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76화 (576/605)

576화. 친정

마녀 키르케가 엠마누엘 왕가 인장이 찍힌 국서를 이리저리 돌려보다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국왕 대행(King's deputy)? 국왕 대행이란 작위도 있나요? 보통 섭정(Regent)이나 왕위계승자(Crown Prince)라 하지 않아요?”

어린 집사가 팔짱을 끼고 근엄하게 말했다.

“왕위계승자는 첫째 왕자고, 아직 섭정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니까요.”

얼핏 들으면 말장난 같지만, 중요한 문제였다. 편지 내용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럼 좀 난감한데요. 이 ‘동맹’이 합법적으로 효력 있는 게 맞아요?”

엠마누엘 왕가의 둘째이자 모나카 왕국의 비공식 대리자, 안토니오 엠마누엘 대공의 친필 편지가 늑대성 식탁을 한 바퀴 돌아 수신자 로벨 로드릭 공왕 손에 다시 들어왔다.

“모나카 왕국에 다섯 군사가 모였어.”

엠마누엘 왕가와 로벨 로드릭 공왕군, 마르키시오 공작과 에르나 왕국군, 알비치 후작과 아이란드 왕국군, 북쪽 해안의 잉그비아 왕립해군, 동쪽 국경의 알베르트 왕국군이었다.

“아주 난장판이네요.”

“자국의 공작과 후작도 감당이 안 되는데, 세 나라가 끼어들었으니 무척 불안할 겁니다.”

“왕권을 수호해도 외세에 굴복하면 소용이 없으니까요. 동맹이 절실하겠죠.”

머리가 나쁜 외팔이 등은 부르지 않았기에 다들 금방 이해했다. 모나카 왕가의 추가적인 군사요청이었다. 호른 경이 냉소적으로 반응했다.

“안토니오 왕자도 우습군요. 주는 것 없이 바라는 것만 많습니다.”

“그건 아닌데요?”

어린 집사가 양피지를 빼앗아 중간을 가리켰다.

“여기 ‘우정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가까운 소통의 장소를 마련하여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라는 문구가 있잖아요.”

“그게 왜?”

로벨, 호른 경, 펄프 대장이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았다. ‘죽인다’는 단순한 살해 예고고, ‘웃긴다’는 정말 즐거워 웃는 것인 칼잡이들이라 은유에 약했다. 어린 집사가 답답하여 소리를 높였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내주겠다는 거잖아요!”

“우리가 바라는 거?”

“인어의 바다 항구요!”

편지는 7명이 봤는데, 편지 내용을 이해한 사람은 어린 집사 하나뿐이었다. 정말 어린 집사 없었으면 큰일이다.

“그게 그런 뜻이야?”

“그냥 ‘항구 빌려줌’이라 쓰면 될 것을 길게도 썼습니다.”

“이거 나중에 발뺌하려고 수작 부리는 거 아닐까요?”

늑대성을 공략할 때는 1만 명의 정예병사보다 온갖 수사로 꾸며진 편지 한 장이 효과적일 것이다. 로벨은 어려운 소리를 휙휙 털어내고 아직 적응을 못한 신참을 보았다.

“에르산 데 알폰소 경.”

“예. 예? 아, 예.”

“경 덕분에 일찍 상황을 파악하고 대비할 수 있었소. 고맙소.”

로벨이 감사를 표시하자 알폰소 경 표정이 좋아졌다.

“그럼 저를 봉신으로...”

“볼탄 반도에는 봉토가 없소.”

그리고 금방 나빠졌다. 땅이 없으면 말을 키울 수 없고, 말이 없으면 기사가 되지 못하니 당연했다. 그러나 실망하기 일렀다.

“허나, 이번 일이 잘 해결되면 도시를 하나 맡길 수 있소.”

“도, 도시를? 제게 말입니까?”

로벨의 선언에 모두가 놀라 쳐다봤다. 인구 2, 3천 명의 작은 도시도 농사짓는 시골 장원보단 부유했다. 애초에 부유해야 성벽을 세우고 농사 아닌 일을 할 수 있었다.

“어느 도시를... 아니, 그것보다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로벨은 시선을 살짝 깔았다. 오랜 세월 참된 기사를 보필한 측근들은 바로 알아챘다. 저것은 잘못한 게 있을 때 나오는 태도였다.

“에르나 왕국으로 가시오. 그곳에서 용병을 모아 모나카 왕국으로 오시오.”

