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주머니 속 패트리엇 미사일
35.
짧은 단막극. 류창진 PD가 연락이 오고 난 뒤, 드라마 촬영준비까지 빠르게 준비되었다. 이제 대본 리딩과 본 촬영만 남았다.
그동안 촬영에 들어가지 못했던 이유는 사전준비가 끝난 상태에서 배우 캐스팅으로 질질 끌었던 듯 했다. 류창진 PD와 작업하려는 배우는 완전 무명 배우 말고는 없었다나.
이틀 전 사전미팅 간 류창진 PD가 은근한 어조로 권했다.
"이지우 씨, 진짜 주연 안 해볼래요?"
"네! 안 해요!"
"이이익-"
류창진 PD가 뭘 생각하는지 안다. 지금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나를 최대한 활용하고 싶겠지. 이왕 나와 함께 작업하는 거 주연으로 쓰고 뽕을 뽑고 싶겠지만, 나는 단막극에서 유수영 작가 찬스를 날리고 싶지 않았다.
유수영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같은 배우를 주연으로 한 번 이상 쓰지 않으니까.
사전미팅 이틀 후, 대본리딩.
다시 이틀 후, 촬영 7일간 3번의 촬영.
삼일간 편집 후 바로 방영.
타이트한 계획. [저승카페] 외에도 편성이 잡혀있는 단막극이 5편 내외. 방송국에서 움직일 수 있는 촬영팀의 한계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정 이기도 하다
저 촬영 7일도 주 52시간 따위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하루 촬영 12시간을 상정한 시간 계획이고. 촬영 중 문제가 발생하면 하루 15시간 18시간은 우습게 넘길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맞추기 어려운 스케줄 이기도 하고
KBC에 도착해 지정된 회의실로 갔다. 드라마 사이즈가 좀 크거나 등장인물이 많으면 세미나실 같은 곳을 대관하기도 하지만, 단막극이다 보니 KBC 내의 회의실 하나로 충분했다.
단역 포함해서 배우가 10명이 안 되는데다, PD와 작가 포함 스태프 들도 30명 안팎의 작은 드라마다. 그중 대본 리딩에 필요한 스태프만 모였기에 실제 리딩에 참여한 스태프는 얼마 되지 않았다.
내 화제성을 의식했는지 서브 남주임에도 불구하고 따로 대기실을 마련해 줬다. 덕분에 조용히 대본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주연 배우는 무명이라서 대기실을 못 받고 나만 줬다고 한다.
어쩌겠나, 이 바닥이 원래 인기순인걸···
그렇게 시간 맞춰 들어간 대본 리딩장.
내 이름이 적혀있는 팻말 앞에 앉았다.
커다란 ㄷ모양 책상, 상석에 류창진 PD와, 유수영 작가가 앉아 있었다.
여전히 감정을 다 털어 내지 못했는지 그다지 호의적이지 못한 눈빛의 류창진 PD와, 그 옆의 커다란 안경과 수더분한 모습의 유수영 작가의 모습이 보였다.
수군대는 주변을 둘러보니, 그래도 내가 많이 올라왔구나 싶었다. 연예인들을 매일 보는 방송국 스태프들이 내게 관심 가지는 게 느껴졌다.
아니면 KBC 드라마국 전체가 나를 호의적이지 않게 생각해서 그렇게 느낀 걸 수도 있고.
그렇게 시작한 대본리딩.
80개 신 남짓의 짧은 단막극. 대본 리딩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자물쇠와 열쇠는 같은 곳에서 만들어져요. 문제의 해결방법 역시 같은 곳에 있지요."
"어, 지우 씨. 대본 다시 확인해주세요. 감정은 좋은데, 그 작가님의 의도는 그게 아니-"
"잠시만요!"
내가 실수하길 기다렸다는 듯이 내 대사를 막은 류창진 PD. 그리고 그 류창진 PD의 말을 다시 가로막는 유수영 작가.
대본을 읽고 아차 싶었다.
현주가 바꾼 대사가 내게도 인상 깊었는지, 평소 하지 않던 실수가 났다. 원래 유수영 작가가 쓴 대사 대신 현주가 바꾼 대사를 그대로 읇어버린 것이다.
