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6화. 테르시오 방진
에스파냐에 맞서는 대한제국 포르투갈 원정군은 5개 여단을 잉글랜드가 지원한 2만의 병력과 섞어 점령지 각지에 보내 포르투갈 점령을 공고히 했다.
아울러 10개 여단을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접경 지역에 배치하고, 9개 여단을 예비 병력으로 삼아 에스파냐의 무력도발에 대비했다.
이 당시 원정군 지휘부 안에서는 선공에 대한 이야기들이 자주 나오고 있었지만 이순신은 에스파냐 내부에서 산발적인 전투를 치르며 전쟁을 오래 끌 생각이 없었다.
그는 에스파냐군과 대규모 결전으로 적의 주력을 격파하고 무주공산과 다름없어질 에스파냐를 관통하여 펠리페 3세를 생포, 에스파냐의 항복을 받아낸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비 병력으로 삼은 9개의 여단에는 간신히 1만 여필의 말을 구해 완전히 기마대로 변모한 ‘해병 기마대’ 2개 여단과 기동마차에 탑승한 1천의 시크수색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순신은 에스파냐의 대병을 격파한 직후 그들을 마드리드로 급파해서 펠리페 3세를 사로잡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대한제국군이 에스파냐의 대병을 기다리던 11월, 드디어 에스파냐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스파냐군을 지휘하는 페르디난트 공작은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으로 말하자면 왕족인 셈이었다. 고귀하게 자라난 출신 성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에겐 또 다른 별명이 하나 따라다녔다.
바로 ‘전장의 여우;’였다.
다수의 전장에서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그가 이번 전쟁의 지휘를 맡았던 것이다.
그런 페르디난트 공작은 우선 이베리아 연합군의 패배 원인을 분석했다. 그것으로 적군의 실체에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까닭이다.
그 과정에서 페르디난트 공작은 대한제국군으로 불리는 적이 가진 화력적 우세를 명확히 파악했다. 그것은 에스파냐는 물론이고, 유럽 어느 나라도 갖지 못한 것이었다.
따라서 대한제국군을 상대하려면 화력전으로 전쟁이 흘러가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했다.
아울러 적군의 한 지점을 집중 공략해서 병력적 우세로 승리를 쟁취한다는 카바네야스의 전술이 나름 잘 선택되었다는 것에도 동의했다.
다만 적을 끌어내려 시간을 허비한 것이 실책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허비한 시간이 적으로 하여금 이베리아 연합군의 의도를 파악하게하고 역으로 함정을 팔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페르디난트 공작은 전격전을 구상했다. 물론 적정정찰을 충분히 하고, 인적 첩보망을 십분 발휘해서 대한제국군이 상당 규모의 예비 병력을 운영한다는 것을 파악했다.
따라서 페르디난트 공작은 그 예비 병력을 분산시킬 작전을 짰다. 2천의 에스파냐군과 3천의 용병을 묶어 5천으로 이루어진 별동대 4개를 구성해 그중 하나를 포르투갈 북부와 접경을 이루는 오우렌세로 이동시켰다.
이 오우렌세 서쪽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국경으로 삼고 있는 작은 언덕들이 줄지어 있는데 예로부터 언덕 너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잘 몰랐다.
에스파냐군은 그 지형적 특징을 활용하기로 했다.
오우렌세로 이동한 별동대는 대부분이 손재주가 좋은, 말하자면 공병들이었다.
그들은 오우렌세에 도착하자마자 인근 숲에서 나무를 베어 커다란 공성무기를 수없이 만들기 시작했다.
바로 트레뷰셋이었다.
장거리 공성무기의 대표적인 이 무기는 1608년인 이 시대에서 보기에도 상당히 구시대적 무기체계였다.
큰 바위나 돌무더기를 발사하는 이 공성무기의 사거리는 평균 3백M 안쪽이라 병사들이 보기에는 언덕을 넘지도 못할 것이 뻔했다.
그런 트레뷰셋을 한두 개도 아니고 수십 개씩이나 왜 만드는지 병사들은 좀처럼 이해하지 못했다.
병사들의 궁금증이 풀어지기 시작한 것은 기술자들로 보이는 이들이 도착하면서부터였다.
