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185화 (185/325)

제185화. 2차 파병

경부선이 완공되자마자 광해는 사전에 대량 제작해 두었던 증기기관차와 화차들을 곧바로 투입해 적체되었던 화물의 운송을 철도에 맡겼다.

가장 많은 소비가 일어났던 한성으로의 화물 수송에 활력이 생긴 것이다. 적체되었던 대량의 물자들이 한성으로 속속 수송되면서 다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한성에서 현재 새도읍 건설이 한창인 신의주까지 연결하는 경의선 철도가 완성되면 그것은 더 확대될 것이 분명했다.

경의선은 경부선보다 1년 늦게 착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완공까지 3개월을 남겨두고 있었다. 태왕이 계획보다 더 많은 인력과 장비를 투입하면서 독촉한 결과였다.

뿐만 아니라 경의선과 함께 착공했던 신의주와 서경을 잇은 서경선도 6할의 공정률을 보이고 있었다.

서경선이 완공되면 조선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살고, 그만큼 많은 물산이 소비되는 서부 3도로 향하는 수송로가 철도로 대체되는 첫발을 딛게 되는 것이었다.

광해는 올해 초, 하북도의 서경에서 산동도의 제남을 거쳐 강소도의 소주까지 연결되는 서부선의 공사를 시작했다.

서경선에서 서부선으로 연결되는 철도망이 완성되면 부산포에서 소주까지 연결되는 철도화물 운송망이 형성되도록 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올해 초에 사전 계획대로 평양에서 백력으로 연결되는 동간도선도 착공되었다. 연일 식량수송량이 증가세인 삼강평원의 곡물들을 철도를 통해 운반하기 위한 것이었다.

유럽 전쟁에 막대한 전비가 소요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규모 철도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까닭에 유럽을 상대로 거둬들여 쌓아두었던 재정의 상당량이 소모되고 있었다.

뿐인가 각 제후국들에게 무상, 유상 차관이 대량으로 제공되고 있었다. 제후국들에게서 걷어 들인 세폐만으로는 만족할 만한 산업화를 이끌어 갈 수 없었기 때문에 내려진 조처였다.

유럽과 교역에서 쌓아 두었던 재정수익만으로는 감당할 수 있는 범위는 진즉에 넘어 섰던 것이다. 그럼에도 조선이 막대한 재정지출을 감당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도가 섬의 금광과 이와미 은광을 온전히 보유한 덕이었다.

거기다 제후국들을 상대로 한 막대한 교역물량에서 들어오는 수익 또한 상당했다. 최근엔 이미 유럽과의 교역에서 거두던 수익을 넘어선 상황이었다.

하긴 제후국들에게 풀려나가는 물량 자체가 이미 유럽과의 교역물량을 훌쩍 뛰어넘고 있었으니까.

그 시점에서 광해가 유럽에 대한 2차 파병 안을 거론하고 나섰다. 공교롭게도 이 날은 포르투갈에서 대한제국 해병대 제111여단이 카바네야스가 지휘하던 이베리아 연합군을 격파한 날과 동일했다.

그렇다고 이역만리 떨어진 포르투갈에서의 전투 결과를 광해가 보고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럴만한 수단을 이 시점에는 조선이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광해가 2차 파병 안을 꺼내 들 수 이었던 것은 그가 이미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관계는 물론이고, 합스부르크 가문과 연결된 이 당시 유럽 내 여러 나라의 역학관계에 관해서도 일정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모두 현대시대에서 얻었던 지식에 바탕을 둔 정보였다.

따라서 포르투갈 전쟁에 에스파냐가 발을 담글 것도, 또 그럴 경우 유럽 내 여러 나라가 이 전쟁에 참여할 것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광해는 2차 파병의 필요성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별도로 병력을 준비하지 않았던 것은 제후국들이 미래회의에 참석하러 왔던 후계자들과 함께 보내왔던 병력들로 구성된 대한제국 육군의 존재 때문이었다.

사실 그들은 신세계 점령에 활용할 자원으로 준비된 병력이었다.

하지만 광해는 우선적으로 유럽 전장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에 대해 광해가 각 제후국에 상황을 설명하는 사신들을 보냈다.

