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37화 (38/121)

37. 현주야 사랑한다

37.

작가 유수영은 이지우가 출연한 영상을 몇 번씩 재탕하고 있었다.

깡패, 대학생, 방송국 AD, 고등학생, 그리고 가장 최근 작품이자 유수영 자신의 작품에서 연기한 저승사자까지.

연기 스펙트럼이 넓은 건 둘째라 치고 연기하는 모든 배역의 정확도가 소름이 끼쳤다.

그래, 정확도. 대본을 쓰는 작가만이 느낄 수 있는 영역이었다.

마치 작가가 구상해놓은 캐릭터를 그대로 현실로 만들어놓은 듯한 모습. 유수영 작가는 아마도 이지우가 연기했던 캐릭터를 만든 작가라면 같은 생각을 했을 거로 생각했다.

'강림차사'는 쉽지 않은 역할이었다. 각본을 쓰면서도 어려웠고, 배우가 이 느낌을 잘 살릴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컸다.

너무 가벼우면, 수백 년을 살면서 무수히 많은 죽음을 보았던 저승사자라는 매력이 죽어버린다.

그렇다고 너무 무게를 잡아버리면, 가벼운 일상물인 드라마 톤을 해쳐버린다.

그렇기에 대본 작업을 하면서도 캐릭터 조형에 어려움이 많았다.

가벼운 대사 중, 한두 마디의 무거운 대사로 그 아슬아슬한 균형을 맞춰야 하는 배역.

그런데, 이지우의 '강림차사'는 유수영 작가의 생각 이상이었다. 발전되고 입체적인 캐릭터의 조형은 물론이고, 촬영장에서 번득이는 대사들.

그래 저 대사들.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감정을 욱여넣는다. 캐릭터를 구축하고 시청자를 설득한다.

마치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그중 백미는 역시, 자물쇠를 이용한 마지막 대사. 원 대사와 별 차이 없었으나, 배우가 만들어놓은 캐릭터와 화학 작용을 하는 듯했다.

이외의 다른 영상도 마찬가지. 특히 [폭력의 사슬]과 [민주를 기다리며]에서 배우와 대사의 일체감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살아있는 캐릭터는 가만히 놔둬도 알아서 움직인다. 활자를 벗어나 마치 생명체인 양 맥동하여 제멋대로 스토리를 만들어 버린다.

배우가 주는 강한 작가적 영감.

유수영은 미친 사람처럼 키보드를 두드렸다.

유수영은 진심으로 이 작품이 단막극부터 제작되어서 다행이라 느꼈다.

그저 다 만들어진 캐릭터가 하는 행동을 글로 옮겨 적기만 하면 됐으니 말이다.

그리고 글이 막힐 때면···

'띠띠띡'

"네, 지우 씨! 잘 지내시죠?"

"아 네, 다른 게 아니라.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요."

"그, 지우 씨라면 아주 황당하거나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그러니까 평범한 사람이 저승사자가 보인다거나 하는 상황이요. 그런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할까요?"

"네? 잘 모르겠다고요? 아니 촬영장에서는 잘만 대사를 바꾸는 분이···"

"보조작가를 뽑으라고요? 뽑을 수 있으면 진작에 뽑았죠! 류 PD님이 구하고는 계시는데···"

"잠시만 기다려 보라구요? 아는 작가가 곧 시간이 생길 것 같다구요?

***

"분량이 늘었네요?"

"네. 작가님이 '강림차사'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나 봐요."

김 실장이 들고 온 기획서와 1~3화 분량의 대본.

내가 이전에 봤던 [저승 카페]와 내용이 바뀌어있었다.

그래, 이거지. 현주가 주머니 속의 패트리엇 미사일이라면, 나는 주머니 속 ICBM쯤 되지 않겠나.

내 연기를 봤으면 이 정도는 해줘야지.

그런데··· 과하다.

대사가 과하다. 첫 장편 드라마를 맡은 뒤, 너무 힘을 줘서 글을 쓴 게 느껴졌다.

유수영 작가 대사의 특징. 도치법과 캐릭터의 특징을 살린 말투.

