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2화. 출정(出征)
잡혀 들어온 몽몽교의 교도들과 수많은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성 한복판에 높다란 천단이 세워지고 그 가운데 꽂힌 쇠기둥에 몽몽교의 교주가 묶였다.
그로부터 50보 떨어진 곳에 작은 천단이 다시 세워지고 그곳에서 광해가 직접 천제를 올렸다. 하늘의 뜻을 어긴 죄인에게 벌을 내려달라는 것이 천제의 내용이었다.
그렇게 빌 길 이틀.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몽몽교의 교주를 단숨에 태워 죽였다.
신벌이었다. 자신들의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몽몽교의 신도들조차 놀라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물론 이 일이 있은 후 한성에 잠시 태왕을 신으로 섬기는 종교가 우후죽순처럼 생기기는 했지만 곧바로 내금위가 들이닥쳐 모조리 추포해 가면서 씨를 말려 버렸다.
여하간 그 일이 있은 후, 조선의 백성들 사이에서는 한 가지 명확한 기조가 세워졌다.
‘우리 태왕이 이미 신의 사자이다’ 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이걸 바라고 그런 연극까지 벌인 것이니 광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사이비 종교의 번창을 막고, 조선의 백성들을 더 강하게 규합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으니까.
최근 들어 백성들의 지식이 많이 발전하면서 번개가 내려치는 원리를 이해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었지만 그들조차 감히 태왕의 호뇌천제(呼雷天祭)를 과학으로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백성들에 있어 태왕은 끝이 없을 것만 같았던 굶주림을 없애주었고, 무저갱처럼 한없이 막막하기만 하던 자신들의 삶을 환한 햇빛 아래로 이끈 이였다.
소수의 귀족들에겐 다른 의미로 다가설지 모르겠지만 굶주린 채, 신분제에 얽매여 핍박받고 살던 대부분의 조선 백성들에게 태왕은 이미 신의 대리자였던 것이다.
불교를 믿던, 도교를 믿던, 천주교를 믿던, 그도 아니면 이름도 생소한 다른 종료들을 믿던, 조선의 백성들은 그리 확신했다. 태왕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신이 자신들을 위해 내려 보내준 신의 사자라고.
그것은 불법 높다고 소문난 고승도, 도력 출중한 도사도, 신의 이적을 보인다는 신부도, 그 누구도 흔들 수 없는 확신이었다.
그렇게 백성들이 신의 사자라 믿어 의심치 않는 태왕이 11월의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부산포까지 내려갔다.
포르투갈에서 귀환하는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안일한 대응으로 포로가 되어 나라에 부담을 주고, 결국 배까지 내어준 죄를 청하는 그들을 일으켜 세운 광해가 한 사람, 한 사람 부둥켜안고, 손을 부여잡으며 이리 무사히 돌아왔으니 되었다 말했다.
돌아온 이들이 감격해 몸 둘 바를 몰랐다.
7백여 명이 넘는 군인들만이 아니라 군무원이라고는 하나 민간인 신분인 7백 명의 선원들조차 그러했다.
자신들을 지켜주었어야 할 나라에, 그 나라를 다스리는 군왕에게 오히려 자신들의 죄를 청하는 그들의 모습에 광해가 미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정치와 교역을 분리해보겠노라 부렸던 자신의 고집이 부른 참사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죽어 이름만 돌아온 장병들과 선원들의 위패 앞에서 광해가 통곡을 한 연유였다. 그들의 죽음에 자신의 책임이 크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족들과 백성들이 그렇게 우는 태왕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 한참을 통곡한 광해가 위패들 앞에서 선언했다.
“그대들의 한을 반드시 풀어 줄 것이다. 짐과 조선이 맹세한다. 그곳이 어디든 조선의 백성이 더는 무고하게 목숨을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처절하게 갚아 줄 것이다.”
광해의 맹세에 조선군 원수 이순신이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명만 주소서. 폐하의 검이 되어 적을 쳐 멸하겠나이다.”
이순신이 시작이었다. 일대에 모여 있던 수천의 장수들과 병사들이 일제히 그를 따라 광해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외쳤다.
“명만 주소서. 폐하의 검이 되어 적을 쳐 멸하겠나이다.”
그들에게 광해가 말했다.
“곧 명이 있을 것이다. 그날까지 칼을 갈고, 총을 닦아 기다려라!”
“충!”
천지를 진동시킬 듯 떨어 울리는 장병들의 군례 소리에 격동한 백성들이 큰 한성을 질렀다.
와아아아아
온 부산포를 떨어 울리는 함성 소리가 포로수용소에까지 닿았다.
8백 명이 넘는 포르투갈 포로들이 그 함성이 무엇인지 수용소를 관리하는 포교들에게 들었다. 자신들의 존재조차 잊어버린 듯 구는 본국과 포로들을 귀환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조선의 노력 차이가 너무 컸다.
원망이 없을 수 없었다. 희망봉에서 잡혀온 이들도 그랬지만 마카오 해전에서 잡혀온 이들의 경우는 그 원망이 더 깊고 컸다.
