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동성진 전투 (2)
대장기를 발견한 율보리가 별동대를 대장기가 서있는 언덕위로 돌진하도록 명령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포격 소리에도 불구하고 율보리의 기마대는 언덕에 휘날리는 조선군 대장기를 보고 직선으로 달렸다.
대장을 잡으면 승기의 반은 잡은 것이나 진배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거침없이 달리던 와중에······.
탕!
첫발을 시작으로 연속적으로 울린 총소리에 율보리의 기마대가 속절없이 쓰러져갔다.
대장기를 들고 광해군이 서있는 언덕 뒤편 일대의 숲 가장자리에 나머지 5백, 가형 소총병들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나무 위에 은신한 채 여진족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숲과 맞닿은 벌판을 한창 달려가던 여진 별동대에겐 마른하늘의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북위별시위의 가형 소총병들은 1만2천 노비군 중 최고의 사격술을 보인 이들만을 가려 뽑아 만든 부대다.
더구나 가형 소총의 사거리는 원형인 드라이제 바늘 총과 같은 6백보.
넓게 벌판에 맞닿은 숲 가장자리의 요소요소 나무 위에 숨어 기다리던 5백 가형 소총병들이 자신들의 구역 안에 들어온 여진 기마병을 일방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하긴 한방에 5백의 기마병이 쓰러졌으니까.
그들이 판 죽음의 함정을 도주하기 위해 여진의 기마병들이 내달렸지만 가형 소총병 각자 6발, 1분도 되지 않아 율보리를 포함한 3천 여진 기마병들로 이루어진 별동대가 모두가 죽었다.
이 함정 사격에서 가형 소총병들은 단 한발의 헛된 사격도 없이 전탄 명중이라는 신기를 섰다.
그렇게 동성진 벌판에서 이루어진 첫 전투에서 죽은 여진족의 수는 9천, 다치거나 투항해 사로잡힌 여진족의 숫자가 1만 3천, 도주에 성공한 이들의 수는 8천 가량이었다.
*****
살수들이 군영을 세우고 포로를 분리하는 일로 바쁠 때 소총병들과 포병들은 포와 총을 정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가형 소총의 경우에도 후장식이긴 해도 사용되는 화약이 흑색화약이었기 때문에 전장식 소총처럼 총열에 다량의 화약찌꺼기인 탄매가 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가형 소총의 강선은 폴리고널(Polygonal) 강선이다.
사각 형태로 각진 일반 강선이 아니라 약간 라운드 진듯 부드럽게 만들어진 강선을 말한다.
강선을 파는 게 아니라 미리 눌러서 만들어 감는 형식으로 강선을 완성한 까닭에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애초에 폴리고널 강선을 목적으로 일부러 만든 것이 아니라 당대 조선의 기술이 부족해서 우연히 만들어진 강선이란 소리다.
하지만 이것으로 폴리고널 강선의 이점을 누리게 되었다.
부드럽게 라운드 진 폴리고널 강선으로 인해 탄이 발사되며 생기는 마모가 적다.
또한 탄환과 강선의 밀착을 더 강하게 시킨다.
그 만큼 탄이 발사될 때 앞으로 빠져나가는 가스의 양이 줄어든다.
그것은 탄속을 조금 빨리해주고, 탄매의 발생을 줄여준다.
물론 눈에 확연하게 띌 정도는 아니지만 그 미세한 차이가 사격 정확도와 총열의 청소기간을 조금 더 길게 만들어주었다.
별거 아닌 거 같아도 이 차이는 전투에서 결정적이다.
승마총병의 경우 말 뒤에서 매번 총열 청소를 하면서 사격하기에는 쉬운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십여 발 내외에선 총열의 청소 없이 사격이 가능하게 해주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처럼 정비 때는 그렇게 쌓이고 눌러 붙은 탄매를 떼어내느라 고생해야 했지만 말이다.
동성진 벌판의 밤은 추웠다.
여기저기 모닥불을 피우고 추위를 피하는 이들도 있었다.
기존 관병들의 경우엔 갑주와 가죽신발 등 나름 군장이 갖춰져 있었지만 무명으로 만들어진 백의에 짚신을 신은 노비군은 그렇지 않았다.
광해군은 한성을 출발하기 전에 저들에게까지 갑주와 가죽신을 제공하려 했지만 호조의 난색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만한 물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것까지 김억수에게 얻어내기엔 어려웠다.
