아예 들어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근력 검사가 끝나자 공무원이 말했다.

“두 번째는 주력 테스트입니다. 모두 해당 장소로 이동해 주세요~”

해당 장소라고 해봤자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각성 판정은 고등학교 강당만 한 규모의 별관에서 진행되고 있었으니까.

20미터쯤 떨어진 곳에 러닝머신 세 대가 놓여 있다.

역시 최첨단의 설비인지, 일반 러닝머신보다 외관이 두툼하고 긴 전선들이 주렁주렁 연결되어 있었다.

순서는 근력 테스트를 받았을 때와 동일.

따라서 나는 이근수와 마지막 조에 속하게 되었다.

놈은 다시 기가 살아난 얼굴로 말했다.

“알지? 내기 계속하는 거다? 이번에 결판내는 거야?”

“그러든지.”

거절해 봤자 계속 토를 달면서 귀찮게 할 것이다.

덩치 큰 남자 1번은 근력 테스트 이후로 기가 팍 죽어 있었다.

본인이 가장 자신 있었던 게 근력이었던 모양인데, 거기에서 죽을 쒀서 이미 자포자기한 얼굴.

D급 헌터면 확실히 애매하긴 하다.

일반인보다야 수입이 많겠지만, 사냥할 때 부상 빈도가 높아 딱히 각성한 것이 이익이라 보기 어려웠다.

‘딱하네.’

헌터로 각성했을 때 엄청 들떴을 텐데.

‘뭐, 남의 일이니까.’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게 헌터 걱정이다.

주력 테스트도 근력 테스트 때와 비슷한 분위기로 흘러갔다.

모두 처음 테스트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결과를 얻은 것.

사실 변수가 있으려야 있을 수가 없기도 했다. 아직 특수능력이나 스킬이 개방되지 않은 일반 각성자들은 근력이나 주력 중 어느 한 가지가 두드러지지 않으니까.

‘그냥 근력만 테스트하고 끝낼 것이지.’

어느새 차례가 돌아와 나는 러닝머신에 올라갔다.

사람들은 웅성대며 내 뒤쪽으로 모여들었다.

이유는 내가 근력 테스트 때 범상치 않은 결과를 냈기 때문에.

그들 중 상당수는 어쩌면 내가 대단한 각성자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듯했다.

본인들 결과는 이미 나왔으니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찾은 셈이다.

‘저리 가라. 쉭, 쉭.’

괜히 눈에 띄잖아.

나는 오늘 적당히 하고 집에 갈 거라고.

가장 거슬리는 왕파리가 내 옆의 러닝머신에 올라탔다.

“이야~ 이거 좋다. 나란히 달리니까 비교가 확 되겠어. 이걸로 승부 내면 되겠네. 하하.”

어쩌자고 이놈이랑 같은 날 각성 판정을 받게 돼서…….

나는 원망의 시선으로 미미를 돌아보았다. 왜 굳이 오늘이어야 한다고 날 끌고 온 거냐.

아무것도 모르는 미미는 순진한 얼굴로 응원을 보냈다.

“파이팅!”

‘하긴…… 네 잘못이 아니지.’

각성 판정은 한 번은 반드시 거쳐야 할 일이다. 오히려 빨리 해치우지 않으면 끈질기게 마음속 짐으로 남았을 터.

이근수는 그저 찜찜한 변수였을 뿐이고.

“자, 20㎞부터 시작할게요~ 편하게 걸으시면 됩니다.”

일반인이 시속 20㎞ 속도로 걸었다가는 발목이 부러질 것이다.

하지만 헌터가 속보를 하면 이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D급 헌터조차도 20㎞면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걸을 수 있다.

러닝머신에 올라탄 세 사람 모두 여유 있게 걷기를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걸으려니 몸이 뒤뚱거리기는 했지만, 밸런스가 무너지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나는 발목이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뭔가 스트레칭 되는 느낌이라고 할까?

