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8화. 데스윙(Death-wing)
신성로마제국을 제외한 빈 동맹을 이루는 모든 나라가 전쟁 중이었다. 6개국이 참여했다 해서 6국 동맹이라고도 불리는 이 빈 동맹은 가히 유럽의 패권국들은 모조리 망라된 것이었다.
따라서 누구도 패배를 상정하지 않았고, 설사 이기지 못한다고 해도 적당한 협상이 가능할 정도의 백중세를 예상했다.
그것도 모자라 빈 동맹 당사국들은 바다에서 조선에 맞서지 않고 자신들의 장기인 육지에서 맞아 싸우기로 결의까지 한 상태였다.
하지만 뚜껑이 열린 전쟁의 양상은 완전히 예상을 뒤엎었다. 조선은 홀로 에스파냐, 프랑스, 오스만, 러시아, 폴란드를 동시에 짓뭉개고 있었다.
잉글랜드가 뒤늦게 조선의 돕고 나섰다지만 그들은 프랑스 땅에 더 관심을 가진 모양새가 뚜렷했다. 그러니 지금의 판세는 조선 홀로 만들었다고 해야 옳았다.
그렇다고 조선이 포르투갈을 점령할 때처럼 막대한 병력을 투입한 것도 아니었다.
에스파냐에 투입한 5만의 대서양군 병력을 빼면 프랑스와 폴란드를 휘젓고 다닌 조선군은 겨우 1만 5천에 불과한 11장갑병단과 시크 여단뿐이었다.
더구나 그 중 5천의 시크 여단 병력은 조선 본토의 병력도 아니었고, 인도양에 위치한 조선의 해외영토에 속한 병력이었다.
그럼에도 그 단 두 개의 부대가 파리를 박살내고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를 결딴냈으며, 폴란드의 우쯔와 바르샤바를 뭉개고 세임의 슐라흐타들과 선거왕을 생포했다.
물론 그것이 가능해진 것은 온 유럽의 하늘을 제집 안마당처럼 헤집고 다니며 폭탄을 퍼부어대는 조선의 비행선들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유럽 사람들이 조선의 비행선을 데스윙, 그러니까 죽음의 날개라 부를까.
그런 조선의 비행선들에게 집중 공격을 받고 있는 오스만 제국은 나라의 존립 자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폐허가 된 도시들은 열거할 수 없이 많았고, 행정과 경제 시스템은 진즉에 허물어져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특히 폭격이 집중되고 있는 오스만 동부 지역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오스만인들은 대대적인 피난길에 올랐다. 그렇게 도주해가는 지역이 최악의 적성국으로 꼽히던 사파비 왕조의 땅이라는 것조차 무시할 정도로 조선의 폭격은 지독하고, 잔인했다.
그렇게 종파가 다른 오스만의 백성들이 몰려들고 있음에도 사파비 왕조는 다른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그저 내륙으로 파고들지 못하도록 변경 지역에 한해 피난 온 이들이 머물도록 제한했을 뿐, 그 이상의 행동은 일체 하지 않았다.
특히 사파비 왕조의 군대는 조선이 적대행위로 오해할 만한 그 어떤 행위도 금기시 되었다.
혹시라도 조선과 사이가 틀어져 오스만을 온통 불바다로 만들어놓고 있는 조선의 비행선이 자신들의 머리위로 날아올까 두려워한 까닭이었다.
오죽하면 사파비 왕조의 당금 지배자인 아바스 1세는 오스만과의 국경분쟁에 대비해 접경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대규모의 자국군을 후방으로 빼냈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군대에 오스만과의 국경으로부터 10km 안쪽으로는 아예 접근하지 못하도록 금족령도 내렸다. 자칫 조선군과 마찰을 빚을까 두려웠던 탓이었다.
누구도 할 수 없는 방법으로, 누구도 저지할 수 없는 무기로 응징해온 조선의 힘 앞에 온 유럽은 큰 충격과 함께 깊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발버둥이 신성로마제국을 이루는 여러 지방 중 한곳인 독일 지방에서 가장먼저 표출되었다.
독일 지방 귀족들이 빈 동맹의 주축국인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천명하고 나섰던 것이다. 더구나 독일지방 귀족들은 이 독립 선언 이전에 사신을 뽑아 리스본으로 파견하기 까지 했다.
신성로마제국이 조선과 벌이는 전쟁이 자신들과 상관없는 황실 독단의 결정에 의한 것임을 설명하고, 자신들에 대한 조선의 선처를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거친 기질로 인해 부러질지언정 휘지 않는다던 독일 기사들이 살아남기 위해 창을 거꾸로 잡고 고개를 숙인 셈이었다.