더구나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만 명이 넘는 이들을 입힐 새로운 갑주와 가죽신을 만들어 내는 일은 쉬운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조금 두툼한 백의 2벌과 짚신 3켤레, 대나무로 만든 방립(方笠)을 군모 대신 지급하는 선에서 노비군의 군장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그 옷만으로 한기를 막아내기에는 쉽지 않았을 터였다.
그런 이들에게 군관들이 다가가 주의를 주었다.
숙영지 도처에 화약이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불을 피우지 못하게 할 수는 없다.
그러니 주의사항을 끊임없이 강조해서 병사들의 긴장을 유지하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아직 9월 초순임을 감안할 때 확실히 남쪽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더 추워질 때를 대비해 미리 대량의 두꺼운 옷과 솜을 넣은 버선, 여분의 짚신들을 준비해두었지만 길게 전쟁을 끌고나갈 경우 문제가 생길게 분명했다.
군장 부분에서도 개선을 해야겠다고 광해군이 마음을 먹은 계기가 되고 있었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던 광해군을 한 군관이 찾았다.
“별장께서 뵙길 청하십니다.”
군관의 보고에 이순신의 군막으로 향하자 그가 다른 제장들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광해군의 물음에 이순신이 답했다.
“첩보입니다.”
그와 함께 바라보는 이를 향해 광해군도 시선을 주었다.
‘야인!’
털가죽모자에 털가죽 옷. 여진족이었다.
“이 근방의 여진 부족장 중 하나인 호정이 보내온 전령입니다.”
“무슨······?”
“낮에 벌어졌던 전투에서 패배한 니탕개가 추가로 합류한 전사들을 합해 1만5천으로 세를 불려 회령을 노린답니다.”
회령은 북위별시위가 주둔중인 동성진 벌판보다 남쪽에 위치한 조선의 성이었다.
당연히 다시 강 건너 조선의 땅에 있는 곳이다.
“경원성의 조선군 지휘부에는 소식을 전했습니까?”
“보내긴 했습니다만······. 소식이 닿더라도 구원병을 보내기엔 늦을 겁니다.”
“하면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본대는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북위별시위의 병력만큼이나 많은 포로가 사로잡힌 까닭이다.
그들을 감시하고 견제할 병력을 줄이면 대번에 반란을 일으켜 탈출할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별동대를 내기도 어려운 게 빠르게 이동하는 니탕개의 군대를 따라잡자면 이쪽도 기마대를 내야 하는데, 북위별시위의 기마대는 승마총병과 함께 움직이는 5백뿐이다.
말이야 주인 잃고 배회하던 여진의 말 수천마리를 포획해서 부족함이 없다지만 그걸 탈 기마병이 없었다.
말을 탈줄 아는 병사들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북위별시위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비군으로 가면 그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 북위별시위가 별동대로 낸다면 5백뿐이다.
그들만으로 1만5천으로 세를 불렸다는 니탕개의 군대를 막으라고 보내는 것은 죽으러 가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연유로 다른 뾰족한 수가 없어 이순신을 비롯한 조선군 장수들도 고심하는 모양새였다.
그 와중에 광해군이 막사 안에 있던 여진인을 바라봤다.
광해군은 저자의 말을 믿어도 좋겠냐는 물음은 던지지 않았다.
실제 역사에서도 니탕개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또 다른 여진 부족의 고변으로 그들의 공격을 사전에 조선군이 알고 대비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정도로 여진족은 각 부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긴 이번에도 먹고 살기 위해 뭉쳤을 뿐 애초에 서로 사이좋은 이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바라보는 광해군의 시선을 이순신이 곡해했던지 사족을 달았다.
“저들의 조상과 신에게 맹세한 후에 말한 내용입니다. 믿을 수 있습니다.”
“조상과 신에게 맹세한 말은 믿을 수 있는 겁니까?”
광해군의 물음에 이순신이 답했다.
“조상과 신에게 한 맹세를 어기면 죽어서 조상의 땅으로 들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며 고통을 당합니다. 그게 저들의 사후 세계관이지요.”
“절대적인 겁니까?”
“제가 아는 한, 예. 그렇습니다.”
이순신의 답에 광해군의 눈이 왠지 반짝 거렸다.
