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74화 (574/605)

574화. 정세

조지 솔트는 잉그비아 왕실 근위대에서 7년, 철사자 용병단에서 2년 복무한 베테랑 용병이었다.

기사처럼 마스터를 모시고 교육 받지도, 검술학회에 가입해 비의(秘儀)를 전수 받지도 못했지만,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 기술과 실전으로 다져진 임기응변은 자기류(-流)로 완성형에 가까웠다.

“자기류요?”

“원래 검술은 기본기 외에 자기류야.”

시력, 근력, 체격, 보폭, 팔길이, 주된 손이 모두 다르기에 완전히 같은 검술은 존재할 수 없었다. 실제 검술 마스터가 가르치는 것도 체력 단련법과 무기 파지법, 찌르고 베고 쳐내는 기본기가 전부였다. 그 외에는 실전 같은 대련으로 체화시킬 뿐이다.

“그럼 조지 솔트도 마스터인가요?”

“그건 아니야. 검술학회의 인정을 못 받았잖아.”

“어떻게 하면 인정받는데요?”

“기존 마스터와 싸워 이기거나 추천을 받거나... 아, 수련생 세 명과 싸워서 이겨도 인정받을 수 있어.”

“으... 그냥 쉽게 말해주세요. 조지와 기사가 싸우면 누가 이겨요?”

“몰라.”

“......”

“진짜 몰라. 수학이 아니잖아. 컨디션에 따라 다르고, 가진 무기에 따라 다르고, 날씨, 장소, 행운, 불운 등등 변수가 많아.”

결투재판이 결투 전문가(=기사)에게 신뢰받는 이유가 있었다. 승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물론, 어른과 아이처럼 압도적인 차이가 나면 대단히 높게 승률을 점칠 수 있었다.

“그 말씀은 조지 솔트가 아이는 아니란 거네요?”

“처음에 말했잖아.”

조지 솔트는 베테랑 용병이었다. 변수에 따라 기사도 이길 수도 있었다.

@

조지 솔트는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사슬 갑옷을 입고 2.5피트 길이의 숏소드를 가졌다. 급하게 소집되어 버클러나 패링 대거(=망고슈) 같은 보조 무장은 가져오지 못했으나 아쉽지 않았다. 지금 가진 장비로도 자칭 기사보다 유리했다.

‘내 무기가 더 길고 강하다.’

자칭 기사, 에르산 데 알폰소 경은 벽에서 떼어낸 임시무기를 앞으로 내밀었다. 야외에서 쓰는 간이 의자 같은데, 다리 두 개가 부러지고 속이 시커멓게 썩어서 그리 튼튼하지 않았다.

조지 솔트도 그리 판단했다. 성큼 다가가서 숏소드를 크게 휘둘렀다. 칼날 길이는 2피트가 안 되지만, 외팔이와 비슷한 거구라 기본 리치가 상당했다.

알폰소 경은 간이 의자를 세워 숏소드를 막았다. 그리고 좌판을 요령 좋게 기울여 칼날을 흘리고 아래에서 위로 올려쳤다. 조지 솔트는 반걸음 물러나 공격을 피하고 한걸음 다가가 찌르기를 넣었다. 의자가 아래로 떨어지며 칼등을 쳐냈다.

비 내리는 좁은 골목에서 볼 만한 칼싸움이 벌어졌다. 로벨의 평가대로 조지 솔트는 베테랑 전사였다. 공수전환이 빠르고 칼끝이 날카로웠다. 칼밥 좀 먹었다고 자부하는 용병도 내심 감탄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알폰소 경이었다. 무기라 부르기 민망한 것으로 용케 맞상대했다. 저 정도면 기사가 맞는 듯했다.

그러나 재활용도 못해 버려진 의자는 상상 이상으로 부실했다. 칼질을 몇 번 당하니 쩌억- 쩍- 하고 쪼개지기 시작했다.

“제기랄!”

위기도 일종의 변화고, 변화는 새로운 기회였다. 알폰소 경은 의자가 박살나는 순간 거리를 좁혔다. 입 냄새를 맡을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지자 소매에 숨겨둔 친절한 단검(Kidney dagger)을 꺼냈다. 회심의 일격이었다. 그러나 실패한 일격이었다.

카드드-득-!

알폰소 경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조지 솔트는 칼을 쥐지 않은 왼손으로 비수를 막았다. 쇠가죽에 징을 박고 사슬을 씌운 장갑이다. 가벼운 단검으로 상하게 할 수 없었다.

“기사치고 실력이 별로군.”