이게 가끔 나와야 임팩트가 있고 느낌이 사는데 마구 남발하는 게 보였다.

작가가 이미 만들어진 캐릭터를 의식하고 있다. 지나치게 내가 만들어놓은 캐릭터에게 휘둘리고 있는 게 보였다···.

어쩐지 캐릭터의 심리나 반응에 대해서 계속 전화하더니만···

미래, 그러니까 내 입장에서는 과거. 그때는 이렇지 않았다.

나중에 유수영 작가도 자리를 잡고, 보조작가 여럿을 두고 작업하게 됐을 때는 이런 경우가 없었다. 작가마다 다르지만 보통 장편 드라마는 혼자서 작업하는 경우가 잘 없다.

팀을 꾸리거나, 보조작가를 두거나 하는 경우가 대부분.

아직 신인 작가인 유수영이 단막극이 방영되고 한 주가 채 지나지 않은 시간에 뽑아내 대본의 캐릭터는 미쳐 날뛰고 있었다.

이러면 나가린데.

잡아주거나, 다듬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

대본을 들고 고민하고 있을 때, 김 실장이 말했다.

"아참, 이지우 씨. 그 이정건 씨가 '백풍차사'에 캐스팅됐다는 소식 들었어요?"

"네? 정건이 형님이요?"

"네? 이지우 씨 이정건 씨랑 친분 있었나요?"

"아뇨. 정건 Lee. 제가 요즘 영어 대본을 많이 보다 보니 헷갈렸네요."

아니, 형이 여기서 왜 나와.

세계 3대 영화제에 발자국을 새기며 한국 영화 중흥을 이끌었던 배우다. 10년쯤 후에 말이다.

예기성 이후 탑배우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배우이기도 하다.

"KBC에서 반응이 없어서, 우리 쪽에서 이정건 씨 엮어서 기사 쏘려고요. 아마 오늘 중으로 기사 뜰 거예요."

"아··· 장작···"

"네?"

"아뇨. 암껏두 아녜요."

김 실장이 사람 좋아 보여도 이 바닥에서 고속 출세한 사람다웠다.

아직 '이지우'라는 이름이 화제가 되는 상황. [폭력의 사슬]이 아직 영화관에 걸려 있는 데다가, 최근 단막극으로 반짝 이슈를 끌었다.

거기에 더해 바로 미니시리즈까지 방영이 예정되어 있으니 화제성을 이어가기에 딱 좋지. 사그라들어가는 화제를 새로운 장작을 집어넣어 살리려는 것이다.

그 땔감이 이정건이면 오히려 과분할 정도고.

현시점에서 이정건이라는 배우의 이름값만 놓고 보면 SBC, MBS에 출연하는 배우들에 비해서 절대로 밀리지 않으니까.

그리고 내가 만들어갈 큰 그림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고.

"그리고 백룡 영화제 신인상 후보로 뽑혔어요. 크··· 데뷔한 해에 신인상 후보까지, 이대로 수상까지 하면 딱인데."

아··· 백룡 영화제···

좋지 않은 추억이 있는 곳이라, 내키지는 않지만 이게 또 안 가면 안 간다고 난리를 친다.

그리고 내가 전생에 국내에 있는 영화제의 상 중 유일하게 못 받은 상이 있다.

신인상이었다.

***

[이정건 차기작은 스크린이 아니라 드라마?]

[이정건 안방 복귀. 차기작은 KBC [저승 카페]]

[이정건의 차기작 [저승 카페]?]

기사가 올라가자마자 실검에 [저승 카페]와 이정건이 주르륵 올라갔다.

그리고 이어지는 후속기사.

[SBC [단군삼신기], MBS [겨울이었다], KBC [저승 카페]. 방송 3사 3색 드라마 전쟁]

[ [저승 카페] 최근 화제의 배우 이지우 단막극에 이어 미니시리즈 출연]

ㄴ요즘 나오는 신인 배우 중 얘가 제일 나음. ㄹㅇ 연기 개잘함. [폭력의 사슬] 꼭 보셈. 영화도 재밌고 진짜 연기력 미쳤음.

