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1화. 대한 제국 해병대
9월 초에 조선에서 도착한 조약서와 희망봉, 말라카의 회복 소식을 확인한 펠리페 3세는 211조선 무역선단 장병들과 선원들의 방면을 허가했다.
그들은 리스본 항구로 이동해서 대기하고 있던 조선무 역선단과 제211 원정전대에 나누어 타고 포르투갈을 떠났다.
포로로 잡힌 지 11개월 만이었다. 모두가 회한과 분노, 안도가 복잡하게 얽힌 표정으로 그렇게 멀어져가는 리스본 항구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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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 350척(약106M), 전폭 55척(약16M), 주무장 2연관 일장함포 2문, 부무장 밀폐형 삼포 8문, 3천 마력 증기기관 4기, 연돌 2개의 신형 증기철선은 바람날개를 돌리는 구동축 2개를 이용해 최대 속도 20노트(약37Km/h), 순항속도 10노트(약18.5Km/h)로 기동이 가능했다.
특히 이 배에는 광해의 조언으로 배기가스가 방출되는 배기관의 열을 이용하여 바닷물을 끓여 담수를 만드는 시설이 추가되어 있었다.
이것은 증기기관에서 사용하는 물의 보충에 사용되어 육지나 외부의 물 보급소요를 감소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전체적인 배의 외형은 광해가 현대시대에 있을 때 관심을 가졌던 독일 장갑순양함 퓌르스트 비스마르크(1897년 진수)와 판박이처럼 비슷했다.
물론 외형만 그렇다는 뜻이고 전장과 전폭을 비롯해 성능 등 세세한 사항은 완전히 달랐다. 아직은 기술적으로 미비한 부분이 많아서 완전복제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증기철선에 실리는 석탄은 7백 톤으로 이 양은 순항속도로 운항할 경우 최대 3천 해리(약5,500Km)의 항속거리를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능력을 가진 신형 증기철선에 부여된 명칭은 주몽급 순양함이었다.
주몽급 순양함의 선원수는 3백 명으로 이 숫자에는 포수 50명과 해병대가 해군에서 분리되어 나감으로서 전문 전투요원의 필요성에 의해 설립된 해군육전대원 50명이 포함된 것이었다.
따라서 배의 운영요원으로는 2백 명이 배정됨을 뜻했다. 이것은 조선 해군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살인적인 근무강도가 여전히 계승되고 있음을 뜻했다.
인적자원의 부족을 겪고 있는 조선 해군이 단위 함선 당 배정되는 인원을 최소한으로 유지한 결과였다.
그런 인원 구성에서 특이한 점은 범선형 전선들과 달리 증기기관을 운영하고 정비할 수 있는 기관병들과 증기철선에 채용된 각종 기계 장비들을 정비, 유지할 정비병들이 탑승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증기철선이 건조되기 시작한 이래 거제 건선단지와 장원을 오가며 상당기간 교육을 받고 있었다.
정비병들을 포함해 지난 7월부터 전 해군에서 증기철선으로 이동을 원하는 이들의 자원을 받아 구성한 1만5천명의 장병들이 훈련에 돌입해 있었다.
기존의 시험선 선원들을 교관으로 삼아 진행되고 있는 이 훈련들은 지상 훈련과 시험선을 통한 실습으로 병행되고 있었다.
그러던 9월, 광해와 이순신, 이억기를 비롯한 해군 고위 지휘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제 건선단지에서 초도분인 5척의 주몽급 순양함이 진수되었다.
나머지 45척은 모두 12월에 완성될 계획으로 건조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또한 주몽급 순양함으로 이루어질 함대에 필요한 석탄을 실어 나를 석탄 운반선도 증기철선으로 설계되어 제작되고 있었다.
조선무역선을 개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증기철선을 건조하게 된 이유는 기존의 범선으로는 주몽급 순양함의 속도를 따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몽급 순양함의 순항속도인 10노트는 현재 조선이 보유한 범선들의 최대속도에 근접한 빠른 속도였다. 다시 말해 범선인 조선무역선이 주몽급 순양함을 따라 가자면 항상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을 만큼의 바람이 불어줘야만 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함대가 필요한 보급용 석탄을 싣고 따라다닐 증기철선형 석탄운반선이 필요해진 것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석탄운반선은 오히려 주몽급 순양함보다 길이도, 폭도 더 컸다.
