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감정정리
36.
이정건은 쇠질을 하면서 무의식적으로 리모컨을 조작했다.
'틱틱틱'
몇 번의 채널 변경 끝에, 'KBC 단막극장'의 오프닝이 나오고 이내, 광고 화면이 나왔다.
화면 우측 상단에 [저승 카페]라 제목이 떴다.
'흐음···'
잠시 고민하던 이정건은 리모컨을 내려두고 다시 쇠질을 시작했다.
매니저가 들고 와 우연히 읽었던 대본. [저승 카페].
한 번 읽었던 대본이었고, 상상 속의 장면과 실제로 연출되는 장면이 얼마나 다를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책이 원작인 영화를 우연히 봤을 때의 기대감.
딱 그 정도의 기대감으로 드라마를 봤다.
그렇게 시작한 단막극.
어떤 식으로 보일까를 의식해서 그런 걸까?
연출 방법이 독특하다. 영화적 기법이 곳곳에 묻어난다. 인물을 보여줄 때는 전형적인 TV 드라마의 촬영기법을, 상황을 보여줄 때는 영화적 기법을 사용해서 현실에서 벌어지는 판타지임을 느끼게 한다.
영화와 드라마 두루 출연하는 이정건이기에 알아볼 법한 차이. 그러면서도 시청자를 배려하여 너무 어렵지 않은 연출이었다.
데뷔작이라 생각지 못할 정도의 연출 능력.
잊혀가는 기억 속에서 이름을 끄집어냈다.
'류창진 PD라 그랬지···'
그리고 조연.
처음에는 못 알아봤다. 연기를 잘해서 관심을 가지고 한참을 보니 알아챘다.
[폭력의 사슬]의 그 배우였다.
'이지우라고 했던가?'
***
3개월 후 편성표를 보며 한숨을 쉬는 KBC의 감성태 CP.
감성태 CP가 류창진 PD를 불렀다.
아슬아슬하게 무례하지 않을 정도로 고개만 까딱하는 류창진 PD.
감성태 CP는 류창진 PD의 태도에서 뭔가가 바뀐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단막극 이후에 심리적으로 큰 변화가 있어 보였다.
"미니(미니시리즈) 어떻게 할 거야?"
"이거 하겠습니다."
류창진 PD가 감성태 CP의 질문을 예상이라도 한 듯이 올려놓은 기획서 한 부.
"이거 [저승 카페]잖아. 이걸로 미니로 하겠다고?"
"네. 이거 아니면 안 합니다. 이미 유수영 작가 1화 원고 작업 들어갔습니다."
뭔가 결심을 한 것 같은 단호한 류창진 PD.
"흐음··· 이거 너무 심심하지 않겠냐?"
감성태 CP는 심드렁하게 기획안을 받아 읽었다.
"심심한 거 아니라 잔잔한 겁니다. 단막극 시청자 반응도 좋고, 배우만 좀 잘 쓰면 될 것 같습니다."
감성태 CP도 책임 프로듀서(Chief Producer)로서 보는 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인성과는 별개로 그 또한 많은 프로그램을 연출했고, 흥행시켰다.
그가 봐도 이번에 나온 단막극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저승 카페]였다. 그리고 단막극 중 이례적으로 시청자 반응이 오고 있는 드라마였고.
"그렇긴 한데··· 할 만한 배우가 있겠냐?"
SBC가 이진욱, 박정태, MBS가 황희수 등 탑급 스타를 줄지어 내세웠으니, 이쪽도 비슷한 급으로 맞춰야 화제성을 비슷하게 맞출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스케줄 비어있는 배우 중에선 이정건 정도?
그런데 이정건이 타 방송사의 제작비의 반의반도 되지 않는 이런 미니시리즈, 그것도 장편 드라마를 처음 연출하는 PD의 작품에 출연 할 리 없었다.
"배우는 제가 알아서 꾸리겠습니다. 승인만 내려 주십시오."
"내가 국장님이랑 상의한 다음 알려줄게. 기획서 놓고 가봐."
"상의는 무슨, 저 말고, 그 시간대 미니 할 사람도 없잖습니까."
배 째라는 듯이 말하는 류창진 PD.
주말 10시 미니시리즈 편성. 보통 때와 같으면 모든 PD가 군침을 흘릴만한 자리다. 하지만 같은 시간대 맞상대해야 하는 SBC는 거대 예산을 퍼부은 장편 판타지 드라마를 준비 중이고, 얼마 전 MBS는 스타 마케팅을 통한 정통 멜로를 방영한다고 맞불을 놨다.
연차 좀 쌓이고 CP 노리는 짬 먹은 PD들이 모두 들어가길 거절한 자리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류창진 PD였다.
젊은 PD 중 가장 실력 괜찮은 PD. 적당히 선방하면 이전 단편 독립영화 특선에서 실수한 걸 만회 할 수 있고, 망하더라도 대작 드라마에 낀 명예로운 패배 아니겠는가.
고개를 끄덕이던 감성태 CP, 류창진 PD의 말투가 거슬리지만 수긍하며 달래듯이 말했다.
"미안한데, 류 PD. 상황은 알지?"