이번사태에서 조선은 일단 찍으면 모든 것을 말살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다.
파리가 그랬고, 모스크바나 바르샤바가 또한 그것을 증명했다. 도시 뿐만이 아니었다. 왕가도 무사하지 못했다.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는 몰살당해 사라졌고,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모조리 사로잡혀 조선으로 압송되었다. 폴란드의 세임을 이루는 슐라흐타들은 물론이고, 선거왕까지 잡혀갔다.
러시아의 경우엔 아예 대공가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모스크바가 철저하게 파괴되었으며 오스만은 나라 자체가 무너지고 있었다.
독일지방의 귀족들은 적어도 자신들의 영지가 오스만의 도시나 파리, 바르샤바, 또는 모스크바처럼 되지 않길 바랐다.
그것은 싸움에 나가 명예롭게 죽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살아남기 위해 이탈을 택한 이들이 있는 반면에 오스트리아 의회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실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연대를 강화하며 결사 항전을 결의했다.
그런 오스트리아 의회의 결심을 가장 단순하면서도 확고하게 알리는 포고문이 오스트리아 전역에 나붙었다. 그렇게 붙은 포고문엔 ‘모든 것 또는 전무’라고 쓰여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모든 도시와 마을들에서 장정들의 징집이 개시되었다. 특히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이자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수도이기도 한 빈에서는 거의 모든 남성이 징집되었다.
바르샤바를 불태운 조선군의 다음목표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것은 누구나 예측하고 있었고, 그 첫 목표가 제국의 수도인 빈이 될 것이라는 점도 누구나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아니게 빈의 사방이 파헤쳐져 지하굴이 만들어지고, 건물들의 기둥이 강화되었으며, 흙주머니를 지붕으로 올려 보강하는 등의 조치가 취해진 것은 모두가 비행선을 이용한 조선의 폭격에 대비한 것들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빈을 비롯한 오스트리아 전역이 전쟁준비를 갖추며 탄탄해져가고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조선군은 신성로마제국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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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모스크바처럼 러시아는 대공국의 후예를 자처하는 공실도 함께 상실했다. 남겨진 러시아의 여러 지방 귀족들이 협의 끝에 리스본으로 사신을 보냈다.
러시아의 무조건 항복을 알리는 사신이었다.
프랑스에서도 각자 자신들이 신왕이라 주장하는 세 개의 귀족 파벌이 각기 리스본으로 항복 사신을 보내왔다.
그들은 조선이 나서서 잉글랜드의 침략행위를 막아달라는 청원까지 넣어놓았을 정도였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그들은 남부는 물론이고, 중부까지도 포기할 의향이 있었다.
폴란드는 실권 기관인 세임과 선거왕이 동시에 사라진 탓에 완벽히 혼란에 휩싸여 있었고, 에스파냐는 조선에 사실상 점령 상태였다.
오스만 제국은 파디샤인 아흐메트 1세가 직접 콘스탄티니예 앞바다에 떠 있는 이순신 함대로 찾아와 항복을 갈구했으나 무참히 거절당한 채 퇴함 조치되었다.
그로써 온 세상은 조선이 오스만 제국을 말살하려는 것임을 명확히 알게 되었다. 설마 하던 일이 현실화 된 것이었다.
그 사실에 유럽이 이전 보다 더한 경악에 빠졌다.
조선의 조치에 놀란 폴란드의 살아남은 귀족들이 황급히 모여 선발한 사신을 리스본으로 급파했다.
항복 사신이었다.
우스운 것은 이 과정에서 폴란드와 함께 연방을 이루었던 리투아니아의 항복이 빠져다는 것이었다. 폴란드 귀족들은 지난 전쟁에서 내내 비협조적이었던 리투아니아를 대변할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던 것이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급해진 것은 리투아니아였다. 자신들은 병력을 보내지 않아, 조선에 대항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곧바로 리투아니아 의회가 소집되어 선발된 사절이 리스본으로 달려왔다.
그들은 시작도 하지 않은 전쟁에서 패배했다면서 항복을 자인해 왔다.
가장 기가 막혔던 것은 그런 항복 릴레이에 네덜란드가 끼어들었다는 것이었다. 네덜란드의 사절단이 리스본을 방문해서 긴 조선과의 전쟁에 항복의사를 다시금 피력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 조선의 입장에서 네덜란드와는 전쟁 중인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장거리 순찰을 나가는 대서양 함대 소속 함선들에게 네덜란드 해안가의 구조물이 재건되었거든 모조리 격파사격으로 파괴하라는 명령이 떨어져 있을 뿐이었으니까.