송환과 방면을 위한 과정이 진행되다 마드리드 사태로 인해 중단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번 포로 방면 협상과정에서 펠리페 3세가 자신들에 대한 아무런 요구도 없었다는 것에 분노하고, 또 절망했다.
그로인해 포르투갈 포로들의 자국에 대한 원망이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다.
*****
11월 11일. 어의 허준이 이끄는 약제연구소에서 드디어 항생제가 만들어졌다. 푸른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을 분리해낸 것이다.
허준은 이 항생제에 멸농(滅膿)이란 이름을 붙였다. 농을 멸하는 약이란 뜻이었다. 순우리말도 아니고, 한자를 차용한데다 부르기 어렵고 발음도 입에 붙지 않았지만 광해는 그 이름을 승인했다.
개발자인 허준의 뜻을 존중한 연유였다.
광해는 환약 형태로 만들어진 그 약을 대량 생산하도록 명했다.
조선과 제국은 물론이고 온 세상에서 많은 이들의 생명을 구하게 되는 멸농의 출현은 의학과 약학의 수준을 완전히 다른 단계로 진입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었다.
가장 먼저 수술 후의 염증을 걱정해 제대로 시행하지 못했던 수많은 수술들이 현실화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천형처럼 여겨지던 매독의 구제에도 길이 열렸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외상이 덧나 죽는 이들의 수가 급감할 것이다. 특히 부상병들의 생존확률이 월등하게 높아질 것이 분명했다.
그것에 광해가 크게 기뻐했다.
*****
12월. 거제 건선단지에서 23척의 주몽급 순양함의 건조가 마무리 되었다. 22척은 계획보다 늦어져 1월 중순에나 건조가 마무리 될 것으로 보였다.
주몽급 순양함보다 덩치가 더 컸던 혁거세급 석탄운반선들도 마찬가지였다.
죄를 청하는 나대용의 장계에 광해는 대량의 떡을 만들어서 거제로 내려 보냈다. 고생하는 기술자들과 나누어 먹으라는 의미였다.
치죄가 아니라 떡을 보내온 뜻밖인 광해의 처결에 거제 건선단지가 크게 고무되었다.
한해가 마무리되는 12월 말일. 광해는 포항의 해병대 훈병원에 조선과 11개 제후국, 그리고 마드라스 출신 해병 12만1천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들의 대표 13명의 어깨 위 견장에 작대기 하나로 대변되는 평군병의 계급장을 달아 주었다.
선배해병이 계급장을 달아주는 조선 해병대의 전통에 따라 1만이 넘는 선배 해병들이 줄맞춰 서 있는 후배 해병들의 어깨에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그렇게 계급장을 단 해병들이 훈련병 대표의 구령에 맞춰 오른 주먹을 쥐어 심장어림에 가져다대고 고개를 숙였다.
“충!”
이제 대한 제국 해병대로 불리기 시작한 12만1천명의 해병들은 그간의 세뇌에 가까운 정신교육 때문인지 단상 위 태왕을 바라보며 그를 위해 죽겠다는 각오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포항 해병 훈병원에서 수료식이 있던 그날, 현월월도에 나가있던 징검다리 원정단도 모든 점령 작전을 끝냈다.
현월열도의 끝과 맞닿아 있는 신세계 대륙의 평지에 요새를 세우고 항구를 열어 그곳에 제국기와 조선기가 펄럭이게 했다.
징검다리 원정단이 그 요새도시에 붙인 이름은 신세계항(현대시대의 알라스카 앵커리지)이었다. 신세계에 처음 세워진 항구도시라는 의미였다.
점령 완료 장계를 가진 왕건급 호위함이 급히 조선으로 향했다.
*****
광해 6년, 서기 1608년. 정초에 열린 확대문무백관회의에서 광해가 작년에 세워진 사전계획에 의거하여 조선 무역선단의 소집을 명했다. 아울러 11, 12, 13 수송함대에도 출병 대기명령이 떨어졌다.
희망봉에서 근거지를 옮긴 광무항에서 귀환한 기동함대에도 즉시 정비를 마치고 재출병을 준비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징검다리 원정단에 소속되어 현월열도에 나가있는 이순신 함대에도 즉시 귀환하라는 태왕의 명령이 내려졌다. 그 명령서를 소지한 왕건급 호위함 한척이 현월열도를 향해 출발했다.
아직 징검다리 원정단이 보낸 점령 완료 보고는 한성에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1월의 시작과 함께 왕도방어 병단이 소속되어 있는 육군 1전단과 해병대에 최초로 다총과 일권총, 그리고 육상용 삼포가 보급되었다. 1전단과 해병대가 가지고 있던 나총과 이포는 모두 회수되어 정비를 거쳤다.
그렇게 정비된 나총과 이포들이 모두 제국 해병대로 이관되었다. 구포와 현식총, 그리고 수탄도 보급되었다.
다총과 일권총을 보급 받은 1전단을 제외한 조선 육군과 다름없는 무장을 갖춘 것이다.