드라마국 자원과 예산을 모조리 끌어다 쓴 KBC 대하사극이 애국가와 시청률 경쟁을 하는 상황.
그 대하사극이 끝나는 시기에 맞춘 미니시리즈다. 제대로 된 지원과 예산 할당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상황이요? 네, 압니다. 궁지로 몰린 후배를 자기 살려고 사지로 몰아가는 선배 PD들 말씀하시는 겁니까?"
"뭐··· 뭐라고?"
"아니면, 대작 드라마 사이에서 말라 죽으라고, 예산편성 제대로 안 해주는 드라마국 상황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너, 인마! 왜 이리 감정적이야! 일을 일답게 해야지, 우리가 너 미워서 그런 거야? 상황이 안 좋은 거지 누가 니가 미워서 그러는 거냐고 일을 그따위로 하는 새끼가 어딨어! 싸가지 없는 새끼."
류창진 피디는 감성태 CP의 '감정적이다'라는 말에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동안 쓸데없는 일에 너무 많은 감정을 낭비했음을 느꼈다.
최근의 단막극 촬영장이 생각났다.
자기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직원들 사이에서 미움받는 배우. 상황이 안 좋았다는 변명대신, 사방에 적밖에 없는 촬영장에서 자신의 몫을 완벽하게 하는 배우. 이성적으로 말이다.
어차피 류창진 PD는 KBC에서 찍혀 커리어를 제대로 쌓기가 힘든 상황. 이왕 이렇게 된 거, KBC에서 장편 드라마까지 필모그라피를 쌓은 다음 종편으로 이적할 생각이었다. 이성적으로 판단 했을 때 최적의 행동이었다.
"어차피 저, 패전처리 시키실 거, 드라마 내용에는 손대지 말아 주십시오. 승인해 주신 걸로 알고 팀 꾸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곤 류창진 PD는 CP 실을 나왔다.
***
단막극의 의미.
폐지와 부활이 반복되는 단막극. 이건 뭐 지상파 3사 모두 마찬가지다.
폐지될 때마다 나오는 말.
신인의 등용문의 역할. 단막극이 없어지면 많은 신인 배우, 작가, PD 중 옥석을 어떻게 가릴 것인가?
마이너 장르의 탈출구. 매번 배우만 바뀌어서 나오는 똑같은 사랑놀이. 재벌 2세, 가난한 여자 주인공만 나오는 식상한 드라마 판에서 소수의 취향도 존중해 달라!
이런 사회적 의미를 보존하기 위해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것. 방송사는 이런 단막극을 투자로 생각해야 한다고 보는 시선이 있다.
그런데 막상 단막극이 부활하면 안 본다.
신인 배우, 신인 작가, 신인 연출자가 뭉치고 의기투합하여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라고?
좆까라 그래라.
어떤 미친놈이 사회적 의미를 고려하며 단막극을 보겠나?
드라마는 재밌어야 하고, 끝까지 보게끔 자극적이어야 하며, 고착된 장르를 파괴하여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내야 한다.
유류 콤비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나를 탐탁지 않아 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내가 꾸역꾸역 연기를 했던 이유였고.
그만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방향과 대작 드라마들 사이에서 살아남는 이유.
시청률 4%.
[저승 카페]의 성적표다.
고작 4%의 시청률로 새로운 시장이 만들어지는 흐름을 만들어 냈다.
[이지우, KBC 극적 화해? 단막극 [저승 카페] 방영]
[단막극 [저승 카페], 다시 보기 열풍]
[KBC 단막극장, 일상의 판타지 [저승 카페] 이후 이어지는 단막극은?]
아마도 KBC와 청운 엔터테인먼트에서 작업한 것으로 보이는 기사 몇 개. 그리고 단순히 내 화제성에 묻어가려는 기사 몇 개.
그리고 시청자의 진짜 반응.
KBC 시청자 게시판.
단막극이기에 [저승 카페] 게시판은 없었다.
갈 곳 없는 [저승 카페]의 게시판 난민이 찾은 곳.
애꿎은 KBC 대하드라마 게시판이 희생양이 되었다. [저승 카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소감을 말하고 싶어 하는 많은 인터넷 난민이 이곳으로 몰렸다.
기획 당시부터 엄청난 제작비를 들였다고 마케팅한 대하드라마. 하지만 옆 동네 SBC 퓨전사극에 밀려 처참한 시청률로 망하고 있는 드라마이기도 했다.
[아니 ㅋㅋㅋ 이딴거 만들지 말고, 저승 카페나 만들라고.]
[와, 이 드라마 100억 들였다는데, 이 돈이면 저승 카페를 미니시리즈로 5편 만들 수 있음]
[이지우 잘생김]
ㄴ이지우 어서 오고.ㅋㅋㅋ
아, 씨바 걸렸다. 어케 알았지.
'띠리리'
시청자 반응을 모니터링 하고 있는데 온 전화.
음··· 류창진 PD다.
이미 단막극의 방영도 끝난 상황. 아마도 따로 연락할 일이라면···
"네, 이지웁니다."
-이지우 씨, 류창진입니다.
발음을 살짝 굴리는 게 취한 듯 보였다.