그 상황에서 전달된 네덜란드의 항복 의사를 포함한 모든 나라들의 항복 의사가 리스본의 총독부를 통해 조선군 최고 사령부로 전달되었다.
무선전신을 통해 수두룩하니 받은 항복문서들을 앞에 둔 채 고심하는 광해에게 이항복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찌 그리 깊이 고심 하시나이까?”
“모조리 처 죽이자니 무고하게 죽어갈 이들의 목숨이 너무 많고, 살리자니 조선의 경고가 자칫 너무 얕지 않을까 싶어 그러함이다.”
광해의 답에 이항복이 다시금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이도 부족하고 저도 부족하다면 인의를 따름이 어떠하시겠나이까?”
“인의라······. 살려주라는 말이던가?”
“적의 수괴를 잡았으니 그 죄를 물어 엄벌에 처하시고, 어리석은 적국의 백성들은 가엽게 여기시어 선처하심이 어떠할까 하옵니다.”
“포르투갈의 일이 그리 오래지 않았고, 네덜란드에서 벌어지는 일도 경고가 되지 않았다. 이쯤에서 물러서면 다시 조선을 업신여기지 않는다, 장담하기 어렵다.”
“오스만을 용서치 않는 것이 그렇기 때문이옵니까?”
“오스만은······. 그쪽은 유럽과는 또 다르지. 기억속이 아니라 뼈 속에 새겨두어야 훗날 조선을 향해 이를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그리했을 때 어떤 결과가 기다리는지 그 핏줄 속에 각인시켜 둘 생각이니까.”
광해가 지칭하는 그쪽이라는 것이 단순히 아랍이라 불리는 지역만을 뜻하지 않는 다고 느낀 이항복이 의아한 음성으로 물었다.
“혹, 이슬람을 경계하시옵니까?”
광해는 종교에 관한한 자유정책을 택했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조선의 법을 위반하지 않는 이상, 혹세무민하여도 그냥 방관했을 정도로 광해는 종교에 대해 관대했던 것이다.
그런 광해의 종교 자유정책에 따라 조선에도 이슬람 사원이 있었고,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그들 중엔 조선에 귀의한 아랍인들도 있었지만 그들에게 영향을 받아 이슬람으로 개종한 조선인들도 상당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뿐인가, 당장 제후국 중 한곳인 카자흐만 가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슬람을 믿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허락하고 관망하기만 하던 광해가 이슬람을 경계하는 듯 하니 의아했던 것이다.
그런 이항복에게 광해가 말했다.
“폐쇄적인 이슬람과 다혈질인 아랍인들의 기질이 만나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으니 하는 말일 뿐이다. 도제조는 그저 짐의 걱정정도로 알면 된다.”
더 이상 깊은 관심을 끄라는 의미가 풀풀 풍기는 태왕의 말에 이항복은 입을 다물고 허리를 굽힐 수밖에 없었다.
“예. 명을 받드옵니다. 폐하.”
순순히 허리를 숙이는 이항복에게서 시선을 돌린 광해가 서탁 위에 수북이 놓인 항복 문서들을 무거운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이 전쟁을 시작하기 이전에 이순신은 결코 2개 병단 이상의 조선군을 유럽으로 파견해서는 안 된다고 신신 당부하고 전선으로 떠났다.
이순신이 고한 조선군의 실상은 대규모 병력의 해외 원정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미 수년째 원정에 원정을 거듭하고 있는 해병대는 지쳐있었고, 각지에 주둔한 육군은 움직일 여유 병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남은 것은 예비군을 동원하는 방법뿐이었는데, 일전에 동일본 사태 때 동원했던 예비군으로 인해 발생한 노동력 저하사태가 빚은 후유증은 아직도 제대로 치유되지 않고 있었다.
마치 밀착되어 돌아가던 톱니바퀴들 중 몇 개를 강재로 뺐다가 제멋대로들 돌아간 뒤 다시 낀 것처럼 수개월이 흘렀음에도 사회 전반이 온전해지지 않았던 것이다.
국토부와 농업부, 그리고 산업부는 그 모든 것이 정상화 되는데 2년을 예상했다. 그런 조선의 유연성 부족은 여유 인력 없이 너무 빡빡하게 돌아가는 조선의 산업구조 때문이었다.
이순신의 우려가 아니어도 광해는 국가의 운명이 걸린 것도 아닌 해외원정에 다시금 예비군을 동원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결심을 굳힌 광해가 총리대신과 자리를 비운 이순신을 대신해 조선군을 지휘하고 있는 삼군 총사들을 침전으로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