조선 외교부 관리들의 걱정과 달리 제후국들의 반발은 나오지 않았다.

애초의 약속과 그 쓰임이 달라졌다고는 해도 감히 조선의 태왕에게, 제국의 황제에게 항의할 간 큰 제후국은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신을 통해 대한제국 황제인 광해가 전한 말 때문에 반발은커녕 상당한 지지가 제후국들 사이에 돌기도 했다.

포르투갈을 조선령이 아니라 대한제국령으로 삼을 것이며 그곳을 12개 권역으로 나누어 조선과 11개 제후국들이 실질적으로 다스리게 할 것이라는 점을 광해가 밝혔던 것이다.

한마디로 유럽에 제후국들이 다스리는 해외 영토가 생긴다는 의미였다. 그것을 거부할 제후국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명과 후금, 할하, 나고야 같은 경우는 추가적인 파병도 가능하다는 뜻을 보내왔을 정도로 적극적이기까지 했다.

따라서 조선은 귀환한 11함대와 13함대는 그대로 보급품을 실어 보내고, 30개 무역선단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수송단에는 다시 9만의 병력을 추가로 실어 보내기로 계획되었다.

그것을 위해 훈련을 마친 대한제국 육군 12개 병단은 동래에서 부산포로 이동하여 대기시켰다. 사실 이 병력은 현역에서 퇴역해 예비물자로 보관되어 있던 가총과 일포로 무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유럽 전선에서 활동 중인 대한제국 해병대가 나총과 이포로 무장되어 있다는 것에 따라 보급의 원활함을 위해 동일한 무장으로 개편하기로 결정되었다.

그에 따라 최근 조선 육군 각 전단들에 다총과 삼포가 배치되기 시작하면서 회수된 나총과 이포를 이관하여 재무장 시켰다.

새 무장에 대한 적응을 위해 부산포의 훈련장에서 연일 대한제국 육군의 훈련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시점에 광해는 기밀 연구시설에서 매일같이 연구원들과 함께 새 기술에 대한 연구개발에 매진하고 있었다.

조선에는 3곳의 기밀 연구시설이 존재했다.

첫 번째는 증기연구소 부설 기관이었다가 분리된 내연기관 연구소였다.

이곳에서는 내연기관은 물론이고, 내연기관에서 사용될 연료에 대한 채굴과 정제 방법들에 대한 연구도 함께 진행 중이었다.

이미 상당한 진척을 보이고 있어서 수년이래로 초보적인 내연기관이 개발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었다.

두 번째는 화학 연구소에서 특정분야가 분리된 것으로 명칭은 폭발물 연구소였다. 주 연구 분야는 무연화약과 각종 폭발물의 연구 개발이었다.

무연화약의 경우 이미 면화약과 여러 종류의 안정제가 개발 되어 실질적으로는 완성된 상태였다. 현재는 무연화약의 파괴력을 제대로 구현시킬 수 있는 입자 형태의 파우더로 제조하는 방법이 개발 중이었다.

그것이 완료되면 곧바로 장원의 포탄 개발조에 인계되어 무연화약을 사용한 총탄과 포탄 개발에 돌입할 예정이었다.

세 번째가 요사이 광해가 지극히 노력을 쏟고 있는 연구시설로 벼락 연구소라 불리는 곳이었다.

연구개발 품목은 바로 ‘전기’다. 사실 증기기관이 개발되면서 전기의 생성은 어렵지 않았다. 기초적인 지식을 기반으로 대번에 전기의 생산이 가능한 발전기는 만들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고압의 전기를 만들어 멀리까지 보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겠지만 일단 시험용으로 사용될 전기의 생성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현재는 그렇게 생산된 전기를 고압으로 만들어내는 방법과 멀리까지 전송하는 기술이 연구되고 있었다.

정작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렇게 생산된 전기를 활용하는 물품들의 개발이었다.

가장먼저 개발에 착수한 것은 전구였다. 대나무를 태운 재에서 추출한 탄소로 불실(필라멘트)을 제작하고, 이것을 높은 온도의 노에서 굽는 것으로 어느 정도 안정적인 불실을 만드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이것을 활용한 전구를 만들어 내는 것은 계속해서 실패하고 있었다.