그로인해 운동성은 떨어졌지만 3천 마력 증기기관을 6개를 장비하고, 바람날개를 사용하는 구동축을 3개를 사용하여 주몽급 순양함과 같은 최고속도와 순항속도를 가질 수 있었다. 또한 문의 포를 장비함으로써 자체적인 방어수단도 갖추었다.
물론 그 무장으로 대량의 함포를 장비하는 범선들과 단독 전투를 수행할 정도는 아니었고, 나포 또는 공격을 시도하는 적함에 대항하면서 이 시대 최고를 자랑하는 최대속도를 활용해 도주할 수 있을 만큼의 전투력을 보유하는 것이 목표였던 것이다.
혁거세급이라 명명된 이 석탄운반선이 한 번에 수송할 수 있는 석탄의 양은 5천 톤이었다. 이 막대한 운송능력에 주목한 광해가 화물운송용과 승객수송용으로 변형 설계를 진행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우선 건조가 시작된 석탄운반선의 숫자는 10척으로 주몽급 순양함들과 마찬가지로 12월을 완성목표로 잡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대량건조와 대량정비를 위해 65개나 마련해 두고 있던 거제 건선단지의 건선거가 대부분이 주몽급 순양함과 혁거세급 석탄운반선의 건조에 동원되어 있었다.
그로인해 다른 모든 함선들의 건조 계획은 뒤로 미뤄졌다. 심지어 정비를 위한 계획들도 조금씩 밀렸다. 함선들의 정비에 동원가능한 건선거가 5개에 불과했던 까닭이다.
5척의 초도함에 대량의 인원을 추가 투입해 서둘러 건조를 끝냈던 이유도 정비가 지속적으로 밀리면서 작전 투입에서 제외되는 함선들이 생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하간 그 덕에 계획보다 이르게 5척의 주몽급 순양함을 손에 넣게 된 이순신은 그 배들을 모조리 훈련에 투입했다.
장병들의 실습 훈련에 탄력이 붙으면서 작전운영 능력이 크게 향상되는 계기였다. 그렇게 조선 해군은 착실하게 준비를 갖춰가고 있었다.
조선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밤낮없이 뛰고 구르는 곳이 거제 외에 또 한곳이 있었다.
바로 포항이다.
포항 해병대 훈병원엔 12만에 달하는 대규모 인원이 해병대 총사 곽재우의 직접 관리 하에 연일 훈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훈련 받는 이들이 모두 해병이었음으로 전투력 고취는 당연한 것이었다. 곽재우는 거기다 정신력을 특히 강조했다.
하루의 훈련 일과에 3분지 1을 정신단련에 배정해서 거의 세뇌 수준의 정신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정신교육에서는 극악한 환경에서 버텨나가야 한다는 해병정신은 물론이고, 태왕에 대한 신격화와 충성심 고취가 포함되어 있었다.
곽재우는 대한 제국 해병대로 불리게 될 이 병력이 각기 자신들의 출신국의 입김에 흔들리지 않는, 완벽하게 조선 태왕의 칼이 되길 원했다.
그로인해 일반적인 신병 훈련보다 더 극악한 환경에 훈련병들을 몰아넣고, 인내하며 버티고, 이겨내는 훈련과 그 모든 것의 기반에 태왕에 대한 충성을 끊임없이 강조해 세뇌시켰다.
물론 탈출구는 존재했다.
여느 훈련과 마찬가지로 해병대 훈병원엔 해방종이라는 작은 종이 있다. 도저히 버티지 못하겠다고 판단되면 그 종을 울리면 된다.
그러면 종을 친 자는 그 시간부로 해병대 훈병원에서 방출된다. 조선인의 경우 그길로 귀가 조치되고 한 달 이내에 육군 훈병원으로 재소집 되지만 어차피 치러야할 군역이니 그것을 불이익이라 말하기도 어려웠다.
자기 자신의 자존심에 입은 상처 외에는 그 어떠한 추가 조치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다보니 해방종은 언제나 해병대 훈련병들에게 강력한 유혹거리였다.
그럼에도 해방종을 치는 이들의 수는 생각보다 적다. 어차피 해병대는 지원자들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미 극악한 훈련을 각오하고 지원한 이들이라는 뜻이다.
물론 종을 치는 이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서 매달 2천 명 가량 입영하는 훈련병들이 3개월의 훈련 기간 동안 평균 1할의 타종률을 보인다.
다시 말해 3백 명 가량은 해병 훈병원을 수료하지 못한 채 자의에 의해 귀가 한다는 뜻이었다.
