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7화. 스위스 용병대
아쿼버스로 무장된 화승총병을 외곽에 두고 창병을 안쪽에 둔 테르시오 방진은 화력으로 접근하는 적에게 피해를 입히고, 본격적인 육박전에 돌입하면 안쪽에 있는 창병이 돌출하는 형태의 진형이었다.
에스파냐는 이 테르시오 진형으로 유럽의 여러 전장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 테르시오 방진을 이루고 언덕을 넘어 내려오는 에스파냐군에 속도가 붙었다. 언덕의 내리막이기도 했던 데다 빠른 접근을 원했던 지휘관들이 돌격을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인화물질들이 타면서 내는 화염과 연기로 자욱한 대한제국군 진지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언덕을 넘어 개활지로 나선 에스파냐군도 전열을 정비하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차츰 화염이 줄어들고, 그로인한 연기가 걷혀가자 지휘관들이 거침없이 진격을 명령했다.
출정 전에 페르디난트 공작에게 지겹도록 듣던 말이 바로 대한제국군에게 거리를 허용하지 말라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직 화염이 완전히 걷히지 않았음에도 방진을 전진시킨 연유였다.
화승총을 장전한 병사들이 일제히 총을 들어 올린 채 전진했다.
그 안쪽에 서 있던 창병들이 긴 장창을 수직으로 세워 들고 이동했다. 육박전이 펼쳐지면 수평으로 세워 적을 밀고 들어갈 장창의 길이는 4M에 달했다.
그렇게 전진한 테르시오 방진이 길게 쌓인 흙주머니 앞에서 멈춰 섰다. 무너트리고 전진하지 못한 것은 흙주머니 바로 앞에 깊게 파인 참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흙주머니는 이해한다. 대한제국군 총병들이 흙주머니 뒤에 숨어서 총을 쏜다는 것은 정찰병들을 통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랑의 존재는 에스파냐 병사들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깊이도 제법 되어서 내려서면 허리어림은 올 듯싶었다.
흙주머니로 쌓은 담장이야 무너트리고 전진하면 된다지만 도랑을 건널 때는 방진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도랑으로 흘러내린 인화물질들이 아직 불길을 내며 타고 있는 곳이 많아서 지금은 내려서기에도 어려웠다.
결국 흙주머니 앞에서 잠시 멈춰 서 있던 에스파냐군은 주변을 살폈다. 분명 정찰병들의 보고에는 대한제국군이 진주해 있다던 지역이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대한제국군 병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격렬한 트레뷰셋의 공격에 당한 시신들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그것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병사들에게 잠시 후, 전진명령이 내려왔다. 참호 안에서 불타고 있던 화염들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잔불과 열기를 죽이기 위해 흙주머니를 무너트려 참호 안으로 던져 넣은 에스파냐군 병사들이 방진을 흩뜨린 채 참호를 건너기 시작했다.
후열의 화승총병들이 참호 가장자리에서 사격자세를 취한 채 엄호하는 동안 반쯤 메워진 참호를 건넌 선두열의 화승총병들이 다시 사격선을 구성했다.
그들의 엄호 속에 창병들과 후열의 화승총병이 참호를 건넜다.
걱정과 달리 참호를 건너는 동안 아무런 공격도 가해지지 않았다는 것에서 조심스럽게 대한제국군의 퇴각 설이 힘을 받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불타버린 막사가 버려진 채 널려있었기 때문이다.
병력 전체가 참호를 건너 다시 방진을 공고히 하자 병사들의 안도감이 높아졌다. 에스파냐군 병사들 사이에서 적이 퇴각했다는 믿음이 퍼졌다.
적이 이 근방에 남아있다면 방진이 흩어졌던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들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에 병사들의 사기가 높았다.
지휘관들은 마지막 위험지역인 전방의 숲까지 확인 한 후, 병사들을 쉬게 하기로 결정했다.
“전진!”
명령이 떨어지자 에스파냐군 병사들이 테르시오 방진을 구성한 채 다시 진격하기 시작했다.
숲과 조선군 진지가 있던 자리와의 거리는 4백M 정도였다. 깊게 패인 바퀴자국들이 간간히 숲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에서 에스파냐군 병사들과 지휘관들은 대한제국군이 숲을 통해 퇴각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숲에 숨어있었다면 자신들의 진형이 무너졌던 순간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들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무방비 상태로 숲으로 진입할 수는 없었다. 숲에서 2백M를 남겨둔 지점에 방진을 세운 에스파냐군 지휘관들은 정찰병을 숲으로 들여보내기로 했다.
10여명의 정찰병들이 흩어져 숲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탕탕탕.
산발적인 총소리가 울린 숲이 조용해 졌다.
그것이 뜻하는 바를 알아차린 에스파냐군 지휘관들의 표정이 굳었다.
그렇게 굳어진 표정인 지휘관들의 눈에 일제히 숲 가장자리로 나서는 대한제국군이 보였다.
테르시오 방진을 구성한 채 대기하고 있는 에스파냐군의 숫자는 5천. 숲 가장자리로 나와 2단 사격자세로 늘어선 대한제국 해병대 병력도 5천.
