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2화. 새 도읍을 찾다
역전의 노장은 세월의 풍파를 깊게 진 주름에 담고 있었다. 그런 이순신에게 광해가 물었다.
“조선 연합이 발족되면 조선을 포함하여 각국에서 1만의 병력을 받아 연합군을 구성할 생각인데 원수의 생각은 어떠하시오?”
“1만씩이면 12만의 대군이온데······. 어느 곳에 쓰실 요량이시옵니까?”
“아마도 6대 칸국 주변에서 전쟁이 적지 않게 일어날 것이오. 그리되면 병력 동원이 필연적일 터, 그곳에 파병하는 병력으로 삼을까 하오.”
이시기 중앙아시아 지역은 춘추전국시대와 버금갈 정도로 작은 왕국들이 난립하고 건국과 멸망을 반복한다.
이순신이 직접 이끈 유라시아 대정벌 기간 중앙아시아를 22만의 기마대로 휩쓸어 경고를 했다지만 그 약효가 지속되는 시간은 길지 않을 것이다.
저들이 다시 본격적으로 준동하면 카자흐 칸국 또한 중앙아시아의 일부이니 그들이 휘말릴 것은 당연했고, 위구르와 준가르, 티베트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광해는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조선군을 투입하는 대신 그렇게 모아둔 연합군을 투입하고자 했다. 연합의 일부분을 돕는 일이니 명분도 있었다.
자신이 직접 중앙아시아를 정벌했던 경험이 있는 이순신은 광해의 그런 생각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하오시면 모두 기마대로 구성하소서.”
“기마대로?”
“예. 하옵고, 무장을 화포는 금하시고, 기마총만을 허하시면 만약의 사태에도 화포가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나총만 보급하자?”
“그러하옵니다. 폐하.”
“다른 곳들은 몰라도 나고야와 동일본, 티베트는 기마대를 내기 어렵지 않겠소?”
“그들은 기동보군으로 삼아 쓰소서.”
“기동보군이라······.”
“예. 폐하. 전투는 점령과 전장정리가 수반되는 법, 그 일을 하자면 보군은 필연적이옵니다. 그것을 그들에게 맡기소서.”
이순신의 말에 광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수의 뜻을 잘 살펴 저들과 상의하리니 후일에 대비하여 잘 준비하여 주시오.”
“충심을 다하겠나이다. 폐하.”
고개를 숙이는 이순신에게 시선을 돌린 광해가 대신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들이 돌아오면 일이 급류를 탈것이다. 그것에 대비하여 반만의 준비를 갖춰두라.”
“명을 받잡나이다.”
대신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이는 모습을 바라보는 광해의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
철산 제철단지로 떠났던 11개국 군왕들은 다음 날 밤이 되어서야 한성에 도착했다. 한성에서 철산 제철단지까지는 통상 이틀거리다.
평양에서 하룻밤을 묵어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11개국 군왕들을 태운 마차들은 평양에서 1시간만 쉬었을 뿐 그대로 달려 철산 단지에서 한성까지 하루 만에 주파했다.
그런 까닭에 새벽에 출발하여 늦은 밤에 도착하는 여정이었다. 아무리 포장된 길을 진동 방지장치가 부착되고, 푹신한 보료와 방석이 제공되는 마차로 이동했어도 그 정도 긴 시간의 여행이면 피로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연유로 11개국 군왕들에게 다음 날은 휴식이 주어졌다. 이화관에서 덧없이 쉬어도 좋고, 원하는 곳이 있다면 시찰도 가능하도록 광해가 배려했다.
연로한 이들은 이화관에 머물며 여독을 푸는 걸 택했지만 의욕적인 몇몇은 한성 일대의 시찰을 원했다. 전날의 시찰에서 시간상 유심히 보지 못했던 곳들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그들을 내금위 기마대와 병사들이 호위해 나간 시간, 광해가 만력제, 지금은 그저 명왕이라 불리는 주익균을 궐로 불렀다.
다른 이들은 다 두고 홀로 불려 들어온 명왕은 긴장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그를 광해가 궁문 앞에까지 나아가 맞아들였다.