이들은 병사들을 지휘해 트레뷰셋의 높이를 키우고 지렛대역할을 하는 무게추의 크기를 키웠다.
그렇게 만들어진 트레뷰셋의 크기는 일반적인 트레뷰셋의 서너 배 이상의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 크기만큼이나 무거운 무게추를 사용함으로써 사거리를 늘려놓았다는 뜻이었다.
트레뷰셋이 완성된 직후, 마치 시간을 맞춘 것처럼 대량의 도자기 항아리가 도착했다.
지휘관들은 그 도자기 항아리에 오우렌세와 주변 도시들에서 징발한 기름을 채웠다. 묘한 것은 그렇게 기름을 채우면서 무게를 쟀다는 것이다.
일정한 무게에 도달하면 공간이 남아있어도 기름 채우기를 중단했다. 그렇게 준비된 도자기 항아리의 개수가 수백 개에 달했다.
기술자들이 이것저것 계산해서 결정한 거리에 50대의 트레뷰셋을 늘어놓고, 그 주변에 수백 개의 기름 채운 도자기 항아리를 쌓았다.
그런 트레뷰셋 뒤로 병사들이 길게 늘어섰다.
전투준비를 끝마친 병사들의 눈에는 벌판을 길게 가로지른 나지막한 언덕과 그 언덕 너머 파란 포르투갈의 하늘이 들어왔다.
며칠 전부터 하늘에 높게 떠있는 작은 풍선이 그런 하늘 가운데 덩그러니 자리해 있었다.
풍선이 떠 있는 거리상 전선에서 훨씬 후방에 해당할 듯싶었다.
그 말은 풍선을 포르투갈 백성들이 띄웠다는 뜻이다. 전쟁이 일어나 나라가 풍비박산 나서 외국에 점령된 상황이건만 풍선이나 띄우고 노는 포르투갈 사람들을 에스파냐군 병사들 이해할 수 없었다.
지휘관들도 그런 포르투갈 사람들을 비웃기만 할 뿐 망원경으로 그 풍선을 확인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정신 빠진 포르투갈 사람들이 놀이삼아 띄워두었을 풍선이나 살피고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긴장한 병사들 사이에서 나팔이 불고, 일제히 트레뷰셋 운용병들이 기름 채운 항아리를 장전했다.
정찰에 의하면 대한제국군은 언덕 너머 개활지가 시작되는 부분에서 1백M정도 후방에 진지를 구축했다.
현재 트레뷰셋과 언덕과의 거리가 3백M, 언덕과 그 경사면의 폭이 1백M. 다시 대한제국군 진지까지 1백M의 거리였다.
따라서 에스파냐군의 트레뷰셋이 대한제국군에게 피해를 입히기 위해서는 5백M 날아가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병사들은 회의적이었다. 아무리 크기를 키웠다지만 그만큼 날아갔다는 트레뷰셋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병사들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굳은 표정의 지휘관들의 신호에 맞춰 장전된 기름 항아리에 불이 붙여졌다.
그리고.
장군의 수신호에 맞춰 50대의 트레뷰셋이 일제히 발사되었다.
에스파냐군 병사들의 긴장된 눈길을 받으며 하늘 높게 떠오른 불붙은 도자기 항아리들이 언덕을 넘어 날아갔다.
스치듯 언덕을 넘어 날아가는 불붙은 도자기 항아리들의 모습에 긴장어린 표정으로 지켜보던 에스파냐 병사들 사이에서 탄성이 나왔다.
와아.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였던지 주먹을 불끈 쥔 지휘관들이 기쁜 미소를 머금고 소리쳤다.
“재장전 하라!”
에스파냐군 지휘관들의 고함소리에 트레뷰셋 운용병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조선군 편제상 해군에는 함대의 기함에 1개 비행대, 2개의 열기구가 배치되지만 육군에는 병단에 하나씩, 해병대에는 여단에 하나씩 비행대가 배치된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해적함대에 당한 이후 조선군은 정찰의 중요성을 뼈에 새겨두었다.
전투에서 패배한 장수는 용서해도 경계와 정찰에서 실패한 장수는 용서치 않는다는 문구가 조선군 각 총사부 건물에 크게 새겨져 있는 것도 바로 그러한 경험 때문이었다.