숫자로는 동률이었다.
하지만 절반에 해당하는 숫자가 창병인 에스파냐군과 달리 숲 가장자리에 사격선을 구성한 대한제국군 병사들은 5천 전부가 총병이었다.
2백M를 사이에 두고 양측의 병사들이 마주선 채 대치했다.
평소의 습관이 부른 뼈아픈 실책이었다. 아쿼버스의 사거리는 50M에서 1백M, 적과 대치할 가능성이 있는 곳에 접근할 때면 항상 사거리 밖에서 정렬하고 정찰병을 내보내던 습관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발동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자신들과 마주선 대한제국군의 사거리였다. 수많은 전투에서 확인된 사거리는 최소 5백M였기 때문이다.
그것을 뒤늦게 떠올린 에스파냐군 지휘관들과 병사들 속에서 높은 긴장감으로 인해 마른 침 넘어가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현재 마주선 자리에서 에스파냐군이 보유한 아쿼버스로서는 무슨 짓을 해도 사거리에 닿지 않을 거리였기 때문이었다.
출병 전에 페르디난트 공작이 그렇게 주지시키던 ‘거리’를 허용했다는 자괴감에 지휘부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퇴각시키기에도 적의 사거리가 너무 길었다. 등을 보이고 도주하는 상태에서 총격을 받으면 그 피해는 감당할 수 없을 터였다.
그러니 에스파냐군에게 남아있는 방법은 싸워서 이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다급한 마음에 여기서 사격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봤자 총알과 화약만 허비하는 짓이 될 테니까. 그러니 확실한 사격거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전진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혼란을 수습한 지휘관들의 눈길이 마주치고, 이내 전진 명령이 떨어졌다.
“진군!”
그 명령에 따라 에스파냐군 병사들이 막 발을 떼었을 때였다.
“발사!”
대한제국군 군열 속에서 울려 퍼진 커다란 외침에 반응해서 곧바로 요란한 총소리가 따랐다.
타다다다다당.
막 진군을 시작한 에스파냐군 선두열의 병사들이 우르르 쓰러졌다. 당황하는 에스파냐군 병사들에게 생전 처음 듣는 소리가 들려왔다.
타드르르르륵.
마치 총탄이 빨랫줄 뻗듯이 무더기로 날아왔다. 현식총이다. 한곳에서 시작된 현식총 사격이 사방에서 퍼부어졌다.
에스파냐군 병사들이 무더기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퇴각시킬 수도 없는 상황. 결심을 굳힌 지휘관들의 입에서 커다란 외침이 터져 나왔다.
“돌격!”
군열을 무너트린 에스파냐군 병사들이 쏟아지는 총탄세례 앞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
죽음에 대한 공포를 함성으로 애써 누르며 달리기 시작하는 에스파냐군 병사들의 귀로 포격소리가 들려왔다.
쾅쾅쾅쾅.
순간 폭음과 함께 하늘로 떠오른 비격진천뢰가 허공에서 폭발했다.
콰쾅, 쾅.
무수한 쇳조각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비처럼 쏟아졌다. 돌진하던 에스파냐군 병사들이 그런 쇳조각들을 암울한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일반적인 공격과는 반대로 소총사, 현식총, 구포로 이어지는 대한제국군의 반격에 걸린 에스파냐군은 처절하게 싸웠다.
하지만 그들의 처절함은 자신들에게 국한되었을 뿐 적인 대한제국군에게 닿지 못했다.
돌격을 감행한 에스파냐군은 아쿼버스의 사거리인 1백M에도 접근하지 못한 채 5천에 달하는 병력이 전멸 당했다. 몸을 숨길만한 그 어떤 것도 없는 개활지에서 대한제국군의 일제사에 맨몸으로 달려든 대가였다.
막판에 도주를 택한 소수의 병사들조차 살아남지 못했던 것은 개활지를 길게 가로지른 참호 때문이었다. 그것을 넘는 과정에서 속도가 줄었고, 여지없이 대한제국군 병사들의 총격을 받았던 것이다.
이 전투로 에스파냐가 오우렌세로 투입한 전력은 소거되었다.
그들은 반격이 시작되었다는 신호는 줄 수 있었지만 해당지역이 위험하다는 인식을 조선군에 심어주는 것에는 실패했다.
오히려 에스파냐와의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는 확신만 대한제국군에 심어준 셈이었다.
정충신은 그것을 근거로 그간 포르투갈 국경을 넘지 말라는 지휘부의 지침을 어기고, 언덕으로 올라 정상부위를 점령하여 참호를 건설하도록 했다.
아울러 언덕에 포대를 설치함으로써 언덕 너머 에스파냐 지역에 대한 포격을 가능하게 했다.
이 전투의 결과와 추후 진행된 117여단의 에스파냐 국경 침범에 대한보고를 받은 이순신은 침묵했다.