“속도를 올리겠습니다. 이번에는 25㎞예요~ 벅차다 싶으면 뛰시면 됩니다~”

검사원이 러닝머신의 속도를 올렸다.

여기서 달린다면 D급 헌터이다.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세 번째 러닝머신에 있는 사람이 탁 탁 탁 탁,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헉헉대는 숨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반면 나는 이전과 별로 달라진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속도 올린 거 맞아? 기계가 고장 났나?’

나는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C급 코스프레를 하기 위해서 살짝 뛰어볼까 했지만 어떻게 이 속도에서 뛰어야 할지 감을 잡기 어려웠다.

만약 여기서 어설프게 뛰었다가는 러닝머신을 뚫고 앞으로 튀어나가게 될 것 같았다.

‘힘드네.’

능력을 제어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옆에서 이근수가 뒤뚱뒤뚱 걸으며 말했다.

“이열~ 너도 C급인가 보네? 우리 철웅이 잘 걷는구나!”

놈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명백히 내 쪽이 더 편안하게 걷고 있는데, 센 척하는 것을 보니 기본적인 인지 능력을 탑재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뒤쪽에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와~ 하나도 안 힘든가 봐.”

“오히려 아까보다 더 편안하게 걷는데?”

“나 오늘 각성 판정받으러 오길 잘한 듯. 좋은 구경하네.”

그만둬. 니들은 자존심도 없냐.

너희들이나 나나 똑같은 헌터라고.

뭐, 똑같다는 표현은 좀 미안하긴 하지만.

“이제 속도를 더 올리겠습니다. 30㎞예요~”

30㎞가 되자마자 세 번째 러닝머신에 올라가 있던 사람이 빽 소리를 질렀다.

“그만, 그만! 멈춰주세요!”

검사원이 작동을 멈추자 세 번째 러닝머신에 올라가 있던 사람이 허리를 팍 숙이고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헉! 헉! 헉!”

이 사람은 빼박 D급 헌터다.

속도가 5㎞ 빨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별로 달라진 느낌을 받지 못했다.

‘이러면 계획이 어긋나는데…….’

이근수가 불편한 시선으로 내 쪽을 흘긋거렸다.

“훅! 훅! 참지 마~ 이런 데서 훅! 자존심 훅! 안 세워도 돼~~ 훅! 훅! 훅!”

남 지적하기 전에 니 호흡이나 좀 어떻게 해라.

검사원은 나와 이근수를 지켜보다가 지체하지 않고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50㎞입니다~”

탁! 탁! 탁!

이근수가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달릴 수가 없었다. 여기서 뛰었다가는 또 기계가 망가지고 말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으니까.

근력 머신은 그렇다 치더라도 하루에 기계가 두 대씩이나 망가지면 화젯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내게 그것은 C급 헌터로 판정받지 못하는 것보다 더 피해야 할 일이었다.

‘차라리 계획을 수정해서 B급이 될까? C급과 큰 차이는 없을 것 같은데…….’

이근수는 인상을 팍 쓰고 내 쪽을 노려보았다.

여전히 여유작작하게 걷고 있는 내게 뭔가 말을 하고 싶은 눈치이지만, 달리는 게 너무 힘들어서인지 거칠게 숨만 쉬었다.

“헉! 헉! 헉!”

그나저나 50㎞가 왜 이렇게 느리지? 미미가 괜히 택시 대신 뛰어가자는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아닌 게 아니라 택시 타는 것보다 뛰는 것이 명백히 빨랐을 테니까.

“이번에는 100㎞로 올릴 겁니다~ 힘들 것 같으면 미리 말씀해 주세요~”

검사원의 시선은 명백히 이근수를 향해 있었다.

하지만 놈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고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요!”

검사원은 미심쩍은 얼굴로 속도를 올렸다.

콰당당탕!!!

내 옆에서 어마어마한 소리가 났다.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천장이 내려앉았다고 착각할 법한 엄청난 소리.

