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5화. 국서
에르나 왕국은 솔찬히 섭섭했다.
물론, 종이 한 장 남기지 않은 비공식 동맹이고, 1, 2차 북해전쟁 당시 무엇 하나 해준 것이 없지만, 그럼에도 일언반구 없이 잉그비아 왕국과 협상한 것이 매우 못마땅했다. 어린 집사가 콧김을 뿜으며 화를 내었다.
“그래서 우리 뒤통수를 치시겠다?”
“아니야. 노리고 한 것은 아닐 거야.”
로벨이 희망적인 분석을 시도했다. 파울로 왕자의 방문은 말 그대로 깜짝 방문이었다. 소문이 바람 같다고 하지만 진짜 바람도 이렇게 빠르지 못했다.
“의도한 것이 아니어도 우리가 모나카 왕자와 손잡을 것을 알면 얼씨구나 훼방을 놓겠죠.”
“그럴 가능성은 있겠네.”
에르나 왕국은 먼 곳이었다. 목숨 걸고 가야 하는 신대륙이나 동방대륙보단 가깝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오갈 거리는 아니었다. 정보가 부족했다. 그리고 배도 부족했다.
“푸른고래 함대는 얼빠진 왕자랑 보냈고, 바다사자 호랑 강철갑옷 호는 북해에 있고, 으아... 이럴 줄 알았으면 청새치 호나 백상아리 호 정도는 남겨두는 건데요.”
“상인들을 수소문할까?”
“아무래도 그래야죠. 우선 모나카 왕국으로 간 조루아 경한테 전해야 해요.”
모나카 왕국은 현재 3개 파벌로 쪼개져 있었다. 엠마누엘 왕가에 충성하는 왕당파, 서부의 마르키시오 공작파, 그리고 알비치 후작파였다. 에르나 왕국이 어느 파벌과 손잡았는지가 관건이었다.
“십중팔구 마르키시오 공작일 거예요.”
“어째서?”
“알비치 후작은 아이란드 왕국을 뒷배로 두고 있으니까요. 그쪽에 떼어줄 것도 만만치 않을 텐데 에르나 왕국까지 끌어들일 리 없죠. 그리고 마르키시오 공작이 외해로 나가는 서부 해안의 제후라잖아요. 잉그비아 왕국의 외해진출을 막는데 도움이 될 세력이죠.”
“아하?”
역시 어린 집사였다. 로벨이 무기와 갑옷을 골라주는 동안에 사람을 풀어 진의를 확인했다. 리암 수사가 휑한 정수리를 긁적이고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에르나 왕국, 아이란드 왕국, 그리고 우리 볼탄 반도 공국 3파전이 되는 거죠.”
“뭔가 엄청 복잡해졌는데요.”
“그래도 승산은 있어.”
정치와 외교는 어두워도, 군사에 밝은 로벨이 말했다.
“에르나 왕국은 포츠담 해전 후유증으로 여유가 없어. 나도 전함을 만들어 봤지만-엣헴!- 선원을 모집하고 훈련하고 하는데 엄청 오래 걸려.”
“하긴, 해상전력이 악화되긴 했죠. 그 때문에 해적까지 기승을 부리니까요.”
“아이란드 왕국은 더 안 좋아. 적대국이니까. 직접 싸운 기사들은 물론이고, 국적에 연연하지 않는 자유민과 농민도 징발을 주구장창 당해 감정이 좋지 않을 거야.”
“징발... 그렇겠네요.”
기사 입장에서 순화하여 ‘징발’이지, 풍문이 절반만 사실이어도 생지옥이었을 것이다.
“알비치 후작이 가장 큰 세력을 지고도 미적거린 게 그 때문일 거야. 앞으로도 그럴 테고.”
“에르나 왕국은 기력이 달리고, 아이란드 왕국은 눈치가 보이니까, 우리한테 승산이 있군요?”
“응. 우리 전력이 모자라진 않아. 따라서 중요한 것은 엠마누엘 왕가가 얼마나 지지를 받느냐야.”
로벨의 날카로운 식견에 측근이 모두 감탄했다. 어린 집사가 감개무량한 얼굴로 다급히 물었다.
“어떻게 해야 엠마누엘 가문이 지지를 받을까요?”
“나야 모르지.”
전쟁에서 정치로 넘어오니 다시 바보가 되었다. 어린 집사는 포기하지 않고 재차 물었다.
“공왕 폐하라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 저쪽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 보세요.”
로벨은 턱을 괴고 잠깐 고민했다. 그래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난 어떻게 지지받았지? 볼탄 반도 기사들은 왜 나한테 충성맹세하는 거야?”