류창진, 이 속 좁은 새끼··· 보통 실수해도 대사 조금 틀린 거 가지고 리딩 중에 꼽주는 경우는 없는데. 죄송하다고 말하고, 다시 대사를 치려는데 유수영 작가가 먼저 말했다.
"방금 그 대사 애드리브인가요?"
음··· 메이드 인 현주 애드리브가 맞긴 한데.
내가 뭐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유수영 작가가 말을 했다.
"어··· 음··· 이지우 씨가 말한 대로 가죠. 수정본은 금방 다시 만들어서 뿌릴게요."
유수영 작가의 말에, 류창진 PD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어휴, 저 감정적인 사람 같으니라고.
대본리딩이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 화장실을 갔다 왔는데 유수영 작가가 내 자리 앞에서 서 있는 게 보였다.
쭈뼛쭈뼛, 앞에서 몸을 베베 꼬으는게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하··· 이놈의 인기.
20년 후 방송계 탑 급 드라마 작가. 톱스타들을 쥐락펴락 하는 유수영도 겨우 이 정돈가.
"거기 내 자리."
"저기 이지우 씨···"
그러면서 꺼내는 휴대폰.
사진이라도 찍을 생각인가?
"사진 곤란."
"네? 그게 아니라 대사 바꾼 거 정말 좋았다고요. 제가 생각했던 이미지 보다 이지우 씨에게 훨신 잘 어울린다는 느낌? 혹시 다른 부분 대사도 생각해놓은 거 있으신가요? 혹시 다른 부분 수정할 것 있으면 연락 주세요."
그러면서 휴대폰을 내민다.
씨부엉··· 쪽팔리네.
유수영 작가도 대사에 대한 감이 좋다는 게 느껴졌다. 현주가 바꿔놓은 작은 뉘앙스 차이를 캐치 해내고 바로 반영하는 것을 봐선.
주머니 속 송곳은 튀어나올 수 밖에 없다고 그랬던가.
주머니 속 패트리엇 미사일쯤 되니 사실 숨기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현주의 재능은 진짜니까.
어쨌든, 내가 한 게 아닌 건 사실이다. 그러면 또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고.
현주 이야기를 안 꺼낼 수가 없었다.
팔불출 빙의해서 대학교 1학년이 벌써 영화 두 편의 각본에 참여한 작가가 내 대사를 받아주고 있고, 방금 그 미묘한 대사 변경도 그녀가 한 거라고 말이다.
"와, 대단하네요. 시간이나 예산 여건만 충분했으면 스크립터로 부르고 싶을 정도네요."
뭐, 우리 현주가 좀 대단하긴 하지.
그나저나 스크립터라··· 현주가 바로 메인 작가로 데뷔하는 건 사실상 비현실적인 이야기다. 아직 만들어낸 습작의 숫자도 그렇고, 장편 드라마나 영화를 끌고 가기엔 모자란 구석이 많으니까.
그 문제 대부분은 인풋과 관련된 것이기에 시간만이 해답이다. 시간만 나면 현주를 시청각 자료실에서 만나는 이유기도 하고.
그리고 지금 당장 촬영이 코 앞인 단막극 [저승카페]에 스크립터로 밀어 넣기에는 현실적인 문제도 많았다. 당장 본 촬영이 코앞이다. 이미 책 대본까지 나와 대본 리딩까지 끝난 상황이고.
다만 이게 단막극이 아니라면 현주가 스크립터로 충분히 활약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했다.
그렇게 리딩을 마치고 이틀 동안 의상팀과 함께 의상 피팅을 하고, 바뀐 대본으로 간이 리딩 한 번 더 했다. 그리고 촬영 당일.
독립영화의 촬영과는 또 다른 느낌.
스태프가 많아 봐야 10명 내외였던 내가 찍은 독립영화와 달리, 단막극이라 해도 공중파, 투입되는 스태프는 30명이 넘는다.
