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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30화 (30/325)

제30화. 미끼로 협상을 낚다

날이 밝았다.

다행히 광해군이 알지를 통해 보낸 전갈을 제대로 받았던지 밤을 도와 달려온 까닭에 초췌한 모습의 치중대는 훤히 밝아오는 아침 햇살과 함께 동성진 벌판에 마련된 북위별시위의 숙영지에 도착했다.

그들을 맞은 북위별시위의 제장들은 꽤나 놀랐다.

보급물자의 양이 자신들의 생각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식량의 양이 너무 많았다.

수천 섬은 될 법한 가마니들이 수백 대의 수레에 실려 있었던 것이다.

그들을 호위해온 병력이라는 게 고작 이백 남짓이었다.

그들도 군병이 아니라 김억수가 선전의 호위무사들 일부에다 힘깨나 쓴다는 한성의 왈패들을 섞어 급조해 만든 이들이었다.

수레를 끄는 소들의 고삐를 잡은 이들도 군병이 아닌 노비들이었다.

그들은 김억수를 통한 광해군의 요청으로 동인과 서인들이 추가로 내놓은 노비와 수레들이었다.

“이 많은 쌀은······, 뭡니까?”

놀라는 이순신에게 광해군이 답했다.

“올해도 조선의 소출이 좋았다더군요. 이상하죠? 쌀이 남으니 찾는 이들이 줄어요. 그동안 백성들이 굶은 게 이상하다니까요.”

그랬다.

조선에 쌀이 남아도는 진귀한 광경이 벌어졌다.

작년에 이할, 올해 이할.

거의 반년분의 쌀이 더 났다.

그만큼 쌀이 조선에 풍족해졌다는 뜻이다.

가격도 떨어졌다.

올해는 작년의 일을 거울삼아 대상들이 아예 매점매석에 나서지 않아 그 값이 더 떨어졌다.

조선에 회자되는 말 중에 대갓집 곳간엔 쌀이 썩어 나고, 백성의 쌀독엔 거미줄만 가득하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있는 이들이 곳간에 쌓아두기만 하고 쌀을 풀지 않았다는 뜻이다.

괜히 그런 건 아니다.

그렇게 쌓아두고 묵혀두면 값이 올라가 썩어서 버리는 것을 감안해도 더 많은 돈을 벌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바뀌었다.

가지고 있으면 손해다.

쌓아두고 있던 쌀들이 이전해의 반의 반값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작년의 소출 증대와 가격하락이 겨울철 보릿고개를 잊게 만들었다.

곡식에 대한 간절함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간절하지 않은 이들이 쌓아두고 쟁여두고, 비싼 값에 살리 없다.

우습지만 그 작은 변화가 조선 곡물 시장의 큰 변화를 이끌었다.

쌓여있던 쌀들이 쏟아지면서 콩 값이 쌀값을 몇 배나 추월하는 일이 벌어졌다.

몇 년 간 대갓집 곳간에만 쌓여있던 대량의 쌀이 풀리면서 조선의 쌀값은 폭락했다.

어차피 비싸지 않은 쌀이었다.

양인들의 입장에선 오래되 상태가 좋지 않은 쌀을 살 이유가 없었다.

결국 수요가 줄자 대갓집 창고에서 묵었다 나온 쌀값은 더 떨어졌다.

가진 것 없는 조선의 천민들도 쌀밥을 부담 없이 밥상에 올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남아돌았다.

가지고 있어봐야 새로 거둬들인 곡식이 많아 쌓아둘 곳간도 부족했다.

결국 투매라 부를 수밖에 없을 정도의 헐값에 묵은 쌀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걸 광해군의 언질을 받고 기다리던 김억수가 대량으로 매입했다.

지금 눈앞에 쌓여있는 쌀들도 바로 그렇게 사들인 것들의 일부였다.

“이것으로 무엇을 하실 요량이십니까?”

“산다니까요.”

뜻 모를 이야기만 남겨둔 광해는 그렇게 도착한 수레들을 포로들을 묶어둔 기둥들 앞으로 끌고 갔다.

부상을 입은 이들은 따로 추려 의원들이 치료 중이었지만 나머지 포로들은 나무기둥을 박고 그 기둥에 여럿씩을 묶어두었다.

하나하나가 조선의 노비병을 손쉽게 찜 쪄 먹을 수 정도로 거칠고 날랜 여진 전사들이기에 어쩔 수 없이 취한 조처였다.