그걸 이제야 생각하는 게 전설이다. 여기저기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수틀리면 두들겨 패니까 충성하죠.”
“...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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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산 데 알폰소 경의 충성서약은 일단 보류했다. 그렇다고 도끼날을 정성껏 갈거나 교수대에 자리를 알아보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보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르나 왕국이 모나카 왕국 내전에 관여한 게 사실로 밝혀졌다. 전쟁과 물가변동에 민감한 상인들이 말하는 것이니 확실했다.
“진짜 전쟁이 날 수도 있겠는데...”
로벨의 말대로 승산은 있었다. 그런데 처음에 바란 것은 싸우지 않고 위세로 이기는 것이었으니 상황이 좋지 않았다.
“군사를 더 보내야 하는 것은 아니겠죠? 저쪽도 피 흘리고 싶진 않을 텐데요.”
에르나 왕국에서 파병한 군사는 약 1천 명이었다. 공식적으로는 마르키시오 공작이 고용한 자유 용병단지만, 전원이 에르나 왕국 출신에 지휘관마저 에르나 왕국 기사였으니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숫자를 봐서 우리랑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인데...”
1천 명이 적은 수는 아니지만, 한 나라를 집어삼킬 정도는 아니었다. 로벨이 하는 것처럼 마르키시오 공작에게 위세를 빌려주는 용도일 것이다. 즉, 진짜 피 흘릴 생각은 없었다.
“지금까지 없었지만, 이제부터 생길지도 모르죠.”
“그거 무서운 말이야.”
로벨이 해야 할 일이 정해졌다. 에르나 왕국이 모나카 왕국 내전에서 손을 떼게 해야 했다.
“협상을 할까?”
“협상은 기브 앤 테이크죠. 우리가 무엇을 줄 수 있나요?”
“저들이 원하는 게 뭔데?”
“잉그비아 왕국의 외해 진출을 견제할 수 있는 항구겠죠?”
“견제?”
“약탈, 노략, 해적질이요.”
그거 말고도 바라는 게 많겠지만, 가장 큰 것을 우선 꼽았다.
“우리가 줄 수 있는 게 아닌데...”
“모나카 왕자들과 이야기해 볼까요?”
어린 집사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바다는 그 자체로 페닝이었다. 첫째 왕자라면 모를까, 개념과 상식이 탑재된 둘째, 셋째 왕자가 외해로 이어지는 서해 항구를 포기할 리 없었다. 로벨은 장고 끝에 결정했다.
“사람을 보내자.”
“모나카 왕국이요?”
“아니. 잉그비아 왕국.”
걸음마 뗄 때부터 함께한 벗의 자격으로 로벨의 생각을 읽었다. 미친 짓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미쳐 돌아가니 나쁘지 않았다.
“당장 시작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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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한 상황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어 판을 흔드는 것은 게임판, 정치판, 싸움판에서 종종 쓰이는 일이다. 물론, 위험부담은 있었다. 걷잡을 수 없이 일이 커져 통제불능 상황에 빠질 수 있다.
“여차하면 발 빼면 그만이죠. 어차피 남의 나라잖아요?”
“그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일단 일 저지르고 수습은 안 하는...”
속된 말로 혐성질(?)인데, 내가 손해 안 보면 할만 했다.
“기왕 끌어들이는 거 알베니아 왕국도 끌어들여요. 에르나 왕국은 잉그비아 왕국으로 막고, 아이란드 왕국은 알베니아 왕국으로 막는 거죠. 두 나라 다 적대국이 커지는 것을 바라지 않으니 열정적으로 훼방 놓을 거예요.”
“파울로 왕자가 알면 화낼 텐데?”
강대국의 개입이 싫어서 볼탄 반도를 고른 셋째 왕자가 조금 불쌍했다.
“우리를 만만하게 봤다는 뜻이니까 미안할 거 없어요. 아니면 지들끼리 잘 해결하던가요.”
“참 매정한 말이야.”
마르키시오 공작이 에르나 왕국을 끌어들인 이상 여지가 없었다. 로벨은 즉시 잉그비아 섭정 존 곤트 공작과 알베니아 국왕 아모스 3세에게 편지를 썼다. 울프 용병단 북군과 남군에서 각각 5명씩 뽑아 상회 소속 배에 실어 보냈다. 긴 장마가 끝나기 무섭게 폭풍이 다가왔다.
그러나 바다 건너의 태풍이었다. 잉그비아 왕국 왕립함대 하나가 에르나 왕국 남부 해안으로 출항하고, 알베니아 왕국의 3개 용병단이 아이란드 동부 국경에 추가 배치되었지만, 늑대가 풀 뜯어먹는 평화로운 늑대성이 걱정할 바는 아니었다.