전구를 진공상태로 만들어 밀봉하는 과정이 기술력의 부족으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근엔 진공 기술의 확충에 연구진들이 매달리고 있었다.

광해가 벼락 연구소에서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또 다른 연구과제는 전신(電信)이었다. 전기신호를 통해 거리가 떨어진 양측이 통신을 주고받는 방법인 전신의 경우 개발이 상당히 쉬웠다.

이것을 멀리까지 유지하는 방법은 별개였지만 광해는 그것을 심화개발하지 않았다. 그가 원한 것은 무선전신이었기 때문이다.

과거 현대시대에 있을 때 무선전신 동아리에 가입했던 경력은 광해로 하여금 무선전신기 개발에 부담 없이 뛰어드는 계기가 되었다.

더구나 음성이 아니라 단순히 모르스 부호정도의 단순 신호만 전달되면 되는 전신기의 개발이 일차 목표였기에 제작과정은 어렵지 않았다.

이것도 현대시대 동아리 활동 중에서 실제 역사에서 무선전신기를 발명한 마르코니의 전신기 재현활동에서 얻은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기초적인 기구들이라 제작과 설치에도 이당시 조선의 기술로 어려움 없이 무난히 완료되었다.

한데 그 시현은 생각처럼 수월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분명 기억속의 것과 동일하게 만들어졌음에도 수신기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광해가 벼락 연구소의 연구원들과 함께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매진하던 10월.

11, 13 수송함대와 함께 71기동함대가 부산포로 귀환했다. 3월 말에 출항했던 것이니까 7개월만의 귀환이었다.

그들이 귀환하고 며칠 후, 30개의 조선 무역선단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수송단도 귀환했다.

이들은 보름간의 선박 정비와 선원들의 휴식 후, 곧바로 다시 출항했다. 먼저 귀환한 11, 13 수송함대가 15만 톤에 달하는 보급품을 실은 채 부산포를 떠났다.

71기동함대가 다시 호위함대로 따라붙었다.

그로부터 5일 후. 9만의 대한제국 육군을 태운 대규모 수송단도 부산포를 떠났다. 이번에도 호위는 자체 호송함들로 이루어졌다.

대규모 수송단이 떠나던 날, 12수송함대와 72기동함대가 부산포로 입항했다.

이들도 보름간의 정비와 휴식이 주어졌다. 근거리 교역에 동원되었던 조선무역선들 중 나머지 1백 척이 그렇게 정비를 마친 12수송함대에 추가 배치되었다.

그렇게 150척으로 늘어난 12수송함대가 3만의 병력과 10만 톤에 달하는 보급품을 싣고서 부산포를 떠나 포르투갈로 향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12만에 달하는 대한제국 육군과 같은 수의 해병대를 포함 24만에 달하는 지상군 병력을 유럽전선에 투입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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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포에서 12수송함대가 출항하던 시점에 남부지역을 시작으로 개시되었던 대한제국 해병대의 포르투갈 점령이 4개월 만에 완료되었다.

포르투갈 내의 조직적인 저항이 카바네야스가 지휘하던 이베리아 연합군이 괴멸되면서 사실 상 종료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수의 영주들과 민병대가 저항을 하긴 했지만 그들로는 완전무장 된 대한제국 해병대를 막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포르투갈 전역이 점령되는 동안 에스파냐는 추가적으로 포르투갈 지역에 병력 파병을 하지 못했다. 어중간한 병력을 투입했을 때 축차소모 될 것을 걱정한 것이다.

대신 그 4개월여를 활용하여 에스파냐는 대량의 병력을 준비했다.

15만의 병력을 모으고, 그들을 훈련시켜 무장했다. 또한 그 기간 동안 오스트리아 대공국과 이탈리아 내 각 공국과 상인가문이 보낸 원군도 에스파냐에 차례차례 도착했다.

오스트리아 대공국은 3만의 병력을, 이탈리아 내 각 공국과 거대 상인가문들은 2만에 달하는 용병대를 파견했던 것이다.

그로써 에스파냐는 20만에 달하는 대병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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