양발을 묶고, 다시 양손을 묶은 줄을 위로 잡아당겨 기둥에 묶어 두었던 것이다.

그런 이들이 잘 보이는 곳에 수레를 세워놓고 조선군 병사들을 불렀다.

달려온 이들이 가마니를 내려 벼를 찧고 쌀을 내어 밥 짓을 준비를 갖췄다.

이내 여기저기서 모닥불이 오르고 잠시 후, 밥 짓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여진족 포로들 전체가 산처럼 쌓인 가마니들 전체가 곡식이라는 것을 확연하게 알아차렸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군 전체가 갓 지은 쌀밥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그 안엔 광해군의 조처로 북위별시위의 숙영지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던 호정이 부족장이 보낸 여진의 전령도 섞여 있었다.

그는 참 잘 먹었다.

이미 한바가지나 되는 밥을 먹었음에도 다시 그만큼을 퍼 담아 또 먹었다.

다른 조선군의 두세 배는 되는 양을 순식간에 먹어치운 것이다.

그런 그에게 광해군이 말했다.

“내가 그대의 족장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해 줄 수 있겠어요?”

토병을 통해 광해군의 말을 전달받은 여진 전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날 위해 싸워줄 전사를 보내주면 그 한 명당 저 가마니 하나를 주겠다고 전해주세요.”

눈이 커지는 여진 전령에게 광해군이 말을 이었다.

“싸움이 끝난 후에 주겠다는 소리도 아니에요. 받아갈 전사도 같이 오라고 하세요. 날 위해 싸울 한명은 남고, 한명은 저기 있는 곡식 한 섬을 지고 돌아가는 거지요. 이해했나요?”

광해군의 물음을 토병을 통해 전달받은 여진 전령은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요.”

광해군의 말에 여진 전령은 그 즉시 자신의 말에 올랐다.

그렇게 서두는 전령을 잡아 이순신이 벼 한 섬을 내어주었다.

하지만 그걸 실고서는 말이 움직일 수 없다는 걸 알아차린 전령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긴 벼 한 섬이면 현대 도량형으로 2백Kg이다.

과하마에 실기엔 버거운 무게였다.

그 탓에 실망한 여진 전령의 모습에 쓰게 웃은 광해군의 명으로 이전의 전투에서 노획된 말 2필을 내어주었다.

거기다 쌀을 나누어 실은 여진 전령은 하늘을 나는 표정으로 말을 달려 떠나갔다.

그 모든 과정이 여진족 포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벌어졌다.

당연히 토병을 통해 만주어로 통역된 말을 모든 여진족 포로가 들었다.

그런 이들을 스윽 훑어본 광해군이 자신의 막사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조선군 제장들의 표정에 의아함이 들어섰다.

도대체 무얼 생각하고 움직이는지 좀처럼 감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군이 식사를 한 후에도 여진족 포로들에겐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다.

사로잡은 뒤로 음식은커녕 물도 주지 않았다.

기운을 빼놔야 한다는 제장들의 주장 때문이기도 했지만 광해군은 자신의 계획을 위해 그냥 두었다.

자고로 배고플수록 빵은 소중해지는 법이니까.

뭐, 여진족 포로들의 입장에선 가득이나 배고픈 와중에 더 굶겼으니 죽을 맛이었겠지만.

그 상태로 광해군은 기다렸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드디어 입질이 왔다.

“광해군 마마. 포로 중 한명이 뵙기를 청합니다.”

한 군관의 보고에 광해군이 곧바로 답했다.

“데려오세요.”

광해군의 허락이 내려지고 잠시 후, 군관과 병사 몇이 뒤로 손을 돌려 묶은 여진족 포로 한명을 데리고 들어왔다.

“이자인가요?”

“예. 마마. 이자가 군 마마를 꼭 뵙고 싶다고 하도 간청을 하여...”

“잘 했어요. 그래,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요?”

광해군의 말을 토병이 통역하기도 전에 상대에게서 답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슬쩍 뭉개져 들리긴 했지만 분명한 조선말이었다.

“협상...하고 싶다.”

놀란 광해군이 물었다.

“우리말을 하는 당신은 누군가요?”

“난...그대들이 번호라 부르는 하르무······. 투삼구다.”

조선인이 알아듣기 편하게 한어로, 그것도 이두의 차음을 빌려 자신의 이름을 댄 자를 광해군이 유심히 살폈다.

육척은 될법한 장대한 체구에 앞머리를 깎고 뒷머리만 남긴 변발이 강한 인상을 주는 사내였다.