“저거! 저거 드디어 미쳤나 봐요! 지가 양인 줄 아나? 야! 그걸 왜 먹어!”
어린 집사가 기겁해서 양배추 뜯어먹는 아야와 이야카를 쫓아갔다. 욕심이 집사 못지않은 늑대들은 앞발로 배추를 감추고 으르렁거렸다.
“이것들이? 니들 끼니 챙겨주는 게 누군데 이빨을 드러내? 우리 폐하도 밥 주는 나는 안 때리는데!”
검술 훈련할 때 실컷 때리긴 하는데, 그건 훈련이니 예외로 쳤다. 늑대남매는 콧방귀 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냥 놔둬. 맛없으면 안 먹겠지.”
“그게 아니에요! 저 식탐 많은 것들이 채소까지 먹으면 식비가 엄청 나온다고요!”
어린 집사다운 걱정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천성에 벗어나 채식주의가 된 것은 아니었다.
“속이 안 좋아서 그래요.”
마녀 키르케가 양손에 뭔가를 잔뜩 들고 나와 말했다. 로벨이 혹시나 싶어 물었다.
“풀이 소화가 잘돼?”
“그럴 리가요? 먹으면 토해요.”
“역시 그렇지!”
“...사람 말고요. 사람은 괜찮아요.”
그러거나 말거나 채소는 몸에 안 좋다는 일반상식을 굳건히 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참 양배추를 뜯어먹던 아야와 이야카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구역질했다. 시꺼먼 것을 한주먹씩 게워냈다. 어린 집사가 화들짝 놀라 로벨을 흔들었다.
“왜 저래요? 병난 거 아니에요? 어떻게 좀 해 보세요!”
“의사는 저기 있잖아.”
하지만 의사 키르케도 놀랐다. 아야와 이야카가 토해서가 아니라 어린 집사가 호들갑을 떨어서 놀랐다.
“맨날 구박하더니만, 사실은 집사님도 귀염둥이를 좋아했군요?”
“병나 죽으면 먹지도 못하잖아요!”
“쟤들을 왜 먹어요!”
마녀가 버럭! 화를 내고 가져온 것은 떠넘겼다. 잘게 썰은 생고기와 가루 낸 치료약이었다.
“잘 섞어요.”
“내가 왜요?”
“귀염둥이가 아프니까요.”
어린 집사는 ‘평소에는 쟤들이 하는데 아파서 못하나요?’ 따지려다가 피 묻은 주걱을 보고 관뒀다. 맞으면 많이 아플 것 같았다. 늑대성의 마스코트가 아프다 하니 늑대성의 주인도 가만있을 수 없었다. 로벨도 팔을 걷고 고기반죽을 도왔다. 볼탄 반도 최고 권력자들이 쭈그리고 앉아 짐승 먹이를 주물럭거리는 게 아름다웠다.
“우리가 왜 이걸 하는 거죠? 잠깐 쉬려고 나왔는데?”
“난 순시를 가려고...”
“공왕 폐하는 좀 해도 되겠네요.”
아야와 이야카가 기분 좋은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속이 비어서 식욕이 돋는 듯했다.
“지금 무엇을 하십니까?”
호른 경의 어이없는 목소리가 울렸다. 어린 집사가 ‘그럼 그렇지’하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단언컨대 오해였다. 가끔 순시를 핑계로 만남을 가지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호른 경이 무슨 일이오?”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왕으로서, 기사로서, 체통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로벨은 헛기침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야카가 손가락에 붙은 살코기를 핥아 먹었다. 호른 경은 수컷 늑대를 부럽게 쳐다보다가 번뜩 정신 차리고 보고했다.
“로드릭 항에 청새치 호가 들어왔습니다.”
“청새치 호가요?!”
어린 집사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다른 배는요? 이안 선장이랑 푸른고래 호는 안 왔어요?”
“청새치 호만 돌아왔다. 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저 전령으로 먼저 온 듯합니다.”
“좋은 소식이오? 아니면 나쁜 소식이오?”
호른 경이 품에서 고급 양피지를 꺼냈다. 주로 대마(hemp)를 종이로 쓰는 남해 3국에서는 귀한 종이였다.
“국서(國書)로 와서 제가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이것을 전한 자의 표정이 달갑지 않더군요.”
로벨은 혁대에서 대거를 꺼내 편지지를 뜯었다. 그리고 전령의 표정을 이해했다.
“펄프 대장을 불러와. 그리고 알폰소 경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