조지 솔트는 비웃음과 함께 숏소드를 당겼다. 거리가 짧아도 쓸 수 있는 부위가 있었다. 칼자루 끝의 폼멜이 알폰소 경 관자놀이를 노렸다. 그대로 맞고 기절하면 좋고, 칼을 버리고 물러나도 좋았다. 허나, 알폰소 경은 둘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세를 낮추며 조지 솔트의 오금을 잡아챘다.

“어? 어어?”

힘이 좋아도 버틸 수 없는 부위였다. 조지 솔트와 알폰소 경이 뒤엉켜서 자빠졌다. 결투나 시합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레슬링!”

말이 좋아 레슬링이지 실상은 그냥 개싸움이었다. 알폰소 경은 조지 솔트를 깔고 앉아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그리고 쇳덩이에 주먹질하면 매우 아프다는 지혜를 얻은 후 투구를 벗기기 위해 용을 썼다.

조지 솔트도 나름대로 바빴다. 오른손에 쥔 숏소드는 물론이고, 왼손에 쥔 키드니 대거도 놓을 수 없었다. 자세가 불리한데 무기까지 내주면 정말 위험했다. 칼자루를 쥔 채 주먹으로 반격했으나 타격이 들어가지 않았다.

소 한 마리씩 잡아먹게 생긴 외모를 제외하면 12살 꼬마들의 투닥거림과 비슷했다. 입을 꾹 다물고 있어서 더욱 그러했다. 사나운데 우습고, 심각한데 유치했다. 그 때문에 스무 명이나 되는 용병 중 나서서 말리는 이가 없었다.

“구경 나왔어요? 구경꾼이에요? 이야, 급료 줄 필요 없겠네요? 일을 해야 페닝을 주지!”

“이놈들아! 뭐하냐?! 조지를 도와! 저 미친놈을 끌어내!”

어린 집사와 펄프 대장 목소리가 소란을 파고들었다. 용병들은 그제야 정신 차리고 우르르 달려들었다. 창이 있지만 아래에 깔린 조지 솔트가 다칠까봐 그냥 두고 맨손으로 끌어냈다. 알폰소 경은 격렬히 저항했으나 팔다리에 하나씩 붙고 머리카락과 옷깃을 잡아당기니 당해낼 수 없었다. 조지 솔트 위에서 끌려 나온 뒤 무자비하게 짓밟혔다. 턱에 한 방, 명치에 한 방 맞으니 일어서지도 못했다. 몸을 웅크리고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그만. 그만 패고 일으켜봐.”

로벨이 말리지 않았으면 장담컨대 ‘알폰소 경’이라 자칭하던 고기 가죽이 되었을 것이다. 용병들은 고용주 명령에도 기어이 한 대씩 더 때리고 떨어졌다.

로벨은 조지 솔트와 ‘난봉꾼’ 숀을 우선 살폈다. 천만다행히 둘 다 이상 없었다. 조지는 타박상만 조금 입었고, 숀은 칼끝에 가죽만 베였다. 비싸게 장만한 갑옷이 제값 했다.

“운이 좋아.”

로벨이 한숨 쉬고 말했다. 조지 솔트에게 말한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잘못 됐으면 바로 죽였을 거야.”

피떡이 된 알폰소 경은 동의하지 않았다. 로벨은 억지로 꿇려 앉혀진 자칭 기사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야?”

대답할 정신도 없는 듯했다. 교황을 자처한 용병이 대신 말했다.

“자기 입으로 에르산 데 알폰소라 했습니다요.”

“에르나 왕국 기사야?”

“그렇다고 주장은 하는데... 꼬라지가...”

싸움 실력을 보고 나니 긴가민가했다. 쟁기질하는 농부나 주판알 굴리는 상인은 확실히 아니었다.

“기사라 해도 정당한 이유 없이 도시민을 살해한 것은 잘못이야.”

기사가 아니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형을 언도하겠지만, 기사라면 이유는 들어봐야 했다.

“늑대성으로 데려가.”

@

해가 지자 종일 내리던 장맛비도 잠시 쉬어갔다. 구름이 걷힌 것은 아니라 초저녁치고 매우 어두웠다. 어린 집사는 촛불을 두 개 더 밝히고 혹시 몰라 랜턴도 꺼냈다.

평소라면 저녁 보고를 마치고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뜻깊은 시간이란 뜻이다. 그러나 한낮의 소동으로 일정이 바뀌었다. 페리 행정관, 리암 수사, 애꾸눈, 발가락, 허풍쟁이 모두 에르산 데 알폰소 경을 심문하는데 동참했다.

“기사 맞아.”