“쉬시는데 오시라 해서 미안합니다.”
“아, 아니옵니다. 폐하.”
극명한 변화였다. 이전이었다면 광해가 허리를 굽혀 ‘폐하’리 불렀어야 했겠지만 지금은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그 것에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인 명왕에게 광해가 부드럽게 말했다.
“오늘은 조선의 태왕이 속국 명의 왕으로써 부른 것이 아니라 매부로써 손위 형님을 청한 것입니다.”
생각지 못한 광해의 말에 명왕은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광해가 미소를 그렸다.
“잠시 걸으실까요?”
“아, 예.”
함께 걸으며 광해는 정치 이야기는 쏙 빼고 날씨, 음식 이야기만 거론했다. 그렇게 걷길 얼마, 광해가 걸음을 멈추었다.
“조카의 얼굴을 한 번도 못 보셨다고 들었습니다.”
광해의 말에 명왕의 눈이 커졌다. 그런 그에게 중궁전을 가리켰다.
“들어가시죠. 중전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광해의 배려에 명왕이 감사를 표하고는 서둘러 중궁전으로 들어갔다.
제 살길 바빠 동생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역시 오라비였던 모양이다. 빨라진 걸음에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그런 명왕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광해의 입가로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하루의 휴식을 거친 이후 다시 모인 군왕들과 광해가 조선 연합에 대해 본격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지못해 끌려오던 이전 날과 군왕들의 태도가 달랐다.
조선 연합으로 묶이면 철산 제철단지와 같은 것이 생기는지, 자신들의 나라도 조선처럼 방직기와 재봉틀을 쓸 수 있는지, 그것들을 다른 곳으로 팔수 있는지에 대해 수도 없이 물어왔던 것이다.
그런 군왕들의 물음에 광해가 차근차근 답했다.
“제철 단지는 원한다면 어디라도 건설 할 수 있을 거요. 국내에서 사용하는 일반적인 철이라면 충분히 충당이 가능할 거요.”
“일반적인 철이라 말씀하심은 중요한 철은 생산할 수 없다는 말씀이옵니까?”
누르하치의 물음에 광해가 답했다,
“기술을 전수한다 하나 국가 기밀에 속하는 핵심은 빠질 거요. 일반적인 철의 생산은 어려울 것이 없겠지만 특수 합금이나 고강도 강판의 경우엔 생산할 수 없을 것을 말하는 것이오.”
광해의 말에 다소 실망하는 기색들이 보였지만 누르하치는 아니었다.
“소신의 생각으로는 그것만으로도 대단하지 않을까 하옵니다만.”
일국의 왕이 태왕 앞에서 ‘칭신’을 했다. 당연한 처사이지만 그 말을 내뱉은 이가 누르하치라는 것에 광해가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말을 함에 있어 돌아가는 그 날까지 ‘칭신’은 피하려 들 왕으로 예상 된 이들 중 두 번째 손가락에 꼽혔던 이가 바로 누르하치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칭신에 광해가 미소를 그리며 답했다.
“그리 생각한다면 내 후금에 가장 먼저 제철 단지를 지을 수 있도록 지원하리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대번에 터져 나오는 누르하치의 음성 상 그가 진정으로 기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이후 왕들이 서로 자국에도 세워 달라 아우성을 친 까닭에 광해가 순서를 정해주어야 할 정도였다.
한 번에 파견할 수 있는 기술자들의 수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동시다발적으로 제철 단지의 공사를 진행할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하면 소신의 카자흐엔 방직소를 먼저 세워주소서.”
카자흐 칸국의 칸이 나서자 다른 군왕들의 얼굴에 아차 싶은 표정이 들어섰다.
“방직소는 양잠이 수반되어야 하는 일. 함께 진행 될 수 있도록 기후와 토양을 찾아야 하오. 선행 기술자들을 파견하여 일을 시작해 봅시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카자흐의 칸은 질 좋은 옷감과 비단이 대량 생산되는 것이 부러웠던 모양이었다. 그것을 얻어냈다 생각했던지 카자흐 칸은 누르하치만큼이나 표정이 좋았다.
