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38화 (39/121)

38. 잘 나가는 사람에겐 놀이터, 못 나가는 사람에게는 지옥

38.

"애새끼들이 여기가 놀이터인 줄 아나."

수상을 마치고 내려와 앉으니 뒤쪽에서 들으라는 듯이 말하는 소리.

무시했다. 일생에 한 번 있는 신인상 수감 소감을 사랑 고백으로 채우는 신인배우. 나이 좀 있는 배우들이 봤을 때는 버릇없어 보였을 것이다. 열등감에 찌든 사람은 배알 꼴렸을 것이고.

당황섞인 축하를 건네는 김범과 이수한 등의 [폭력의 사슬] 일행들. 그들이 소란스럽게 나를 맞이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을 수도 있다.

[폭력의 사슬] 일행들은 제작팀 연령대가 낮으니 더 안 좋게 보였을 수도 있겠지.

제일 연장자인 이수한이 고작 20대 후반이고 나와 김범은 20대 초반이니까.

내 의도와는 달리 어린 친구들이 영화제를 가볍게 여긴다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뒤쪽에서 들린 말은 그런 뉘앙스가 아니었다. 교도나 훈계가 아닌, 열등감에 찌들어 적대적이고 모욕에 가까운 비난.

그런데 [폭력의 사슬] 팀에는 이런 거 무시가 안 되는 사람이 있다.

"애미 씹, 애새끼한테 한번 처맞아 볼-"

내 옆자리에 앉은 김범이 일어서려는 찰나.

내가 그의 팔을 강하게 잡고 아래로 당겼다. 김범이 일어서다 주춤하며 다시 앉았다. 다행히 목소리는 크지 않았고, 축하공연의 소음에 묻혔다.

'카메라 돌아간다. 놀이터 맞아. 잘나가는 사람한테는 놀이터, 못 나가는 사람한테는 지옥. 그게 이 바닥이야.'

내가 웃으면서 그의 귓가에 속삭이자, 살짝 숨을 몰아쉬는 김범.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기를 바랐다.

로카르노 찍고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인정받은 영화다. 백룡 영화제가 대단한 건 맞지만 그래 봐야 한국 한정 로컬 영화제. 이미 내년 1월 선댄스 영화제 경쟁 부문까지 초청받은 [폭력의 사슬]의 영화적 성취를 국내 시상식에서 인정받을 필요가 있을까?

이미 [폭력의 사슬]의 가치는 증명됐는데 저런 시기 어린 말에 일일이 대응해 줄 필요는 없었다.

김범이 급발진하는 이유를 대충 알고 있다. 그가 내게 마음의 빚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알고 있고. 고맙단 말을 말로 하지 못하는 그의 성격상, 이런 식으로 내가 욕먹는 것을 참을 수 없을 테지.

어쩌면 자신이 희생하더라도 우정을 보여주고 싶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최소한의 마음의 빚을 덜어내고 싶었을 수도 있고.

이 역시 친구로서 마음만은 합격, 배우로서 불합격.

김범이 잠시 진정하나 싶더니 활짝 웃으면서 뒤돌았다. 그리고 들릴락 말랑한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선배님 한 번만 더 헛소리하시면 아가리 세로로 찢은 다음 공구리쳐서 인천 앞바다 구경시켜 드릴게요."

김범은 객관적으로 잘생긴 얼굴이다. 그런데 굉장히 사납게 생겼다. 얼굴에 메이크업으로 지워지지 않는 상처도 몇 개 있고.

오죽하면 소속사들이 사고 칠 관상이라고 오퍼에 소극적이었겠나.

그런 김범이 활짝 웃으면서 저런 소리를 하면 그건 그거대로 공포였으리라.

상대가 기세에 눌려 아무 말 못하자, 자세를 바로 하고 나 들으라는 듯이 혼잣말하는 김범.

"왜, 뭐. 저 카메라 사운드는 안 들어가잖아."

턱짓으로 우리를 찍고 있는 카메라를 가리키며 말했다.

김범 많이 컸네. 카메라도 다 구분하고.

확실히 처음 김범이 반쯤 일어났을 때 카메라에 잡혔어도, 다시 웃으면서 대화하면 그냥 친한 배우들끼리 장난 정도라 생각하겠지.

축하무대의 소리 때문에 사운드가 잡혔을리도 없고.

박정태 주변 배우들 얼굴은 똥 씹은것처럼 변했지만 말이다.

뒤에서 웅얼웅얼 거리는 말이 몇 번 더 들렸지만 무시했다.

누군지 안다. 왜 저러는지도 알고.

SBC [단군삼신기]에 출연하는 박정태.

박정태와 나는, 아니 [폭력의 사슬]은 인연이 좀 있다. 박정태가 출연했던 영화 [비천도룡기]가 같은 시기에 개봉한 [폭력의 사슬]에 개처발려 버렸다.

정통 무협 영화를 표방했던 [비천도룡기]는 제작비 50억 원이 넘는 돈이 투입된 영화다. 지금 기준으로 상당히 높은 제작비을 투입한 영화고, [폭력에 사슬]의 50배가 넘는 금액이 투입한 대작이었다.