한데 이번 훈련병들은 조금 달랐다. 일반적인 훈련병들이 아니었기에 6개월에 걸쳐 진행되는 강화훈련 과정을 밟고 있는 12만의 훈련병들은 4개월의 훈련이 진행된 10월까지 단 5백 명 가량만이 해방종을 쳤다.
그것은 4리(0.4%)의 비율로써 평소에 비해 훈련병들이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물론 그렇게 만드는 데 일조한 것이 있긴 했다. 해방종 옆에 각 제후국 명칭 아래 지금까지 해방종을 친 이들의 숫자가 적혀있었던 것이다.
그 숫자가 훈련병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고나 할까.
가장 많이 해방종을 친 제후국은 121명을 기록 중인 명과, 117명을 기록한 남진이었다. 티베트는 2명에 불과했고, 후금은 5명, 할하와 준가르는 공통적으로 11명이었다.
그 뒤를 15명의 위구르가 바짝 뒤쫓고 있었으며, 카자흐와 나고야, 동일본은 각기 32, 41, 47을 기록하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북원에선 단 한명도 해방종을 친 이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그것엔 한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제국의 제후국들 가운데 유일하게 황제에게 저항해 반란을 일으켰던 곳이라는 굴레가 씌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누구도 입에 담지 않았지만 그들 스스로가 다시는 태왕의 명령에 반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들이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거칠고 힘든 훈련에서도 북원 출신 훈련병들이 버텨내는 이유가 되고 있었다. 자신들의 행동이 북원에 대한 황제의 생각을 바꾸게 될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은 채 말이다.
참! 이번 훈련병들 중에는 조선과 11개 제후국의 훈련병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광해의 명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국토부 관리의 실수로 명령서가 잘못 전달된 마드라스에서 병력을 보내왔던 것이다.
수가 많지는 않았다. 1천 명으로 구성된 그들은 확장된 마드라스로 몇 년 전부터 이주하기 시작한 시크교 전사들이었다.
시크교도들은 그들의 독특한 신앙 때문에 배척을 받는 편이다. 어딜 가도 환영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연유로 주변과의 충돌도 잦았다. 그 와중에 살던 곳에서 쫓겨난 몇몇 시크교도가 조선의 해외 영토인 마드라스로 걱정을 가득 안고 이주했다.
한데 마드라스 군정청은 딱 두 가지만 요구하고 그들을 받아들였다.
첫 번째, 마드라스의 군주는 대한제국의 황제 폐하이자 조선의 태왕이다. 이를 인정하고 군주로 받든다.
두 번째. 어떠한 경우에도 제국의 법과 조선의 법을 따른다.
당장 갈 곳이 없었던 시크교도들은 나중엔 어찌되던 두말없이 동의했다. 그러고 나자 마드라스 군정청은 그들이 머물 집도 주고, 자신들의 신앙생활에 어긋나지 않는 직장도 알선했다.
뿐인가 제대로 된 소득이 생길 때까지 곡식이며 생필품들을 무상으로 지원했다.
시크교도들로써는 난생 처음 받아보는 환대였고, 배려였다. 그들의 감격이 어떠했을 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깊었다.
종교 행사를 방해하지도 않았다. 원한다면 종교행사를 치를 사당도 지어주겠다는 말에 눈물을 흘리지 않은 시크교도가 없었다.
그로 인해 대량의 시크교도들이 마드라스로 이주해왔다. 당금엔 인도 대륙에서 펀자브 지방에 이어 시크교도들이 가장 많이 사는 지역이 되었을 정도였다.
이것은 조선의 법을 어기지 않는 이상, 세상의 모든 종교를 포용하는 광해의 정책 때문이었다. 그로인해 조선에서는 불교, 도교, 천주교와 같은 큰 종교만이 아니라 이름도 생소한 수십 종류의 종교가 들어와 있었다.
이들도 조선의 군왕을 광해로 인정하고 조선의 법을 따르면 아무런 제약도 없이 포교가 가능했다.
물론 그것을 어겼을 때는 인정사정없다.
실제로 몽몽교라는 이상한 이름의 종교가 조만간 세상이 망하고 곧 자신들이 지배하는 영원한 나라가 세워질 것이라고 주장하며 신도들의 재물을 편취했다가 내금위 군사들이 들이닥쳐 모조리 추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교주의 처형방식도 세상 처음 듣는 방법이 동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