사령부의 지침을 어겼으니 군법에 회부해야 한다는 일부 참모들의 주장에도 말이 없었고, 어차피 에스파냐와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 확인 된 이상 전 전선에 걸쳐 117여단처럼 유리한 지역을 선점하도록 명령해야 한다는 또 다른 참모들의 말에도 반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순신은 조공에 일희일비하고 싶지 않았다. 유인이 분명할 조공에서 거둔 승리로 전선 전체에 어떠한 신호도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적의 주공에 신경을 곤두세운 채 기다리고 있었다. 에스파냐군이 가다듬은 발톱을 세우고 달려들기를.
*****
에스파냐가 운용한 별동대는 모두 4개였다.
그중 1개의 별동대가 오우렌세에서 전멸당한 그 시점에 2개의 별동대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접경지대를 북부와 동부를 가르는 기점에 위치한 자모라에 집결해 있었다.
이탈리아 공국들이 보낸 스위스 용병들이 가세한 이 2개의 별동대에게 주어진 임무는 무자비한 돌격으로 대한제국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이곳을 주 공격 지점으로 오인하게 하는 것이었다.
에스파냐군이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카바네야스의 이베리아 연합군을 격파한 제111여단이 이 지역을 방어하고 있다는 정보 때문이었다.
에스파냐군 지휘부로써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111여단을 흔들어 놓아서 실추된 에스파냐군의 명성을 되찾을 필요가 있었다.
그것을 위해 이곳으로 파견된 에스파냐군 별동대는 스위스 용병대를 주축으로 한 용병부대였다. 지휘권조차 에스파냐군 장군이 아니라 스위스 용병대장에게 주어져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곳에 배치된 에스파냐군은 사실상 에스파냐군이 아니라 각국에서 모아들인 용병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부대의 지휘권을 쥐게 된 한스라는 스위스 용병대장은 자신의 임무를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
에스파냐군 총 지휘관인 페르디난트 공작이 자신들에게 원한 것은 싸워서 이기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들이 오로지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적이 이 지역을 반격의 주공으로 오인하게 하는 것만 성공하면 된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것을 위해서는 자신들을 갈아 넣어야 한다는 것도 한스는 알고 있었다. 한마디로 자살 공격에 동원된 셈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이지역의 작전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은 스위스 용병대의 처지 때문이었다.
합스부르크 가문과 프랑스 간에 벌어진 이탈리아 전쟁에서 스위스 용병대는 이전의 영광을 모두 잃었다.
수많은 전투에서 패배하며 유럽최강 소리를 듣던 전투력을 의심받았다.
그럼에도 스위스의 사내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여전히 용병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상황에서 스위스 용병대를 지탱하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믿을 만한 충성심과 불퇴의 의지였다.
이탈리아 전쟁 당시 교황을 끝까지 남아 지키면서 얻은 그 명성에 기대어 여전히 스위스 용병대가 고용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자살 공격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물러설 수 없었던 것이다.
이곳에 동원된 6천의 스위스 용병들은 그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에스파냐군의 명패를 달고 함께 온 4천에 달하는 잡다한 출신의 용병들을 믿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마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고 패색이 짙어지면 저들 중 대부분은 흩어져 도주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스는 스위스 용병대를 중심에 두고, 그 4천의 용병대를 좌우로 나누어 배치했다. 유사시 저들이 도주해도 스위스 용병대는 혼란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생각에서였다.
페르디난트 공작은 자신들이 여러 차례 파상 공격을 퍼부어 대한제국군에게 위험을 인식시키고, 이곳을 주공처럼 보이도록 만들길 원했지만 한스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전쟁에 발을 디디면서 수집한 수많은 정보에서 대한제국군은 인간의 군대가 따라잡을 수 없는 악마의 무기를 가진 군대였다.
수천 미터 거리에서 포를 쏘고, 수백 미터 거리에서 총을 쏘며, 총알처럼 하늘에서 쇠비를 내리고, 화염으로 온 지역을 불바다로 만드는 악마의 무기들을 말이다.
그것이 정말로 소문처럼 악마의 힘이 깃든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보다 월등한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것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실제로 그런 능력을 내는 것이냐가 중요한 것이었으니까. 만약 그 정보들의 반만 사실이어도 정면대결로는 스위스 용병대가 무슨 짓을 해도 이길 수 없었다.
스위스 용병대도 많은 변화를 거쳐 현대화 되었다. 과거 이탈리아 전쟁 때처럼 미늘창만 고집하지 않고, 화승총병도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것으로 간극을 메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한스는 단 한차례의 공격으로 모든 것을 걸기로 했다. 물론 환한 대낮에 월등한 화력을 가진 대한제국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일 생각은 없었다.
한스는 병력을 낮에는 최소한의 경계병만 세운 채 잠을 재웠다. 그리고 밤에 깨워 대기시키는 일을 반복했다.
특별한 말이 없었지만 온 용병대가 한스의 생각을 알아차렸다. 그렇게 몇날 며칠을 기다린 끝에 달이 구름에 가려진 칠흑처럼 어두운 밤이 찾아왔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한스가 주먹을 움켜쥐고 일어서 모든 병력에게 이동을 명령했다.
직접 선두에 선 한스의 지휘로 1만의 용병대가 3개의 집단으로 나누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달빛마저 가려진 어두운 밤은 그들의 이동을 완벽하게 가려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