이후 저마다 손을 드는 통에 광해가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이것저것 물음에 답해준 덕에 어느 정도 열기와 궁금증이 해소되자 광해가 군왕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선이 이렇듯 베푸는 것은 조선 연합에 드는 국가들을 하나로 보기 때문이오. 짐은 그대들도 조선 연합을 하나의 국가로 생각하길 바라마지 않소.”
“명심하겠사옵니다. 폐하.”
답은 곧바로 나왔으나 저들 중 얼마나 진심일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초기엔 수없는 삐걱거림이 발생할 터였다.
그것을 이겨내고 결국 자리를 잡으면 조선의 미래가 탄탄대로에 올라설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것을 지켜나가는 것은 후대의 몫이겠지만.
광해의 생각에 다른 음성이 끼어들었다.
“감히 한 말씀 올려도 되겠나이까?”
명왕이었다.
“말하시오?”
“연합의 이름을 조선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하여 주시면 아니 되시겠사옵니까?”
순간적으로 좌중의 온도가 내려갔다. 자칫 태왕이 지금의 말을 조선을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간 명왕의 목숨이 온전치 못할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당장 명왕을 수행해온 명나라 대신들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그런 좌중을 내려다보며 광해가 다소 차가워진 음성으로 물었다.
“굳이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조선이란 국명을 연합의 이름으로 사용하시면 모든 국가의 백성들이 나라가 조선에 흡수되었다 생각할 것이옵니다. 그것에서 오는 반발을 감히 숨기지 못하겠나이다.”
솔직한 것이라 말해야 할까? 아님 반항인 걸까?
그 사이에서 고심하는 광해에게 명왕이 몸을 낮추었다.
“소신의 충정에서 드리는 간언이오니 심사숙고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명왕의 말에 광해의 눈이 커졌다.
칭신을 하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던 첫 번째 손가락에 꼽혔던 이가 바로 명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공손한 모습에 다른 나라의 군왕들도 놀란 모습이 역력했다.
명과 다른 나라는 사실 입장이 다르다. 명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기 있는 거의 모든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던 명실상부한 제국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명왕으로 내려앉았다지만 그랬던 명국의 황제였던 이가 칭신을 하고 몸을 낮춘 것이다.
그런 명왕의 태도 변화에 어제 만난 중전의 입김이 닿아 있을 거라고 느꼈던 광해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명왕의 뜻을 깊이 새겨들으리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비로소 좌중의 분위기가 풀렸다. 그런 가운데 할하의 칸이 조심스럽게 나서 작은 함 하나를 광해에게 올렸다.
“그것이 무엇인가?”
“과거 원이 쓰던 옥새이옵니다.”
“그것을 왜 내게 주는가?”
광해의 물음에 할하의 칸이 답했다.
“온 여진인들이 신인이라 우러러 모시고, 모든 몽골인들이 카간(可汗, 가한)으로 섬기게 되었으니 온당히 폐하의 것이 아닌가 하옵니다.”
몽골인들에게 있어 원의 옥새는 자신들의 영광을 상징한다. 몽골의 부흥을 부르짖으면 에카 바카투루가 일대의 몽골 전사들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원의 옥새를 확보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렇게 에카 바카투루가 확보했던 옥새가 할하 칸의 손에서 이제 광해에게 전달되는 셈이다. 광해의 눈짓에 좌찬성 겸 도승지 이항복이 조심스레 함을 받아 광해에게 들어바쳤다.
그 함을 광해가 받아들자 할하, 북원, 준가르, 위구르의 칸들이 일제히 부복하였다. 모두가 과거 몽골 제국에 속하던 이들이었다.
그 모습만으로도 저들에게 이 옥새가 어떤 의미인지 충분히 설명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상황이 그렇게 변하자 나머지 군왕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춤거렸다. 그 속에서 무언가를 결심한 명왕이 뒤를 향해 무어라 명하자 놀란 석성이 배석한 환관에게 무엇인가를 건네받아 명왕에게 공손히 들어바쳤다.
그것을 받아든 명왕이 겉을 싸고 있는 보자기를 풀자 작은 함이 나왔다. 그 함을 들고 명왕이 앞으로 나와 광해를 향해 들어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