그런 조선군 편제에 따라 구성된 대한제국군 해병대도 마찬가지로 1개 여단에 하나씩 비행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상당수의 고위지휘관이 대부분 조선군 출신인 까닭에 그런 비행대의 운영과 강박관념에 가까운 정찰 우선주의는 그대로 대한제국군 해병대에 전해져 있었다.
그로인해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국경지대에 배치된 해병대 10개 여단은 모조리 전방에서 일정거리를 띄운 후방지역에 별도의 경호대와 함께 비행대를 운용했다.
따라서 접경지역에 배치된 대한제국 해병대는 비행대에서 전해져 오는 정보로 거의 실시간 단위로 적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오우렌세 지역을 맡고 있던 117여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트레뷰셋의 사거리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인근 지역의 점령군으로 임무를 수행중인 잉글랜드군 지휘관으로부터 얻은 정보였다.
그 정보에 의하면 트레뷰셋은 결코 3백M 이상 바위를 날릴 수 없었다. 그 정보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그것을 대량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에서 정충신은 불안감을 느꼈다.
따라서 그는 에스파냐군이 곧 공격을 할 것 같다는 비행대의 보고를 받은 즉시 병력을 진지에서 빼내 1백M 후방으로 물렸다.
트레뷰셋의 사거리에 대한 정보를 함께 들었던 참모들도 그런 여단장의 결정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은 그들도 일말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정은 곧바로 보상을 받았다.
언덕을 날아 넘어온 불붙은 항아리들이 정확히 조선군 진지주변에 떨어졌던 것이다.
불붙은 기름 항아리의 파괴력은 생각 외로 강력했다. 떨어져 깨어지는 순간 안에 든 기름이 퍼지면서 일대를 완전히 불바다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지를 구축하며 파놓은 참호도 다르지 않았다. 참호 안으로 흘러내린 기름에 불이 붙으며 온통 불바다가 된 것이다.
그 안에 병사들이 있었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광경을 바라보는 병사들과 지휘관들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을 정도로 에스파냐군의 트레뷰셋 공격은 굉장했다.
“포격은······. 여전히 어렵겠지?”
여단장인 정충신의 물음에 포병대장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각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곡사가 가능한 삼포와 달리 이포의 최대 포각으로는 언덕을 넘기에 부족합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조선 육군에서 전환배치 된 포병대장의 답에 고개를 끄덕이는 정충신의 표정엔 아쉬움이 짙었다.
에스파냐구의 이상한 움직임을 포착했으면서도 포격을 통한 위험제거를 시도하지 못했던 연유가 바로 이포의 포각 한계 때문이었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사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적을 진즉에 포격했을 테니까.
“포격 다음엔 돌격일 테지. 애들 숨겨놔. 저들이 이쪽이 피해를 입었다고 판단하고 돌격해서 언덕을 넘어 내려오는 순간, 지옥을 선사해 줄 생각이니까.”
“예. 여단장님.”
복명한 단장들이 병사들을 숲에 숨기는 동안 포병대장도 포들을 숲 안으로 숨기도록 지시하고 있었다.
근 30분간 수없이 많은 불붙은 기름항아리를 날려 보낸 에스파냐군이 사격을 멈추고 정찰병을 언덕위로 올려 보냈다.
언덕위의 정찰은 조심해야 했다.
대한제국군 저격수들이 언덕위로 올라서는 에스파냐군 정찰병들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 쏘아 죽였기 때문이다.
그 탓에 에스파냐군 정찰병들은 언덕 정상부위에 도달하기도 전에 엉금엉금 기기 시작해 조심스럽게 언덕 위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였다. 시간이 지체되면 어디서 총탄이 날아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잠깐 확인하고 자리를 옮겨 잠깐 다시 고개를 내밀어 확인하길 두어 번, 정찰병들이 내려와 보고했다.
“대한제국군 진지에 화염이 가득합니다. 피해가 막심한지 움직임들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정찰병들의 보고에 회심의 미소를 지은 장군이 지시했다.
“병력 전개.”
곧바로 지휘관들이 고함을 치며 병사들을 진출시켰다. 에스파냐군 병사들이 창과 칼, 그리고 총을 움켜쥐고 언덕을 향해 출발했다.
질서 정연한 에스파냐군 병사들의 움직임은 일정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바로 그 유명한 테르시오 방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