로벨이 나직이 말했다. 에르나 왕국의 여러 가문 문장을 보여주고 이름을 물었다. 국왕의 풀 네임과 페럿 가문의 당주 이름도 확인했다. 대부분 맞게 대답했다. 이 정도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에르나 왕국 기사가 볼탄 반도에는 무슨 일이래요? 그것도 거지꼴로?”

“모든 기사가 부자는 아니니까.”

방랑기사, 몰락기사, 용병기사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칼과 갑옷을 잃은 것은 조금 심하지만, 돌이켜 보면 로벨도 밀과 보리 몇 섬에 갑옷을 내줄 뻔한 적 있었다. 지금의 로벨이 아니라 진짜 로벨이 말이다.

“사람은 왜 죽였대요?”

“자릿세를 요구했데.”

알폰소 경 얼굴이 활활 타올랐다. 화난 건지 부끄러운 건지 알기 힘들었다. 천성적으로나 직업적으로나 살인과 폭력을 싫어하는 리암 수사가 따져 물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일곱이나! 그 불쌍한 빈민가 사람을 일곱 명이나 죽이다니요!”

알폰소 경이 꾹꾹 눌러 담은 말투로 항변했다.

“징수관이라 속이고 무적무패 왕을 만나게 해주겠노라 거짓말했다.”

“죽을 만했네요.”

어린 집사가 바로 납득했다. 말 그대로 세금 도둑이라 재정 책임자를 화나게 했다. 로벨이 난감하게 끼어들었다.

“징수관 사칭이 잘못이긴 하지만, 전의를 잃은 사람까지 죽일 필요는...”

“칼과 투구를 자릿세 대신 맡겼는데 팔아먹고 시치미를 떼었소.”

“정말 죽을 만했네.”

기사의 무구를 사기 쳐서 빼앗다니, 간이 배 밖에 나온 자들이었다. 페리 행정관이 마지막으로 지적했다.

“일방적인 주장입니다. 설령 정당한 살인이라 해도 왕의 병사를 공격한 죄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할 말이 없는지 시선을 조금 내리깔았다.

“무례했다.”

“그쪽이요?”

“그 병사들이 무례했다는 말이다.”

친절한 용병은 온화한 기사만큼 드무니 대충 알만 했다. 시너지 효과가 대단했을 것이다.

“좋아요. 좋아. 그쪽이 기사고, 이유 있는 살인이고, 쌍방 잘못이라 하죠. 그래서 왜죠?”

“왜?”

“이곳에 왜 왔냐고요.”

에르산 데 알폰소 경은 가슴을 펴고 머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래봐야 여기저기 찢어지고 터져서 볼품은 없었다.

“무적무패 왕에게 내 검을 바치기 위해서다.”

기사가 주군을 찾아와 충성을 맹세하는 아름다운 사회현상인데, 집사도, 마녀도, 수사도 반응이 시큰둥했다.

“검이 어디 있는데요?”

“검보다 옷이 먼저 아닐까요? 어머나, 부끄러워라!”

“흠. 흠흠. 다소 뜬금없긴 하군요.”

예상 못한 반응인지 당황했다. 그리고 곧 화를 내었다. 본디 화가 많은 성품인 모양이다.

“포비아 왕국은 기사의 나라라 하더니, 헛소문이었나? 어찌 본인을 조롱하지?”

어린 집사가 손바닥을 내밀어 정정했다.

“포비아 왕국이 아니라 볼탄 반도 공국이요. 그리고 땅 한 쪼가리 받아 보겠다고 충성맹세하는 기사가 하루에도 열댓 명씩 와요.”

“아니, 그 정도는 아니잖...”

“그쪽처럼 출신도 불분명하고 재산도 없는 기사를 받아줄 이유가 없다고요. 우리 공왕 폐하가 그리 만만한 줄 알아요?”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조금 무례해도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알폰소 경의 뻣뻣한 목이 조금 꺾였다. 그러나 천 리길을 달려온 만큼 쉬이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그자들과 다르다.”

“뭐가요? 아까 보니까 싸움 실력도 썩 대단하지 않던데요?”

기왕 무례한 거 자존심까지 팍팍 긁었다. 혈압이 오르는지 찢어진 이마에서 핏줄기가 팍! 튀었다. 로벨이 칼자루를 쳐서 경고했다. ‘아직 무죄라고 안 했소’ 알폰소 경은 간신히 화를 삼키고 말했다.

“본인은 에르나 왕국에서 왔다.”

“귀 따갑게 들었어요.”

“해서, 에르나 왕국의 정세를 잘 알고 있지. 가령 북해에서 잃어버린 전력을 내해에서 보충하자는 주장 같은 거.”

우연일까, 마침 볼탄 반도도 인어해 깊은 곳에 관여 중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