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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차니즘 헌터-3화 (3/160)

▣ 3화

은근슬쩍 침대로 올라가려는 나를 미미가 붙잡았다. 물리적으로 붙잡았다기보다는 그녀의 말이 내 행동을 멈추게 했다.

“하긴, 이것도 예상 못 한 일은 아니지만요.”

아직 안 끝났어?

밥 먹었으니까 난 좀 쉬고 싶은데.

본래 성격이 밝은 것인지 미미는 금세 환하게 표정을 바꾸고 말을 이었다.

“람바스 님의 역량이 워낙 압도적이어서 그분의 유지를 잇는 자도 당연히 성격적인 영향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람바스 님도 나름의 장치를 해두셨죠.”

“장치?”

“네. 이 행성에서 가장 부지런한 사람에게 자신의 과업을 잇도록 하시겠다고요. 결과와 상관없이, 노력 자체에 의미를 두고 죽도록 자신을 던져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을 찾겠다고 하셨어요.”

미미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왜 람바스가 나를 선택했는지 알게 되었다.

‘……내가 좀 노력파이긴 하지.’

정확히 말하면 노력파였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를 개의치 않는 헌신적인 노력이 아니었다. 늘 정당한 결과를 바랐지만 바람대로 되지 않았을 뿐.

언젠가는 결실을 보리라는 막연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을 뿐이었다.

미미가 말을 이었다.

“그분의 재능과 철웅 님의 노력이 합쳐진다면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아…….”

그녀의 말이 내 머릿속을 후려쳤다.

과연, 틀린 말이 아니다.

내가 노력한 만큼 결실을 보지 못한 건 재능과 운이 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니까.

람바스의 능력을 얻게 된 지금 노력만 한다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을 터!

나는 아까 TV에서 보았던 S급 헌터들의 사냥 장면을 떠올렸다.

‘……역시 좀 귀찮네.’

이번에야말로 몸을 일으켜 침대로 올라갔다.

“한숨 자고 나서 생각해 볼게.”

귓가로 미미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3

눈을 떴을 때 창밖으로 햇살이 비쳐들고 있었다. 어느새 아침이 된 모양.

하긴 어제 침대에 누운 시간이 저녁이었으므로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인 것은 밥상을 테이블 삼아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는 미미였다.

아직도 그녀만 한 미녀가 내 집에 있다는 것이 적응되지 않는다.

깨끗한 방안을 둘러보는 것만으로 폐가 깨끗해지는 것 같았다.

기척을 느꼈는지 미미가 돌아보았다.

“주군, 깨셨어요?”

“응. 너는 뭐해? 여태 안 잤어?”

“잤어요. 벌써 아홉 시인걸요. 주군은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열두 시간이나 주무시다니.”

“음…….”

열두 시간을 자는 것은 게으름뱅이에게 퍽 대단한 일이 못 된다.

자도 자도 또 자고 싶은 것이 게으름뱅이의 습성이니까.

“잤다니, 어디서?”

나는 뭔가 위화감을 느끼고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뭔가 둥그런 것이 빠져나간 흔적이 있다.

그녀가 내 침대에서 잠을 잤다는 말인가?

아뿔싸!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고 쿨쿨 잠만 잤다니!

물론 깨어 있었더라도 귀찮아서 터치를 안 했을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미미는 나와 한 침대에서 잔 것쯤은 별일 아니라는 듯 다른 화제를 꺼냈다.

“주군이 주무시는 동안 이곳 세상에 대한 정보를 모았어요. 어떻게 하면 주군이 하루라도 빨리 능력을 되찾고 지구를 통할할 수 있을까 계획을 세워보았어요.”

“응?”

그 귀찮은 짓을 내가 왜? 내가 왜 지구를 통할해야 하는데?

내 바람은 여전히 C급 헌터가 되는 것이다. 그 이상 등급이 되면 귀찮은 일이 많아진다.

커다란 능력에는 커다란 책임이 따른다니.

나 참, 소름 끼치는 소리가 아닐 수 없다.

생각한 것을 입 밖에 꺼냈다가는 미미가 실망할 것 같아 잠자코 있었다.

미미가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첫 번째는 각성 검사를 받는 거예요. 일단 각성 판정을 받고 6개월 후에 등급 검사를 거쳐 헌터가 되는 게 이곳의 시스템이니까요. 이곳 사람들은 신체 능력은 별것 없지만, 시스템을 만드는 일에는 나름 능숙한 것 같아요.”

‘각성 검사라…….’

확실히 필요한 일이기는 하다. 각성 검사를 받고 나서 6개월이 지난 다음에 등급 판정을 거쳐야 정식 라이선스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 특히 그렇다.

물론 기준이 6개월이고 그 전에 능력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각성자들은 라이선스를 받아 곧장 헌터 일을 시작하기도 했다.

“받아야지…… 언젠가는…….”

“‘언젠가는’이 아니죠~ 오늘 가셔야죠.”

“뭐?”

열두 시간이나 잤어도 침대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제멋대로 결정을 내린 미미는 훌렁훌렁 입고 있던 옷을 벗더니 귀여운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주군도 얼른 준비하세요.”

그녀는 허공에서 화장 도구를 꺼내어 메이크업을 시작했다.

그녀가 살던 행성에는 같은 화장법이 존재하지 않았을 텐데, 적응하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인벤토리 안에 거울이 있는 것인지 허공을 보면서 척척 능숙하게 화장했다.

“하아아~~~~”

이게 얼마 만의 외출이지?

나는 미치도록 귀찮은 마음과 씨름하며 욕실로 향했다.