"술 한잔하셨나 보네요."
-네 한잔했습니다. 감정정리 하려고요.
"네?"
-[저승 카페] 고생하셨습니다. 후··· 연기 좋네요. 편집하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술을 먹어서 그런 걸까. 뭔가를 내려놓은 듯한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담담했다.
-이지우 씨. 드라마 연기도 잘하시네요. 그··· 그때 리딩장에서 너무 날카롭게 굴어서 미안합니다. 그 이전에 너무 감정적으로 굴어서 미안하고요.
"괜찮습니다. 뭐 연출하시다 보면 그럴 수 있죠.
류창진··· 연출자와 배우들 간의 기 싸움을 그 정도로 끝냈다면 굉장히 양반인 경우다. 그가 내게 가지는 악감정도 이해할 수 있고.
그리고 촬영장에서는 유수영 작가의 전폭적인 신뢰로 오히려 편했었다.
-다름 아니라··· 방금 유 작가랑 한잔하면서 이야기하고 왔는데, 유 작가는 이제 '강림 차사' 역할에 이지우 씨 아니면 안 되겠다고 하네요.
"아···네."
-사실 저도 '강림 차사'는 이지우 씨가 딱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네, [저승 카페] 10시 미니로 확대 편성합니다. 이번에도 '강림 차사'역입니다. 해주실 거죠?
"아··· 캐스팅 관련한 건 회사로 문의 하시면 김 실장님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드디어, 엮었다.
주말 10시. 유일하게 살아남는 드라마.
-참··· 다른 때 같으면 배역 제안하면서 술이라도 한잔 얻어 마셔야 하는데··· 오히려 제안 드리기가 미안하네요.
이거 동 시간대 SBC, MBS 둘 다 대작 드라마 들고나옵니다. 우리랑 예산 4배 이상 차이 나는 드라마고요. 하지만,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유 작가가 칼을 갈고 있어요.
"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잘 될 겁니다."
강한 놈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놈이 강한 거거든.
***
고급 운동기구가 즐비한 거실.
구색만 맞춰놓은 소파 위에서 이전과 같이 대화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야, 정건아. 이거 꼭 해야 하냐?"
"왜? 형이 말한 대로 주말 10시에, 미니시리즈 딱 맞잖아."
배우 이정건과 그의 매니저였다.
"아니, 주말 10시도 좋고, 미니시리즈도 다 좋은데, 왜 하필 KBC의 류창진 PD 거냐고. 생신인 작가에. 하··· 사장님이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보래."
"형, 재계약 때 추가된 조항 잊었어?"
"뭐? 선택권?"
"계약서 다시 읽어줘? 갑은 을과 활동에 관한 이견을 보일 때 갑은 을의 의사와 선택을 적극적으로 존중한다."
"아니, 그건 니가 자꾸 예술영화 찍는다고 하니까 그런 거라면 커리어에 도움이 되고, 예술영화 얼마든지 알아봐 줄 수 있지. 그런데 이건 드라마잖아!"
이정건이 소속사와 재계약을 하면서 적극적으로 주장했던 계약 조항.
배우로서 좀 더 롱런 하기 위해, 그리고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적극적으로 좋은 배역을 찾고 싶었다.
내심 베니스, 칸, 베를린과 같은 영화제에서 수상도 해보고 싶었고. 하다못해 로카르노라도···
돈은 벌 만큼 번 사람들이 흔히 찾는 명예.
이정건은 명예를 좇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 최고의 배우가 되길 원했고.
"캐릭터가 좋아. 이 '백풍 차사'. 전에 없던 캐릭터야. 나른하고 여유롭고. 그런데 뭔가 또 있어 보이고. 스토리도 잘 빠졌어."
이미 이정건은 KBC에 있는 지인에게 물어 대략적인 [저승 카페]의 진행 상황을 알아낸 뒤였다. 대충, 누가 캐스팅됐는지도 알고 있었고.
"하··· 씨바··· 나도 모르겠다. 너 알아서 해라. PD한테 연락 해놓을 테니까··· 자료도 모아서 보내 줄게."
"사장님한테 잘 좀 말해줘. 고마워 형! 내가 형 사랑하는 거 알지?"
"휴··· 중간에 낀 나만 맨날 욕먹지. 알았어! 인마. 준비 잘하고."
이정건도 생각 없이 지른 것은 아니었다.
최근 찍었던 사극 배경의 영화에서의 너무 어두웠던 이미지를 중화도 시키고 싶었고, 들어오는 시나리오 중 마음에 드는 시나리오도 없었다.
그리고, 최근 방영했던 단막극 [저승 카페] 정말 우연히 티비를 틀었다가 보게 된 드라마.
거기서 본 '강림 차사'의 모습.
[폭력의 사슬]과 전혀 다른 연기를 하는 어린 배우의 모습을 봤다.
단막극 [저승 카페]의 주연인 '백풍 차사'를 누르고 티비밖으로 나오는 '강림 차사'의 캐릭터.
자신이라면 저 배우의 완벽한 호응을 해 줄 수 있을 터였다.
겸사겸사, 로카르노 공기 맛도 좀 물어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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