저 50억 원에는 마케팅 비용도 상당한 부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마케팅이라곤 포스터 한 장 달랑인 영화, 그것도 독립영화인 [폭력의 사슬]에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관객수는 시상식이 진행되는 12월 기준, [폭력의 사슬] 77만 명, [비천도룡기] 11만 명.

7배가 가뿐히 넘는다.

[폭력의 사슬]은 아직 상영 중, [비천도룡기]는 이미 영화관에서 철수한 상태.

오늘 [폭력의 사슬]은 '신인 남우상'에 이어 '신인 감독상'까지 받을 예정이다. 백룡 영화제가 거대한 [폭력의 사슬] 광고판이 된 셈. 그렇기에 앞으로 관객 스코어는 더 차이 날 예정이고.

결정적으로, 박정태가 출연하는 [단군삼신기]와 [저승카페]가 3개월 후 주말 10시에 붙게 되었다.

안 그래도 눈엣가시 같은 내가 상을 받으며 설치는 꼴이 마음에 안 들었겠지.

박정태가 나를 미워하는 마음은 이해가 간다만, 글쎄··· 앞으로 방송국에서 오며 가며 마주칠 일 없는 저 녀석과 굳이 말을 섞을 필요가 있을까.

그런 마음으로 무시했다.

그렇게 최우수 연기자부터, 대상까지 모든 시상이 끝났다.

[폭력의 사슬]일행들과 함께 시상식장을 빠져나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데, 묘하게 신경을 긁는 [비천도룡기]일행들.

"백룡이랑은 이상하게 인연이 없네."

"어휴, 정태 씨 이번에 [단군삼신기] 들어가셨다면서요. 그거로 연기대상 받으시면 되죠."

"아니 뭐 그게 뭐 제가 잘한다고 받을 수 있나요. 작품이 좋아야죠. 작품 잘 만나는 게 중요한 거 아니겠어요."

그러면서 우리 쪽, 정확히는 나를 본다.

마치 내가 운 좋게 작품 잘 만나서 상을 탄 것처럼 말이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를 주며 말리는데도 저러는 것 보면 지금까지 이 바닥에서 살아남은 게 용하긴 하다.

멍청한 새끼. 니가 그렇게 말하면 같이 있는 [비천도룡기] 팀은 뭐가 되나. 본인은 잘했는데 [비천도룡기]가 망작이라 상을 못 받았다?

옆에 있는 [비천도룡기] 감독의 얼굴이 썩어들어가는데도 나를 노려보느라 모르고 있었다.

예의도 없고 눈치도 없다.

표정이 썩어들어가는 사람이 우리 쪽에도 하나 있었다. 더 하면 나도 김범을 말리기가 힘들 것 같은데.

그러거나 말거나 박정태는 계속해서 입을 놀리고 있었다.

"KBC가 대하드라마 말아먹고, 힘들긴 한가 봐요. [단군삼신기]랑 동 시간대 들어오는 KBC 드라마가 좀 이상하긴 하더라고. [저승식당] 이라 그랬나? 배우들도 그렇고."

아 씨··· 그냥 말리지 말아버려?

김범이 한숨을 쉬며 진짜 저 새낀 안 되겠다는 표정으로 나서기 직전.

내가 먼저 나섰다. 어차피 두 번 다시 볼 일 없다는 생각에.

"선배님, 그거 아세요, 이바닥 강한 놈이 살아-"

그리고 내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한 남자의 말.

"아, 정태 씨 오랜만이에요. 그런데 혹시 그 이상한 드라마가 [저승카페]말하는 건 아니죠?"

그때 [비천도룡기]팀 뒤에서 정건Lee가 나타났다.

한 손에는 꽃다발. 한 손에는 오늘 받은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든 채로 말이다.

난감한 표정의 박정태.

"아? 정건 씨, 오랜만. 오늘 남우주연상 축하해. 근데 정건 씨 이번에 새 작품 들어간다는 게 [저승카페]였어? 아, 몰랐네. 그랬구나. 동 시간대 편성인데 선의의 경쟁. 알죠?"

내가 알기에는 이정건이 박정태보다 몇 살 더 많은 걸로 아는데 딴소리를 하며 교묘한 반존대로 신경을 긁는 것이 보였다.

그 꼴을 보는 주변의 사람들 눈에는 그저 쫄아버린 자존심을 채우려는 한심한 행동으로 보였고.

"어이, 정태 씨. 범띠 아니에요? 나 쥐띤데?"

"네? 아, 그러셨구나. 범띤 줄 알았어요."

박정태는 제 혼자 몇 번 웅얼거리더니 자리를 피했다.

그런 박정태를 보고 이정건이 피식 웃으며 [폭력의 사슬]일행이 있는 곳으로 왔다.

아마도 이 상황에서 이정건의 등장은 우연이 아닌 듯 했다.

"안녕하세요. 이정건입니다. 이수한 감독님 맞으시죠?"

"네? 네."

탑배우가 아는 체를 하자 살짝 당황한 이수한 감독.

"팬입니다. 차기작 언제십니까?"