게다가 첫 촬영은 특수효과 삽입을 위해 VFX 팀 인원까지 나와 있는 상황. 빠듯한 촬영일정. 특수효과 작업 시간을 고려하여 첫 촬영은 특수효과가 들어간 신이 몰려있었다.
60분 단막극 한편에 예산이 보통 6000~7000만 원 정도. 내 필모그래프 중 그나마 규모가 있었던 게 [폭력의 사슬]이다. 1시간 30분짜리 장편 영화를 9000만 원 안팎의 예산으로 찍은 영화.
그 몇 안 되는 스태프를 쥐어짜서 찍은 영화와 비교해 단막극 현장은 으리으리할 정도였고.
"긴장하지 말고, 잘 해줘요."
흘리듯이 말하고 가는 류창진 PD.
그가 뭘 걱정하는지 안다. 그가 긴장하는 이유도 알고.
이 많은 사람과 투자된 돈. 이걸 총 지휘하는 게 연출자의 역할이다. 이들의 노력이 연출자의 잘못된 판단으로 헛되이 날아갈 수 있으니까.
망하면 알거지가 되는 이수한과 또 다른 절박함이 느껴졌다.
또한, 연극이나 영화판에서 준수한 연기를 보여주던 배우가 드라마에 들어와서 죽 쑤는 경우가 간혹 있다.
드라마 촬영은 영화 촬영과 다르고, 연극과 연기하는 방법이 다르니까. 류창진 PD도 그런 걸 걱정하는 것일 테지.
하지만 어쩌냐.
그의 걱정과 달리 긴장이 된다.
겁이 난다거나, 무섭다는 것이 아니다.
마치 예전으로 돌아 온듯한 감각.
많은 조명과 카메라. 나를 위해, 드라마를 위해 분주히 촬영 준비하는 사람들.
기분 좋은 긴장감이 몸을 휘감았다.
전생에 나 없이도 흥행해서 미니시리즈까지 편성했던 드라마, 내가 껴서 망한다면 내 자존심에 문제가 생기지 않겠나.
***
다행스럽게 촬영은 큰 문제 없이 끝났다. 촬영 종료 후 후시작업(정확한 대사 전달과 사운드 분리를 위한 작업) 까지 지나고, 며칠 후, [저승카페]가 방영됐다.
일부러 현주와 함께 보기 위해, 청운 엔터테인먼트의 시청각 자료실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집이나 현주의 집에서 볼 수는 없었고, 같이 영상을 보기에 이보다 좋은 곳은 없었으니까.
사실 [폭력의 사슬], [민주를 기다리며]는 같이 작업했기에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했고, 다른 두 편의 독립영화는 따로 본 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그리고 오늘. 내 공식적인 4번째 작품. [저승카페]을 함께 봤다.
"와, 좋다."
"그리고?"
"음··· 새롭다? 갈등 관계가 극적이지 않은데 이상하게 재밌네. 단순하게 보면 단지 카페 주인과 알바생의 로맨스인 것 같은데, 카페주인이 전직 저승사자라 판타지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그 판타지가 강조되지도 않네. 뭐랄까··· 심심한데 진한 설렁탕을 먹는 느낌? 근데 인테리어가 인도풍이야."
"그으리고?"
"잔잔하면서도 여운이 남아서 좋아."
"그으으으으으으리고???"
"으이구, 니가 제일 멋있어, 연기도 좋고. 잘했어."
"역시는 역시군."
겨우 원하는 대답을 받아냈다.
아니, 남자친구가 나오는데 남자친구 이야기를 제일 먼저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현주의 분석이 거의 정확하다.
힐링 드라마. 아직 힐링물이라는 단어는 이 시기에 만들어 지지도 않았다.
앞으로 십여 년이 지나서야 비슷한 신조어가 생겨난다. 그리고 흐름 자체를 만들어내는 게 유류상종 콤비다.
주조연의 심각한 갈등이 없고, 카페 알바로 들어온 귀신을 보는 여자 주인공이 카페 주인의 정체가 전직 저승사자라는 걸 알고 일어나는 소소한 해프닝.