그런 광해군이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여진의 전령에게 물었다.
“밥은 먹었나요?”
광해군의 물음은 토병을 통해 만주어로 여진 전령에게 전달되었다.
그 물음에 여진 전령은 얼굴을 붉힌 채 답했다.
“3일간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토병을 통해 조선말로 전달된 여진 전령의 답에 광해군이 눈짓을 하자 전장까지 따라 나온 환관 알지가 잠시 막사를 나갔다 손에 주먹밥이 가득 든 바가지를 들고 돌아왔다.
그걸 광해군이 받아 내밀었지만 여진 전령은 눈치만 보고 선듯 손을 내밀지 못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어 보인 광해군이 개중 하나를 먹고 나머지를 다시 내밀자 여진 전령이 조심스럽게 바가지를 받아 들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받아들고서는 정작 먹을 때는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지 서둘러 급하게 먹기 시작했다.
“컥컥.”
너무 급하게 먹었는지 사래가 들린 여진 전령에게 알지가 미리 준비해온 물주머니를 건넸다.
그걸 벌컥벌컥 들이마신 여진 전령은 이내 다시 주먹밥을 게걸스럽게 먹는데 집중했다.
그런 그에게 광해군이 물었다.
“식량사정이 심각한가요?”
광해군의 질문을 토병이 재빨리 만주어로 통역했다.
그 질문을 전달받은 여진 전령이 답했다.
“곡식은 다 먹었고, 양은 반 이하로 줄어들어 도살이 금지되었습니다.”
“곡식도 없고, 양도 못 먹는다면 뭘 먹는단 말이죠?”
광해군의 물음에 토병을 거친 여진 전령의 답이 가관이었다.
“양젖, 나무껍질, 그리고.... 풀.”
풀은 양의 것이다. 그러한 풀을 사람이 먹는다는 것은 여진족에게 있어 미래의 한 조각을 훔쳐 먹는 행위였다.
그럴 만큼 절박하다는 증거였다.
“천천히 먹어요.”
그것으로 여진 전령에게서 시선을 돌린 광해군이 이순신을 바라봤다.
“일단 저자에게 알았으니 기다리라 말하고 다른 막사로 보내시지요.”
“돌려보내지 않고 말입니까?”
저렇게 전령이 오면 말에 실고 갈 수 있을 만큼 식량을 내주어 돌려보내는 것이 관례였던 것이다.
그걸 광해군도 안다.
하지만······.
“예. 제가 원하는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니 따라주세요.”
광해군의 거듭된 말에 이순신이 눈짓하자 한 군관이 여전히 주먹밥에 빠져있던 여진 전령을 데리고 막사를 나갔다.
그러자 광해군이 말을 이었다.
“일전에 이야기 했던 포로 전향 작업. 시작하죠.”
“너무 이르지 않겠습니까? 저들이 완전히 우리에게 겁을 먹으려면 적어도 한두 차례의 전투는 더 거쳐야 할 텐데요.”
이순신의 걱정에 광해군이 미소를 그려보였다.
“어차피 공포로만 이루어질 작업은 아니었습니다. 당근을 조금 더 빨리 제시해 보죠.”
광해군의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한 이순신에게 다시 한 번 미소를 그려 보인 광해군이 자신을 따라 전장까지 나온 환관 알지를 돌아봤다.
“서두르라 전하라.”
광해군의 명을 받은 알지가 고개를 조아려 보이고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자신의 뜻을 몰라 궁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이순신에게 광해군이 말했다.
“치중대(輜重隊)에게 속도를 높여 내일 아침까지 도착하라는 소식을 전하러 간 겁니다.”
치중대, 그러니까 보급대다.
앞서 거론했던 겨울옷과 솜버선, 그리고 별도의 식량 등을 실은 치중대가 북위별시위의 뒤를 하루거리에서 따르고 있었다.
광해군은 그것을 서둘러 부른 것이다.
“아직 보급이 필요한 정도는 아닙니다만······.”
“우린 그렇지만 저들은 아니지요.”
“저들이라시면······?”
“여진인들 말입니다. 저들을 꼬셔볼, 아니 사볼 생각입니다.”
광해군의 말에도 이순신과 제장들은 그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들의 지식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살아온 시대가 달랐다.
현대적인 자유로운 사고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을 바라보며 광해군은 그저 작게 웃어보였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