그리고 나를 보고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강한 놈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놈이 강한 거다, [황산벌 전투] 맞죠?"

"네? 맞습니다."

때마침 들어온 김주하 실장과 이정건의 매니저.

"지우 씨, 김범 씨 차 준비됐어요."

"정건아 차 대기 시켜놨다."

시상식장에 일반 관람객들과 배우들의 동선을 분리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출입구에 차를 대기시켰다는 말이었다.

"후배님들 오늘 시간 있으면 나랑 촉촉하게 놀아볼래요?"

내가 김주하 실장을 바라봤다. 김주하 실장은 오늘 내가 친 사고로 할 말이 많은듯해 보이지만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와 귓속말로 짤막하게 할 말만 전했다.

'지우 씨, 내일 회사로 일찍 와줘요.'

***

좀 놀랬다. 내가 아는 이정건, 그러니까 20년 후의 이정건은 딱 캡틴 코리아 그 자체였다.

술, 담배 전혀 안 하고 쉴 때는 운동만, 그 흔한 연애스캔들 한번 없이 오직 연기 파고들어 갔던 배우. 그 생활을 50세까지 유지했던 연기에 미친 배우.

그의 사생활을 알고 있던 나였기에 그가 한 말이 충격이었다.

촉촉하게 놀아? 그런 단어랑은 담을 쌓고 살아온 사람이니까.

듣는 입장, 아니 같이 따라온 사람의 입장에서는 여기는 더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사우나라고?

오늘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배우가 촉촉하게 사우나? 에라이···

제 딴엔 어린 후배에게 전하는 위트있는 농담쯤으로 한 말이었겠지만, 알맹이 40대 중반인 나에게도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김범은 뭘 기대했는지 모르겠지만, 같이 따라왔다가 땀 빼는 중이고.

이수한 감독은 벌써 감독 티를 내면서 거절했다. 배우와 개인적으로 자리하는 건 촬영 후 뒤풀이 밖에 없다면서 빠졌다.

아니, 분식집에서 나랑 설거지 하면서 노가리 까던 건···

감독으로서 카리스마 보호를 위해 입 닫아 줬다.

"후배님들, 내가 갑자기 여기로 데려와서 좀 놀랬죠?"

"아 네, 좀 그렇죠."

이정건은 지금 30대 초반으로 나와 10살이 넘게 차이가 난다.

사실 한참 위의 선배가, 같은 드라마에 출연하는 후배를 우연히 만나서 밥 한 끼 혹은 술 한잔 사주는 게 뭐 그리 특별한 일이겠는가.

"내가 먹는 걸 좀 가려서요. 게다가 술을 안 먹다 보니, 후배들 만나도 딱히 갈 데가 없더라고. 카페는 또 보는 눈이 많고. 남자 셋이서 카페에 앉아 있으면 또 좀 그렇잖아?"

초면에 빤스도 안 입고 샤워 타월 하나 걸친 채 마주 앉아 있는 건 괜찮고?

"그리고 여긴 기자들 카메라나 녹음기 못 들고 오잖아. 처음이 좀 불편하지만 여러 곳 가봐도 이야기하긴 이런 데가 좋더라고."

그러면서 시작된 이야기. 이정건은 [폭력의 사슬]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물어봤다. 영화에 대한 해석, 의미. 그리고 감독의 스타일과 로카르노 영화제의 분위기나 프로그래머들의 성향 등등.

그리고 [폭력의 사슬]에 대한 이야깃거리가 떨어지자 적극적인 조언을 하기 시작했다. 연기에 관한, 그리고 연예인으로서의 커리어 관리에 대해서 나이 많은 선배가 할 법한 충고들.

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전생에서 못 봤던 이정건의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좋지 못한 소문을 뿌리고 다녔으니 그의 눈에는 눈에 차지 않은 후배였겠지.

반대로 지금 나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괜찮은 후배가 생겨 좋아하는 선배의 모습이었다.

"캬, 멋지더라. 신인상 수상 소감으로 여자친구한테 고백을 빡! 여자친구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냐"

이미 한참을 대화하면서 편하게 말하는데 익숙해진 이정건.

"선배님도 좋은 분 만나시면 되지 않습니까."

"나? 하··· 나 이미 결혼했어."

"네?"

"연기와 결혼했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저렇게 말하는데 웃을 수도 없고···

약간 바르게 미친 걸까, 미친 사람이 바른 행동을 하는 걸까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아참 두 사람 군대는 어떻게 해?"

묘하게 의도가 느껴지는 질문.

직감했다. 이정건도 알고 있구나, 싶었다.

나처럼 미래의 일을 세세하게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대충 뭔가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듯했다.

아마도 대형 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된 스타답게 정보력이 뛰어날 터였다.

"저는 면제입니다."

김범이 먼저 대답했다.

김범은 생계유지 곤란사유로 이미 영화촬영 이전에 면제 판정을 받았다고 했다. 도망간 어머니가 호적정리를 하지 않았고, 장애로 판정받은 할머니까지 포함하여 부양가족과 재산까지 면제 조건이 충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나를 바라봤다.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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