여러 암시가 담겨 있는 지시다. 어린 집사와 호른 경의 눈썹이 바짝 올라가고, 펄프 대장과 페리 행정관은 한숨 쉬었으며, 알폰소 경은 당황했다.

“혹시... 제가 받게 될 도시가...”

“당연히 모나카 왕국의 항구 도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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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산 데 알폰소 경은 못마땅해 죽는 어린 집사에게 여비 약간과 모병증서를 받아 떠났다.

모병증서는 별거 없었다. 며칠까지 몇 명을 모아 오면 계약대로 급료를 지불한다는, 왕과 제후가 용병대장을 고용할 때 흔히 쓰는 보증서였다. 단, ‘에르나 왕국 용병’으로 특정한 게 특이점이었다. 보통은 머릿수 외에 따지지 않았다.

“외국에서 용병을 모집하는 것은 위험하지 않습니까? 혹여 그들이 배신이라도 하면...”

“급료를 안 줘도 되니 어린 집사가 좋아하겠지.”

어린 집사가 진짜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로벨은 걱정 많은 호른 경을 위로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시오. 용병에게 애국심 같은 게 있을 리 없잖소?”

펄프 대장이 ‘애국심? 재미있는 단어군요’ 등을 중얼거렸다. 그런 단어가 일상화되려면 2, 300년쯤 더 지나야 했다. 적어도 유라피아 대륙에서는 그러했다.

“에르나 왕국 출신이니 에르나 왕국에 아는 용병이 많을 것이오. 그리고 전쟁이 본격화되면 적이 될 터인데 우리가 먼저 고용하는 게 낫소.”

로벨의 말이 일리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 비용을 지불하니 잠적하거나 늦게 와도 손해는 없었다. 그런데도 호른 경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어린 집사, 마녀 키르케, 페리 행정관 등도 마찬가지였다. 진짜 걱정은 용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나카 왕국으로 ‘오라고’ 하셨지요?”

“그랬소.”

“그 말씀은 공왕 폐하께서 친정하시겠다는 뜻입니까?”

로벨은 어린 집사를 힐끔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장탄식이 몇 군데서 들렸다.

로벨이 직접 전장에 나가는 일은 자주 있었다. 아니, 직접 나가지 않은 싸움이 드물었다. 그래도 바다를 건너는 것은 달랐다. 북해를 넘어간 적 있고, 자유도시연맹을 공격한 적도 있지만, 모나카 왕국은 그보다 훨씬 멀었다.

“꼭 공왕 폐하가 가야 해요?”

“울프 용병단 중 절반을 데려갈 거야.”

조루아 랭스터 경이 이끌고 간 700명과 합치면 1,000명이 되었다. 알폰소 경이 계약대로 200명을 모아오면 총 1,200명이었다. 전원 직업 용병이니 무시할 전력은 아니지만, 5개국에서 모인 군사를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다.

“무적무패 왕의 명성을 더하면 가능할 수도 있겠죠.”

어린 집사가 뾰루퉁하게 인정했다. 조루아 랭스터 경의 1,200명과 무적무패 왕의 1,200명은 무게감부터 달랐다. 크게 데인 적이 있는 에르나 왕국군과 잉그비아 왕국군은 몸부터 사릴 것이다.

“내가 안 가면 1,000명은 더 징집해야 할 거야. 이제 곧 추수기인데 너무 하잖아.”

“그건 그렇지만...”

“항구를 내어준다는 것도 확답이 아니잖아? 어설프게 도와서 엠마누엘 왕자들이 지거나 나중에 딴소리 듣지 않아야지.”

로벨은 ‘전(戰)’으로 시작하는 모든 행위에서 최고라 할 수 있으니 부정할 수 없었다.

“이안 선장이 도착하면 함대를 정비해서 출발할 거야. 남쪽 나라는 겨울에도 따뜻하다니까 크게 염려할 것은 없어. 무기와 물자는 조루아 경이 많이 가져갔으니까 빌려 쓰면 되고.”

“시민들이 안 좋아할걸요.”

“어린 집사가 잘 설명해줘.”

어린 집사가 한숨으로 물러나자 호른 경이 바통을 받았다.

“공왕 폐하, 저는...”

호른 경을 설득하는 것은 한 마디로 충분했다.

“함께 가겠소?”

“무, 물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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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은 갑작스럽지만, 준비는 꼼꼼했다.