ㄴㅇㅇ 처음 봤을 때 어디서 저런 양아치를 데리고 와서 연기시켰나 싶었음. 고등학교 때 나 괴롭히던 일진 생각나서 PTSD 오더라. 근데 [민주를 기다리며] 보니까 아닌 거 같더라고. 그냥 저 새낀 연기를 잘함.

ㄴ우리 지우 꽃길만 걷자♡

이번엔 내가 쓴 거 아니다.

이정건의 출연 소식과 더불어 후속타로 이어진 기사에 슬슬 나에 대한 반응도 올라오고 있었다. 아직 화제성이 식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원래 연예인은 악플보다, 무플이 아픈 법이니까.

"어? 지우 기사 났네?"

"어어 [저승 카페] 공식 기사 올라왔어."

시청각 자료실에 갖춰진 영상 재생용 PC로 기사를 검색하고 있자, 옆쪽에서 현주가 얼굴을 빼꼼 내민다.

"현주야 너 기말 끝났지?"

"어? 어. 오늘 마지막 시험 방금 보고 오는 길. 왜?"

"알바 할래?"

"무슨 알바?"

"보조작가!"

"보조작가라니? 영화?"

"아니, [저승 카페]. 그 유수영 작가님이 혼자서 작업하시는데 아무래도 첫 장편이다 보니까 무리가 가는 것 같더라고. 혹시 관심 있으면 주선해 줄까 싶어서.

깜짝 놀라는 현주의 표정.

그녀의 표정을 보고 아차 싶었다.

나는 이전 삶에서 언제 추락해도 이상하지 않을 위태로운 배우의 삶을 살았다. 끊임없이 가십에 시달렸고, 그런 환경을 돌파하기 위해서 치열하게 연기했다. 그걸 조마조마하는 마음으로 옆에서 지켜봤던 게 현주다.

20살. 놀기에도 모자란 그녀의 대학 생활을 내가 혹시 몰아붙인 건 아닐까? 그녀의 꿈을 돕는다는 변명으로 치열한 프로의 세계로 그녀를 밀어 넣은 건 아닐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제안을 했던 게 후회되기 시작했다.

"좋지, 나야 너무 좋지! 와! [저승 카페] 너무 좋았는데, 지금 가면 돼? 작가님 전화번호는? 지금 전화하면 실례이려나? 일단 전화번호 내놔!"

그러면서 내게 내미는 휴대폰.

오히려 반색하며 방방 뛴다. 꾸밈이 없이 좋아하는 모습.

아! 내가 착각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회귀한 두 번째 삶이 전능하다 착각하고 있었다.

미래를 알고 어떤 작품이 흥행할지 알고 비트코인이 급등하는 것을 아니까.

그리고 그건 돈에 관한 것이지 현주에 관한 게 아님을 깨달았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이 전생의 현주가 행복했던 것은 아니다. 현주의 행복을 돈으로 컨트롤 할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연기를 하면서 행복했듯이, 현주 또한 자신의 삶, 자신의 꿈을 충실할 때 행복하지 않을까?

내 삶에 휘둘리지 않도록 그녀의 삶을 응원하고 지원해줘야 하지 않을까?

그녀가 대학생으로서 즐기기를 원하든, 작가의 삶을 원하든 선택권을 주고 도와주는 것이 맞지 않을까?

유수영 작가의 전화번호를 찍어주려 휴대폰을 받은 뒤, 잠시 고민했다. 그때, 현주의 전화가 울렸다.

수신자 : 개새끼

"현주야 전화 왔다. 그런데 누구야?"

"아··· 받지 마. 미친놈 있어."

"수신 거부하거나 차단해버려."

"하··· 했지··· 차단하면 모르는 번호로 자꾸 전화해서 차라리 이렇게 전화 오면 그냥 끊어버리는 게 낫더라고."

난감한 표정의 현주.

기억이 난다. 이맘때쯤 현주를 쫓아다니던 녀석을 내가 잡아서 그러지 마시라고 한 소리 했던 것 같은데···

현주의 대학 생활은 대학 생활이고, 현주한테 찝접거리는 건 못 참지.