이것에 대해 불안해하는 장수들과 문관들이 많았지만 광해는 ‘신뢰는 확인한 후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어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강행했다.
그로인해 조선군의 정규 무장으로 자신들이 무장되었다는 것에 제국 해병대는 잔뜩 고무되었다.
일포와 가총을 가지고 훈련했던 제국 해병대는 다시 해병대 훈병원에서 새로 지급된 무장을 활용한 전술 훈련에 돌입했다.
제국이, 조선이 자신들을 그저 총알받이로 써먹으려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얻은 제국 해병대원들의 표정은 오히려 출병이 가까워져 오고 있음에도 더 밝아지고 있었다.
그런 이들 중에서 분대 당 1명씩 의무병을 뽑아 왕립조선 종합의원으로 보냈다.
그들은 그곳에서 각종 응급 처치법과 중환자의 분류 및 응급대처 방법 등을 배우고, 멸농의 사용법과 마약성 진통제인 귀비환의 취급, 사용 주의사항도 배웠다.
귀비환은 그 재료가 아편의 재료인 양귀비꽃에서 얻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었다.
그곳을 수료한 이들에겐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하얀색 완장이 주어졌다. 그 일에 천주교가 고무되었다. 수녀들이 자발적으로 왕립조선 종합의원에 나와 의녀들을 돕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부터였다.
광해는 수녀들을 보내준 조선 천주교 교구에 상당량의 돈을 보내 지원했다. 일종의 보답이었다.
그것을 기회로 교황청과 조선 왕실의 관계를 설정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조선 왕실은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천주교는 종파일 뿐 정치 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한 것이다. 그것으로 교황의 신분을 단순히 종교 지도자로 한정지은 것이다.
천주교 교구의 지도자들은 불만이 있었지만 감히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지 못했다. 심지어 자신들의 신도들에게조차 그러했다.
조선에서 태왕을 비난하는 것은 위험했다. 그것이 아무리 종교 지도자일지라도 그 행위는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실제로 태왕을 거짓 신의 사자라고 비난했던 도교의 도사 한명은 다른 이들도 아니고, 그 신도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었다.
그 일에 천주교 신도들이 보인 반응은 뜻밖에도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감히 태왕을 욕보였으니 죽어도 싸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신부들의 놀람이 얼마나 컸는지 한 신부가 교황청으로 보낸 보고서에 기록하길 조선에서 신의 사자는 오로지 태왕이라고 적고 있을 정도였다.
*****
한번 연기된 시간보다도 조금 더 늦은 2월 초, 주몽급 순양함 22척과 혁거세급 석탄운반선 10척의 진수가 마무리 되었다.
시험항해 없이 해당 함선들을 곧바로 인수한 해군이 훈련에 들어갔다. 출병시점까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거제 건선단지의 기술자들이 그런 해군을 돕기 위해 훈련에 동승해 따라나섰다. 배의 문제점을 파악해 교정하고, 운영상의 기술 이전을 위해서였다.
3월. 이순신 함대가 부산포로 귀환하자 태왕의 명에 의한 대양 함대의 개편작업이 시작되었다. 새로 만들어진 증기철선들이 이순신 함대로 배속되었다.
이순신 함대에 배속되어 있던 기존의 함선들은 모두 제71기동함대로 편성되었다. 기존의 기동함대는 제72기동함대로 재명명되었다.
기존에 20척의 왕건급 호위함들로 구성되어 소속되어 있던 4개의 순찰전대들은 21원정함대로 배속을 옮기게 되었다.
그렇게 다시 전열함으로만 구성된 제72기동함대의 모항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상해였다. 부산포를 모항으로 삼았던 제71기동함대는 새로 개척된 신세계항으로 모항을 옮기게 되었다.
조만간 본격적으로 진행될 신세계 개척을 지원하기 위한 행보였다. 다만 그 이전 시점은 포르투갈 전쟁 이후로 미뤄졌다.
주몽급 순양함 50척과 혁거세급 석탄운반선 10척으로 이루어진 이순신 함대의 모항은 부산포로 정해졌다.
이로써 조선은 3개의 대양함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3월말. 그 3개의 대양함대와 30개의 조선 무역선단, 그리고 11, 12, 13 수송함대가 부산포에 집결했다.
자그마치 대형 증기철선 60척, 해모수급 전열함 135척, 왕건급 호위함 140척, 조선무역선 450척이 부산포 일대 바다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이 태우고 갈 대한제국 해병대 12만1천명과 각종 장비들이 부산포 벌판에 벌여선 가운데 높게 설치된 단상으로 태왕이 올라섰다.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앉은 이순신에게 태왕이 다시금 어검을 하사하며 명했다.
“적을 섬멸하여 조선과 제국의 뜻을 세우고, 그 땅에 제국의 깃발을 휘날리게 하라.”
“충!”
이순신의 군례를 따라 벌판에 벌여선 12만1천의 제국 해병들이 일제히 군례를 올렸다.
“충!”
그들의 군례소리가 부산포 바다를 떨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