4

이상한 일이다. 막상 몸을 움직이니까 생각보다 귀찮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이전과 엄청나게 달라진 신체 능력 때문이라고 느꼈다.

몸이 정말이지,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가볍다.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산뜻한 기분이 들 정도니까.

‘이게 재능의 차이로구나…….’

람바스의 능력은 이제 겨우 조금 내 안에 자리 잡았을 뿐이다.

현재는 그저 발아 단계에 불과하다. 헌터 라이선스를 받는 과정이 ‘각성 판정’과 ‘등급 판정’으로 나누어진 것도 그런 이유였다.

각성한 다음에 능력이 제대로 자리 잡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니까.

헌터 능력을 발휘하게 된 다음에도 그것을 계발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사냥을 하면서 경험을 쌓는 것.

“주군은 자동차가 없으니까 걸어가야겠네요. 차라리 뛰어갈까요?”

미미는 아무렇지 않게 제자리에서 뛰는 시늉을 했다.

“뛰어간다고? 헌터 관리소까지?”

가장 가까운 헌터 관리소도 자동차로 30분은 걸린다. 이동 개념이 어떻게 되어 있는 것인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방금 예쁘게 차려입고 메이크업까지 했는데 땀을 흘리는 게 싫지도 않나?

그 전에 너 그렇게 짧은 치마를 입고 잘 뛸 수 있겠어?

“택시 타면 돼. 저기 큰길로 가서 택시 잡자.”

“주군은 람바스 님의 능력을 각성했는데 사용해 보고 싶지 않으세요? 막 달리고 싶다거나 몬스터를 때려눕히고 싶다거나 하지 않으세요?”

“응, 전혀.”

미미는 고개를 돌리고 “칫.” 소리를 냈다.

아마 얼렁뚱땅 나를 속이려고 했던 모양인데 람바스 같이 게으른 놈이 뛰는 걸 좋아했을 리 없다.

그의 능력이었다면 차라리 순간이동을 했을 것.

그전에 외출 자체를 꺼렸겠지만.

미미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솔직히 각성한 뒤에 몸을 움직이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일이었다.

아주 약간이지만 달리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지금이라면 몇 시간 정도는 충분히 지치지 않고 달릴 수 있을 테니까.

큰길로 나가 택시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너 철웅이 맞지?”

고개를 돌리자 낯익은 남자 하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생각나자마자 조건반사처럼 이마가 팍 찡그려졌다.

‘하필이면…….’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인간이랑 만나다니.

일 년 만에 외출하는 건데 왜 초장부터 이렇게 기분이 잡쳐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놈의 이름은 이근수.

고등학교 동창이다.

제 딴에는 나를 라이벌로 생각하고 늘 깐죽거리던 놈이었다.

나는 놈의 희생양이었다.

항상 고만고만하게 뒤처졌던 존재.

놈은 죽도록 노력해도 자신을 이기지 못하는 나를 보며 우월감을 드러내곤 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로 한동안 보지 못했다가 자취 집을 옮기고 나서 동네에서 마주쳤다.

친하게 지낼 마음이 전혀 없는데 이렇게 마주칠 때마다 말을 걸곤 했다.

“이야~ 너 오랜만이다? 하도 오랜만에 봐서 못 알아볼 뻔했어. 인상이 전이랑 많이 달라졌는데? 예전에는 별일 없어도 실실거리고 다니더니, 지금은 눈썹이 확 처진 게 엄청 느긋해 보인다?”

“응, 반갑다. 그럼 이만.”

나는 놈을 무시하고 가던 길을 가려고 했다.

그런데 놈이 나를 놔주지 않았다. 원래 싫은 놈이지만 오늘따라 텐션이 올라 있는 게 영 거슬린다.

“오랜만에 봤는데 얘기 좀 하자~ 섭섭하게 왜 그래?”

이근수는 그제야 내 옆에 있는 미미를 발견했다.

뭐랄까?

놈의 표정이 드라마틱하게 변했다.

“어? 이쪽 분은…… 누구?”

뭐라고 대답하기가 애매해 가만히 있자 미미가 내 팔짱을 척 끼었다.

“주군은 제가 모시고 있는 분입니다.”

“……네?”

이근수가 멍한 표정을 짓는 걸 보고 내가 급히 말했다.

“얘가 요즘 사극에 빠져 있어서 말투가 좀 그래.”

“아…….”

미미가 뭔가 깨달았다는 듯 다시 말했다.

“철웅 님은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입니다.”

이근수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뭔가 제대로 이해한 것 같지는 않은데 어쨌든 심기가 불편해 보인다.

“설마…… 여자친구는 아니지? 아는 동생……?”

마치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말투였다.

미미가 얼굴을 붉혔다.

“여자친구라니…… 저 같은 게 어떻게 감히…….”

배배 몸을 꼬면서 내 팔을 조물딱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엄청 귀엽다.

진짜 람바스랑 미미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걸까?

이근수는 큰 충격을 받은 듯 휘청거렸다.

뭐가 됐든 내 알 바는 아니었으므로 몸을 돌렸다.

“나 갈게. 다음에 보자.”

“야! 조철웅!”

이근수가 이말 만은 꼭 해야겠다는 듯 속사포를 던졌다.

“나 헌터 됐다? 지금 각성 판정받으러 가는 길이야. 하하! 미안, 자랑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나는 고개를 돌렸다.

분명 나한테 말을 한 것이었을 텐데, 이근수의 시선은 명백히 미미에게 꽂혀 있었다.

항상 놈을 마주칠 때마다 불쾌감을 느꼈지만, 오늘은 평소의 몇 배는 되는 것 같았다.

‘미친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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