“그래요 투삼구 족장. 무얼 협상하고 싶은 가요?”

“호정이 족장에게 한 제의... 우리에게도 해줄 수는 없나?”

“날 위해 싸우겠다고요?”

“대가만 주어진다면.”

“내가 누구랑 싸울지는 아는 거죠?”

“니탕개의 무리 아닌가?”

“맞아요. 한데 그곳엔 당신들의 형제나 친척이 있을 텐데, 그런대도 나와 함께 그들과 싸우겠다는 건가요?”

“그들도 이해할 거다.”

“어째서요?”

“부족의 생명을 대가로 싸우는 일이니까.”

부족의 생명이라 말했지만 그것이 곡식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애초에 이런 반응을 노리고 광해군이 포로들이 다 보는 앞에서 일을 벌였던 것이니까.

“좋아요. 협상, 해보죠.”

광해군의 눈짓에 군관이 투삼구의 묶인 손을 풀어주었다.

물론 만일에 대비해 그 뒤에 군관이 칼을 꺼내 들고 버티고 섰다.

여차하면 목을 처 날리겠다는 뜻이었다.

그런 군관의 모습이 자신의 안위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광해군은 작게 웃었다.

“괜찮으니 칼 넣어요.”

“하지만...”

“이름이 어떻게 되죠?”

“종사관(從事官) 태평입니다. 기마 돌격장을 맡고 있사옵니다. 마마.”

북위별시위에 배속된 기마대의 지휘관인 셈이었다.

“그래요. 태평 종사관. 그대의 실력을 믿어요. 적어도 저자가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칼 따위 없어도 묵사발을 낼 수 있을 테니까 말이에요.”

솔직히 못 믿는다.

태평이라 자신의 이름을 밝힌 무관의 덩치는 투삼구의 절반에 불과했으니까.

박투술이 덩치에 종속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 정도면 힘의 차이가 현격하게 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태평을 돌아본 투삼구가 피식 웃기까지 했다.

하지만 태평의 입장에선 반박하기가 어렵다.

그만큼 자신을 믿는다는 뜻이니까.

스르릉.

칼을 집어넣은 태평이 눈에 힘을 주며 답했다.

“소장, 필요하다면 목숨을 걸고 마마를 지킬 것이옵니다. 걱정 마소서.”

고개를 끄덕인 광해군이 의자 대용으로 가져다놓은 나무토막을 가리켰다.

“앉아요.”

광해군의 권유에 투삼구가 자리에 앉자 그 뒤에 무시무시한 눈빛의 태평이 버티고 섰다.

여차하면 그대로 투삼구의 목을 돌려 꺾어버릴 심산인 듯 싶었다.

그럼에도 앉아 있는 투삼구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런 그에게 광해군이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마음을 바꾼 거죠?”

“부족원들이 죽어간다. 내 아들과 딸도 죽었다. 우린 곡식이 필요하다.”

족장의 아들과 딸이 죽을 정도로 식량이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인 듯 했지만 여기서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수는 없었다.

곧바로 광해군이 압박하고 나섰다.

“그 말은 곡식만 얻으면 마음을 달리 먹을 수도 있다는 뜻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우리 조상과 신께 맹세하겠다.”

이순신에게 사전에 들은 말이 있었지만 광해군은 그걸 다시 확인하고자 했다.

“그 맹세가 동족과의 싸움도 불사할 정도라는 걸 어떻게 믿죠?”

“그건....”

선뜻 설명할 방법이 없는지 한참을 고심하던 투삼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하아... 그걸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런 걸 나보고 믿으라는 거군요.”

“너희와 우린 다르다.”

“별로 안 달라요. 위로 올라가면 같은 조상을 두었거든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우리 초원의 전사들은 나약한 조선인들과는 같은 배에서 나오지 않았다.”

자부심 철철 넘치는 투삼구의 말에 광해군이 물었다.

“천 년 전만 해도 우린 같은 형제였어요.”

“거짓말!”

“고구려와 발해. 지금 당신들이 사는 그 땅과 우리가 사는 땅에 세워져 있던 나라를 모른다는 소린가요?”

광해군의 물음에 투삼구의 입이 다물렸다.

왜 모를까.

제사장의 입을 통해 구전되는 긴 역사 속에 고구려와 발해는 빠지지 않는다.

그 찬란한 역사에 자신들이 당당히 포함되어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피식 웃은 투삼구의 입에서 생각지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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