우선 울프 용병단 북군을 모아 300명을 자원 받았다. 인어의 바다를 건너야 한다는 말에 일부 난색을 표시했지만, 상당수가 자발적으로 참가했다. 전쟁이 없어서 수입이 줄었는데 지출은 그대로거나 오히려 늘어서 빚을 진 용병이 상당했다. 결혼을 하거나 자식이 생긴 용병은 특히 그러했다.

“애꾸눈이 지휘관이지?”

“예. 외팔이와 싸움개도 함께 갑니다.”

허풍쟁이가 ‘저도 갑니다요!’하고 손을 번쩍 들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로벨이 가면 당연히 따라가는 부속품이었다.

“소대를 재편성하고 손발을 맞춰둬. 배를 오래 타야 하니까 병든 사람은 골라내고.”

무기와 갑옷을 정비하고, 새로운 편제로 훈련하고, 모나카 왕국의 지도를 구하고, 모나카 왕국에서 온 상인과 순례자를 찾아 정보도 수집했다. 사나흘이 하루처럼 훌쩍훌쩍 지나가 마침내 푸른고래 함대가 돌아왔다.

이안 선장과 휘하 선원들은 다시 모나카 왕국으로 가야 한다는 소식에 짧은 불만을 토로했다. 정말 ‘짧은’ 불만이었다. 왕이자 선주가 명령하는데 불만이 있으면 어쩔 것인가. 그나마 300명이고, 북서풍이 부는 가을이란 것을 위안 삼았다.

“먼저 간 용병들 때문에 고생이 많았습니다.”

“무슨 일 있었어?”

“일... 아주 많은 일이 있었지요...”

이안 선장이 창밖의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육지 사람을 은연중에 무시하는 뱃사람과 제 성질을 주체 못해 칼질을 업으로 삼은 용병이 천 단위로 모였으니 알만했다.

“내 용병들은 다를 거야.”

로벨이 확신을 담아 말했다. 울프 용병단은 전쟁이 났을 때 모였다가 전쟁이 끝나면 흩어지는 일반 용병(Free-Lancer)과 달랐다. 소속감과 책임감이 있었다. 전쟁이 끝나도 쭉 얼굴을 봐야하니 기분 따라 행동하지 못했다. 그런 로벨의 말뜻을 이안 선장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무적무패 왕이 계신데 소란을 피울 바보 멍청이는 없겠지요.”

로벨은 울프 용병단의 우수성을 설명해주려다가 포기했다. 이안 선장이 훌륭한 뱃사람을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처럼, 로벨이 유능한 용병을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냥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언제 출항할 수 있어?”

이안 선장은 코로 한숨을 쉬었다. 선장의 권위를 존중하고 페닝을 흥정하지 않는 좋은 선주인데, 뱃일에 무지한 것이 큰 단점이다.

“물자보충은 이틀이면 되오나, 선원과 노잡이에게 휴식이 필요합니다. 특히 노잡이의 피로가 극심합니다. 혹 죽여도 되는 범죄자가 있으면 골병 든 놈들 대신 앉힐 수 있습니다만...”

“그런 범죄자 없어.”

로벨이 정색하고 말했다. ‘애국심’만큼이나 존재감이 희미한 ‘인권’ 때문은 아니었다.

“어린 집사가 빵값 아깝다고 금방 죽이거든. 우리 집사가 일을 얼마나 잘하는데.”

“아... 그렇군요.”

여기서 잠깐. 오해하면 안 되었다. 로드릭 시티의 범죄율이 낮은 이유가 더 컸다. 사형이 언도된 범죄자는 정말 흉악범죄자였다.

“그럼 최소 나흘은 주셔야 합니다.”

“좋아. 나흘 뒤 제4시에 출발하자. 그때까지 출항준비를 끝내.”

로벨은 펄프 대장과 애꾸눈을 불러서 같은 내용을 전달했다. 로드릭 항으로 가는 시간을 계산해 제0시에 모나카 왕국 원정군이 소집될 것이다. 로벨은 이안 선장과 펄프 대장을 내보내고 홀로 중얼거렸다.

“나흘...”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여러 친구와 작별 인사하기에는 다소 부족했다. 로벨은 자리에서 일어나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 그리고 리암 수사를 찾아갔다. 오늘과 내일은 술을 왕창 마실 것이다. 그리고 호른 경과 함께 밤늦게까지 모나카 왕국에서 할 일을 의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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