러닝머신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대자로 뻗은 이근수의 몸이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다.

꼴에 자존심은 있는지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이 다가가자 빽 소리를 질렀다.

“괜찮아, 괜찮아!”

새끼가 싸가지없이 처음 본 사람들한테 반말이냐.

아직 러닝머신에서 덜 떨어져 봤구나?

그나저나,

‘……이러면 곤란한데?’

100㎞로 움직이는 트레드밀 위에서도 나는 뛰는 타이밍을 잡을 수 없었다.

물론 다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뛰는 것과 걷는 것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검사원이 말했다.

“이번에는 속도를 200㎞로 올릴 거예요. 괜찮으시겠죠?”

“괜찮겠습니까?”가 아니라 당연히 괜찮을 거라는 말투였다.

검사원으로 일하는 동안 숱한 각성자들을 보았을 테니 그의 판단이 틀리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나는 정말 이 이상 눈에 띄어서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 잠깐! 잠깐만요!”

나는 훌쩍 뛰어 러닝머신에서 내려왔다.

뭔가 나도 모르게 엄청 우아한 동작을 선보인 것 같은데, 그것을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얼른 말했다.

“발목이 아파서 더 못 뛰겠어요.”

“네?”

검사원이 멍하게 반문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한 번도 안 뛰셨는데요?”

“뛰는 걸 싫어해서 억지로 걸은 거예요. 지금 발목이 부러질 것 같아요. 아야야야!”

절뚝거리는 연기를 했지만, 내게 쏠린 시선에는 의구심이 가득했다.

나는 적당히 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 바닥에 주저앉아 열정적인 연기를 펼쳤다.

“아이고오~ 발목이야! 무리했다, 무리했어! C급인데 무리했어!”

공무원과 나 사이의 공기가 5도쯤 내려갔다.

뻘쭘해지려는 찰나 고마운 조력자가 등장했다.

“세 번째 테스트 장소로 이동하겠습니다. 마지막 테스트는 배틀 테스트입니다.”

배틀 테스트를 하는 장소는 별관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공무원이 계속 말했다.

“두 명씩 짝을 지어서 진행하겠습니다. 입으실 장비에 자력 장치가 있어서 신체에 직접적인 충격은 가지 않습니다. 각성자 간에 미치는 마나 반응, 즉, 기초적인 사냥 능력을 테스트하고자 하는 것이니 필요 이상의 행동은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각성 판정을 받으러 온 사람들 모두에게 특수장비가 지급되었다. 그것을 착용하자 각각 한 개씩 긴 막대가 지급되었다.

입고 있는 장비와 막대 끝에 달린 장치가 자력을 방출하여 서로 밀어내는 작용을 하는 것 같았다.

근력머신과 러닝머신 모두 특수한 기기였지만, 그중에서도 배틀 테스트를 하는 장치가 가장 고난도의 기술이 응축됐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는 생각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 테스트로, 최소한의 사냥 능력을 갖추었느냐를 확인하기 위한 테스트였다.

각성자 중에는 사냥 능력이 아예 없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런 사람은 당연히 사냥 이외의 일에 종사하게 된다.

“첫 번째 조부터 앞으로 나와 주세요.”

공무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근수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네?”

“제가 조철웅이랑 싸우겠습니다!”

검사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마치 누군가가 분위기에 맞지 않은 썰렁한 농담을 한 것처럼.

이런 상황에 대한 매뉴얼은 없는지 공무원이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이것은 싸움이 아니라 테스트입니다. 먼저 테스트받는 것은 상관없지만 그전에 먼저 조철웅 님의 동의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리자,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어쩔 수 없나?’

솔직히 테스트가 너무 오래 걸려 슬슬 귀찮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더구나 이근수 놈이 깐죽대는 것을 참는 것도 한계에 이르렀고.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뿐이다.

“……할게요.”

“좋아쓰! 그래야 남자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이근수가 막대 든 팔을 쳐들며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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