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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184화 (184/325)

제184화. 제후국들의 산업화

카바네야스가 지휘하던 이베리아 연합군의 패전 소식은 에스파냐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더구나 그 패전을 안긴 병력이 겨우 5천에 불과했다는 사실에서 에스파냐는 높은 위기의식을 가졌다.

곧바로 에스파냐 전역에서 병력을 모으고, 총력전 준비에 들어갔다. 뿐만 아니라 동맹들에도 사신을 보내 원병을 청했다.

가장 먼저 구원을 요청받은 곳은 신성로마 제국이었다.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다스리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원병 요청을 받았던 신성로마 제국은 곧바로 제국의 힘을 기울여 에스파냐를 돕지 못했다.

오스만 제국과의 긴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데다가 황실과 보헤미아인들 사이에 분란이 생겨 언제 내전이 벌어질지 몰랐기 때문이다.

더구나 현재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인 루돌프 2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에서조차 신망을 잃은 상태로 그의 통치가 신성로마 제국 전역에서 지지를 얻고 있지 못했다.

그런 상황으로 인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오스트리아의 대공이기도 했던 루돌프 2세는 신성로마 제국 전체가 아니라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병력만으로 에스파냐를 돕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 펠리페 3세가 이탈리아의 여러 공국들과 거대 상인 가문들에게 구원을 청했다.

이 당시 이탈리아 내 여러 공국들과 거대 상인 가문들은 에스파냐 왕실의 최대 채권자들이었다.

따라서 만에 하나라도 에스파냐가 패망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 막대한 채권이 휴지조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만 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탈리아 내 여러 공국들과 거대 상인 가문들은 대량의 용병들을 고용해 에스파냐를 지원하기로 결의한다.

그렇게 유럽 여러 나라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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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에서 연일 전투가 벌어지던 시기, 대한제국은 제후국들의 산업화가 눈부시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 일련의 산업화는 대한제국과 포르투갈 간에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해인 작년에 시작되었다.

이미 제국의 황제와 제후국들의 군주들이 합의한 한양조약에 의거하여 만들어진 제국법들이 작년에 제국의회에 의해 하나둘 의결되어 반포되었다.

따라서 그 법들을 집행할 대한제국 정부 기관들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가장먼저 개설된 것은 광무5년인 작년 5월에 대한제국군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설립된 군사원(軍事院)이었다.

군사원은 초기 합의에 의해 각 제후국이 조선으로 보냈던 1만 씩의 병력으로 구성된 제국 육군과 현재 유럽원정에 나서있는 제국 해병대를 관장하는 기관이었다.

초대 군사원장은 지금 유럽 전장에서 포르투갈 원정군을 지휘하고 있는 이순신이 겸직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조선군 원수이면서 또한 대한제국군 원수이기도 했다. 일전에 애덤스 백작과의 만남에서 통역병이 이순신을 제국군 원수라 소개했던 것은 바로 그런 맥락이었던 것이다.

그런 군사원과 함께 개설되었던 곳이 바로 재무원(財務院)이었다.

대한제국의 세금 징수와 집행을 담당하게 될 이 재무원은 각 상단에서 은퇴한 재무회계 담당자들을 대거 고용하여 구성했다.

책상 앞에 앉아 펜대만 굴리던 관리출신들이 아니라 실물 경제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을 중심으로 구성한 것이다.

초대 재무원장에 기용 된 이가 최근 개발된 멸농을 쓰면서 몸이 많이 회복된 김억수가 기용된 것 만으르도 광해가 무슨 생각으로 재무원을 구성했는지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터였다.

재무원장으로 기용되던 작년에 이미 예순다섯 이었던 김억수를 광해가 세 번이나 찾아가 재무원을 맡아줄 것을 부탁한 일은 삼고초려의 고사에 빗대어 한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을 정도였다.

재무원이 설립된 직후 인 작년 7월, 처음 제국 징세가 이루어졌다. 재무원 세무관들이 각 제후국으로 파견되어 세폐를 걷어 들인 것이다.

세무관들은 각 제후국이 제출한 세폐 자료를 검토했다. 제대로 징수가 되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이 과정에서 동아시아 최대부국이라 불렸던 명의 1년 세폐가 철산단지를 보유한 남간도가 1년에 납부하는 세폐에 불과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후금과 남진, 거기다 조선에 기존 영토의 상당량을 뜯어 먹힌 상태에서이긴 했지만 기름진 강남의 대부분을 여전히 아우르는 명의 저력 상, 그것은 굉장한 충격이었다.