소속사도 생겼겠다, 이제 공개할 때가 되었다. 언제까지 시청각실 데이트만 즐길 수 없으니 말이다.

"우리 일단 나가자. 나가서 놀자.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음식 없어?

"어? 좀 그렇지 않나? 사람들이 알아보고, 또 예전에 카페에서처럼···"

"신경 쓰지 말고. 일단, 나가자!"

***

청운 엔터테인먼트에서 준비해준 벤을 타고 도착한 시상식장.

입구부터 깔린 붉은 카펫이 오늘 이곳이 시상식장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포토라인에 잠시 서고 입장한 시사식장.

카메라워크를 고려한 내 지정석.

김범과, 이수한 감독이 먼저 자리 잡고 앉아 있었다.

김범은 소속사에서 가라고 해서 왔을 테고, 이수한 감독은 신인 감독상에 후보로 올라왔다.

내 기억에 이수한 감독은 [폭력의 사슬]로 백룡 영화제 신인 감독상 받았던 걸 차기작 홍보 수단으로 삼았었다. 하물며 지금의 [폭력의 사슬]은 그때보다 훨씬 더 좋아졌고.

그렇기에 긴장하고 있는 이수한 감독을 보니 우습다. 이수한 감독이 받는다고 말해봐야 안 믿겠지. 역시 우스운 형. 이래야 이수한 답지.

"형 좀, 긴장하지 말래두. 형이 신인 감독상 못 받으면 누가 받겠어."

"아 놔, 긴장 안 하는 니가 이상한 거야 인마!."

"그깟 상 받는 게 뭐 대수라고. 로카르노랑 부산국제영화제 신인 감독상 받은 사람이 이런 로컬 시상식에 쫄면 어떻게 해."

"어휴, 말을 말자."

"크크크, 이번엔 나 상 못 받았다고 욕하지 말고."

"그리고 너 이번에 신인 남우상 못 받으면, 나 다음 작품부터 백룡에서 주는 상 보이콧 한다."

축하 무대가 끝나고 본격적인 시상이 시작됐다.

시상식 1부 초반부에 수여되는 '신인 남우상'.

'신인 배우 시상자는 전년도 수상자였던 조대호 씨가 수고해 주시겠습니다.'

남자 MC의 말에 등장하는 시상자.

사실, 부산국제영화제의 '올해의 배우'와 백룡 영화제의 '신인 남우상'은 카테고리가 다르다.

백룡 영화제의 '신인 남우상'은 부산국제영화제의 '올해의 배우'와 다르게 오직 신인 배우에게 수여되는 상이다.

나도 내심 이번 '신인 남우상' 기대하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상을 받고 싶은 게 아니라 수상소감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멋지게 차려입은 남자 시상자가 수상자가 적혀있는 봉투를 열고 잠시 뜸을 들인다.

그리고,

"수상자는 [폭력의 사슬] 이지우! 박수로 축하해 주시기 바랍니다."

음··· 이것도 일이다. 많은 영화를 찍었고, 많은 상을 받았다.

그리고 여기는 카메라가 돌아가는 곳.

그렇기에 일이다.

수상자 발표가 된 직후, 깜짝 놀라는 척 한 번. 마치 정말 나 맞는지 확인하는 듯 좌우를 둘러보고 환하게 웃어준다. 주변의 다른 시상자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 몇 번. 이때 주의할 점은 불이 들어온 카메라를 쳐다보면 안 된다. 이러면 카메라 의식한 거 티 난다.

이수한 감독과 김범의 축하받으며 시상대에 올라서자, 시상자가 트로피와 꽃다발을 준다.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전생에 참 많은 소감을 발표했었다. 그때는 못 했던, 아니 안 했던 말.

"감사합니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던 한해였습니다. 저같이 문제를 많이 일으킨 배우에게 과분한 상이라 생각합니다. 저를 키우느라 고생하신 어머니 감사합니다. 이 모든 게 어머니 덕분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시상식을 가득 메운 관람객을 바라봤다. 수 없이 왔지만, 이번이 새로운 건 어쩔 수 없다. 다시 태어나고 첫 수상소감이니까.

그리고 예전에 하지 못했던 말을 했다.

"현주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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