극적인 조합이지 않나. 저승사자가 나오고 귀신이 나오는데, 사건은 평범하고 잔잔하다.
가장 심각한 갈등이 내가 연기하는 현직 저승사자가 카페 주인인 '백풍차사'에게 인력(?)난으로 힘드니 얼른 복귀하라고 종용하는 것이 다다.
판타지와 일상. 이 극적인 두 조합이 시청자들을 사로잡는다.
'백풍차사'는 은퇴 후 카페를 열어 오고 가는 귀신들 고민 들어주는 게 취미인 캐릭터다.
그 고민이라는 게 급하게 죽는 바람에 컴퓨터의 야동을 지우지 못한 귀신의 부탁으로 야동을 지워 준다거나, 죽은 엄마 귀신이 나타나 혼자 남겨질 딸에게 전해지지 못한 편지를 전해 준다거나 하는 소소한 사건들.
그리고 그런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서 카페 알바와 카페 주인의 로맨스가 발전돼가는 것이 큰 줄기이다.
내가 연기하는 '강림차사'는 '백풍차사'의 후배로 저승의 동향을 알려주거나, 항상 안된다고 하면서도 마지못해 '백풍차사'를 도와주는 그런 캐릭터다.
짧은 단막극 특성상 많이 생략된 설정들. 그걸 대사와 나레이션으로 맛깔나게 풀어 헤쳐 놓는다.
"으··· 재밌는데 왜 단막극인 거야···"
"니가 봐도 재미가 있으면 다른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응? 그래도 단막극이잖아."
아직은 단막극이지.
***
한강의 어느 다리 아래.
잘 닦여 있는 자전거 도로와 잔디가 있지만, 외지고 늦은 시간이라 인적이 드문 곳.
청운 엔터테인먼트의 김주하 실장은 일부러 이런 곳을 골랐다.
상대는 불법적인 일을 하는 브로커 주제에, 강남 한복판에서 보자고 했다. 그래서 김주하 실장은 일부러 으슥하고 외진 곳으로 불러냈다.
혹시나 담당하고 있는 아티스트에게 피해가 갈까 염려되어서 말이다.
약속시간을 조금 넘겨서 나타난 고급 외제 차.
그 안에서 깔끔한 정장을 입은 사내가 내렸다.
"아이고, 김 실장님. 오랜만입니다. 그런데 전에 뵀을 때 우리 같은 애들이랑 상종 안 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군대 면제를 전문적으로 하는 브로커 박상필.
그가 김주하 실장을 비꼬며 내렸다.
김주하 실장은 내심 로드 매니저인 이동수를 데리고 오지 않은 걸 살짝 후회했다.
비밀은 알고 있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가치가 빛난다.
그렇기에 로드 매니저인 이동수에게도 비밀로 하고 나온 참이었다. 이동수의 덩치를 봤다면 저렇게 대놓고 이죽거리지는 못했을 텐데, 하며 아쉬워했다.
"시끄럽고 이거 견적이나 봐줘요."
"네네, 김주하 실장님이 부탁하시는 건데 당~연히 해드려야죠."
약올리는듯이 음절을 길게 빼서 말하는 박상필.
김주하 실장은 소속 아티스트를 위해 꾹 참았다.
"아··· 이거 삼복사골절이네? 신경 인대 영구 손상으로 밀어 넣으면 되겠네요."
서류 몇 장 넘기더니 바로 파악하는 박상필.
"그거 가지고 돼?"
"안 되는거 되게끔 하는게 우리 일 아닙니까."
김주하 실장은 병신 같은 새끼가 쓸데없이 멋진말을 하는게 아니꼬왔지만, 한편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면제 조건이 충분치 않으면, 발치하여 면제 받거나, 미국 시민권을 받는 등, 일이 복잡해 진다.
"절대 상의 없이 진행하지 말고 준비만 해놔요. 영장 나오면 연락할 테니까."
김주하 실장은 박상필의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차에 올랐다.
이미 소속 아티스트의 프로필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다.
가족관계증명서, 건강검진 결과, 모든 걸 종합해봐도 군대를 면제 받는 방법은 이 방법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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