아울러 그것으로 조선의 경제력이 제후국들을 완벽하게 압도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물론 명을 비롯한 각 제후국들이 세폐를 온전히 신고하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앞으로는 전적으로 협력한다고 해놓고서는 뒤로 다른 주머니를 차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금이 아니라 다른 명목으로 세금의 일부를 대체해 거둬들이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던 것이다. 그것으로 제국이 거둬가는 세폐를 낮추고, 자국의 자금을 보존하려한 것이다.

각 상단에서 수십 년간 재무회계를 담당하며 잔뼈가 굵었던 세무관들의 눈이 그런 꼼수를 못 알아차릴 리 없었다.

곧바로 각 제후국으로 파견된 세무관들의 장계가 한성으로 빗발쳤다.

하지만 광해는 그런 제후국들의 움직임에 눈을 감았다. 처음부터 완벽한 협조가 이루어질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전무후무한 방법으로 결성된 제국이었던 까닭이다.

물론 카자흐, 북원, 할하, 준가르의 경우엔 조선군에 점령되었던 지역이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위구르와 티베트는 조선에 기대지 않고서는 독립을 유지할 수 없었고, 나고야와 동일본은 조선의 저력을 알기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명과 후금, 남진은 조선과 직접적으로 무력 충돌을 벌여 패망 직전까지 몰렸던 나라들이니 다시 저항을 택할 수 없기도 했다.

하나하나 떨어트려놓으면 협력할 수밖에 없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지만 뭉뚱그려 놓으면 없던 용기도 생기는 법. 그럼에도 아직까지 제후국들은 연합하여 조선에 대항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있었다.

광해는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었다.

어떤 신하들은 막강한 조선의 군력으로 아예 눌러서 속국이 아니라 조선의 강토로 삼아야 한다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현대의 지식을 가지고 있던 광해는 그것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강제로 편입된 나라들이 명분만 갖춰지면, 약간의 힘만 갖추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할 것인지를.

그것을 막기 위해 조선이 들여야 할 노력과 피를 광해는 감당할 생각이 없었다.

조금 강력한 구속력을 가진 연합 제국형태를 취함으로써 조선의 종주권만 인정받을 수만 있다면 제후국들의 독립적인 자치권은 얼마든지 인정해 줄 수 있었다.

그러니 초반에 벌어지는 그 정도의 반발은 웃으면서 넘길 수 있었다.

차츰 제국에 내는 세금의 효용성이 입증되면 개선될 것이라 믿고, 광해는 세무관들에게 각 제후국들이 보고한 것만 거둬서 귀환하도록 지시했다.

광해의 지시를 받은 세무관들은 각 제후국이 세폐만큼 준비해둔 은을 함께 간 징수용 장갑마차들에 싣고서는 귀환했다.

그렇게 귀환한 세무관들이 거둬들인 세폐로 재정원에서 제국의 재정을 짰다.

그렇게 짠 계획에 의거하여 이내 그 재정들이 각 제후국에 투입되기 시작했다. 제국의 재정은 두 가지 방향으로 집행 되었다.

첫 번째 방향은 걷어 들인 세금의 절반가량은 각국의 재량 재정으로 돌려주는 것이었다. 물론 그 금액은 각국에서 걷어 들인 세금의 절반을 넘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째 방향은 나머지 절반의 세금을 제국 회계로 편입시켜 각 제후국의 산업을 발전시키기는 것에 투입되었다.

제국 재정원은 이 과정에서 한 가지 원칙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바로 산업의 중복투자를 가능한 배제하려 한 것이다.

한 가지 실례로 후금에 철광이 적지 않아 철광산업과 제철소를 건설했다면 명에는 같은 사업을 가능한 대규모르 투자하지 않는 식이었다.

대신 명에는 양잠사업을 크게 번창시키고 아울러 증기기관 방직기를 대량으로 갖춘 방직사업장을 크게 지었다.

이런 식으로 가능한 각 제후국들의 주력 상품을 만들어 집중 투자했다. 제한된 자본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두기 위한 안배였다.

아울러 그렇게 분업화를 이룸으로써 제국 내 각 제후국들 간의 상호의존도를 높이고, 교역을 활성화시키고자 하는 의도도 깔려있었다.

생산 거점들을 그렇게 제후국들로 옮기면서 조선의 산업도 재편을 맞이하고 있었다.

양잠업과 방직소 같은 일차 생산 시설을 제후국으로 확산시키고 조선에서는 그렇게 생산된 옷감으로 옷을 만드는 산업만 유지했다.

그럼에도 양잠업과 방직소에서 감소한 일자리를 모두 옷 생산 공장이 흡수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공작기계와 증기기관 등 핵심 장비의 생산은 오로지 조선에서만 이루어졌다. 아울러 그 핵심 장비들을 가지고 여려가지 생산 설비를 제작하는 것도 조선에서만 행해졌다.

속된 말로 알맹이는 조선에 두고 껍데기는 제후국들에게 이전된 상황이랄까? 그럼에도 제후국들의 발전이 눈이 띄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제국의 재정이 투입된 사업이었지만 각 사업장들에 고용된 인부들은 모두가 현지의 백성들이었다.

채용은 노임의 지급을 수반한다. 그렇게 대량의 자금이 현지 백성들에게 풀리면서 제후국의 경제가 활성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급자족에 가까웠던 각 제후국의 경제가 분업화, 산업화를 겪으면서 백성들의 일자리가 늘어났다. 그렇게 늘어난 일자리들에서 소득이 생기면서 각 제후국 백성들의 소비력이 확장되고 있었다.

그 소비력에 의해 발생한 소비가 다시 제후국들의 산업 확대로 이어지면서 그것이 다시 제후국 백성들의 소득 증대로 연결되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후금과 명, 남진이 대표적이었다. 이들의 경제여건이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유목성향을 아직 버리지 못한 북원이나 할하, 위구르와 준가르에서는 그 영향이 아직 눈에 띄게 일어나지는 않고 있었지만 그 나라들에서도 정착 생활을 하는 이들이 차츰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라도 상황은 변할 수 있었다.

다만 나고야와 동일본의 경우엔 여전히 영주 위주의 봉건 정책을 견지함으로써 경제의 활성화를 막고 있었다.

티베트의 경우는 워낙 산골벽지가 많아서, 카자흐는 땅이 너무 넓어서 개발이 더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제후국들이 사용하는 물동량은 제국 제정 투입 1년만인 지난 7월 이미 5배로 증가했다. 그리고 그 증가세는 연일 확장세였다.

그래서인지 두 번째 징수가 벌어진 올해, 세무관들이 각 제후국들에게서 걷어 들인 세폐는 지난해의 5배를 훌쩍 넘고 있었다.

발전한 경제력 이상으로 세폐가 걷힌 것은 각 제후국들이 차고 있던 뒷주머니들 중 상당수를 내놓은 결과였다.

그들도 차츰 제국 재정이 투입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연일 발전중인 제후국들의 물동량 증가가 조선의 내부 문제까지 해결하는 기회로 활용되었다.

사실 이시기 조선은 내부적으로 상당한 문제에 봉착해 있었다.

30개에 달하는 조선 무역선단이 전쟁에 동원되면서 수출길이 막힌 탓에 생산된 물자들이 창고에 고스란히 재고로 쌓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막대한 재고물량이 제후국들에게 풀리면서 오히려 유럽으로 수출할 때보다 더 많은 물량이 제후국들에게서 소비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전쟁기간 동안 조선의 경제가 침체될 것이라던 조선 산업부와 재무부의 예상과는 달리 조선의 경제는 그 이전보다 더 활기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조선 경제의 성장률도 유럽과 교역할 때보다 훨씬 가파르게 치솟고 있었을 정도였다.

다만 그 물동량을 소화하는 것에 부하가 걸리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5백 척에 달하는 근거리 교역선들 중 4백 척이 보급품 수송에 동원되면서 물동량 수송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막대한 생산량만큼 어마어마한 물동량들이 조선에서 제후국들로, 또 제후국들에서 조선으로 운송되었다.

모든 도로는 화물마차들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럼에도 운송 수단이 부족해서 각 도시마다 필요한 물량보다 실제 수송량은 적었다. 그로인해 가격 상승압박이 심해지고 있었다. 특히 소비가 가장 활발했던 한성의 물자 부족사태가 심각했다.

국내 문제를 다루는 국토부는 물론이고, 농업부와 산업부에서 조차 연일 경고가 나오고 있는 실정에서 왕실 상단의 주축을 이루는 철산 상단과 철물전에서도 수송수단의 부족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렇게 조선에서 운송수단 부족으로 인한 위기의식이 점점 퍼져나가던 광해 6년, 서기로는 1608년 9월, 경부철도가 완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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