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3화. 살인
조각구름이 흘러오고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니 이윽고 장마가 찾아왔다.
다른 곳은 어떤지 모르지만, 볼탄 반도의 장마는 이슬비와 장대비가 하루에도 서너 번씩 뒤바뀌는 변덕스러운 놈이었다. 하늘에 구멍이 난 것처럼 쏟아질 때는 기름먹인 가죽 후드도 감당이 안 되어 처마 그늘을 향해 바삐 뛰어갔다. 그러면서 끝끝내 우산은 쓰지 않는 것이 이 시대 남자였다.
“지긋지긋한 비! 그만 좀 와라!”
시가지 공사는 당연히 중단되었다. 젖은 땅에 젖은 자재로 공사를 할 수 없거니와 사고 위험이 너무 높았다. 애가 타는 것은 거금을 투자한 어린 집사였다.
“비 그칠 때까지 급료 안 주면 되잖아?”
로벨이 의아해서 물었다. 어린 집사 성격상 공돈을 줄 리 없기 때문이다. 허나, 실무는 좀 더 복잡했다.
“장인들은 임금을 안 주면 집에 가 버려요. 다시 데려오려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사람이 바뀌면 공사가 이상해지니까요. 인부들도 굶으면 사고 치니 밥 먹을 페닝은 챙겨줘야 하고요. 하아... 그러게 왜 일을 벌여가지고옷!”
“지, 집사도 좋아했잖아? 완공만 되면 떼돈 번다고...”
쏴아아아아- 쏴아아-
딱히 바란 것은 아니지만, 늑대성에 휴식이 찾아왔다. 울프 용병단의 훈련도 대부분 취소되었고, 기사, 상인, 봉신들의 방문도 사흘에 한 건 이하로 줄었다. 비를 맞으며 싸돌아다니고 싶은 사람은 철부지 꼬마 외에 없었다.
“무기와 갑옷에 녹이 스니까.”
“상품이 변질되기 때문이죠.”
이유야 아무래도 좋았다. 로벨은 집무실 책걸상을 기꺼이 어린 집사에게 양보하고 벽난로에 앉아 가죽 옷감에 불을 쬐었다. 자투리로 떼어낸 조각을 아야와 이야카에게 주었는데 이빨이 예전 같지 않은지 오래 씹었다.
창가의 빗소리, 깃펜 사각거리는 소리, 장작 타는 소리, 늑대 꼬리치는 소리가 아늑하게 울려 퍼졌다. 전쟁, 사업, 도시 발전도 중요하지만, 역시 사람은 일만하고 살 수 없었다.
“그래도 배는 움직일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파울로 왕자 일행은 출발했죠? 정기적으로 보고 받아야 하니까 마틴 총독한테 사람을 보낼게요.”
아니, 어린 집사는 일을 해야 살 수 있는 모양이다. 기어이 할 일을 찾아 부지런을 떨었다. 로벨은 쉴 때는 좀 쉬자고 한 소리하려다가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그만뒀다. 공왕 폐하는 맨날 쉬니까 이럴 때 일하라는 반격이 날아들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로벨이 아니어도 뜯어말릴 사람이 있었다.
“귀염둥이 엄마 귀염둥이 키르케 왔어염!”
“컹-! 컹컹-!”
고요하고 평화로운 늑대성에 ‘분란’이 들어왔다. 아야와 이야카가 갑자기 기운이 넘쳐서 마녀와 함께 펄쩍펄쩍 뛰었다. 빗물이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어린 집사는 서류를 사수하기 위해 책상 위로 몸 던졌다가 잉크병을 엎지르고 비명을 질렀다.
“이이잇! 이게 무슨 짓...!”
어린 집사가 호통치다가 홀딱 젖은 마녀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다 큰 처녀가 비 맞고 다니지 마요! 우산 어디 갔어요!”
“에이, 깍쟁이도 아니고, 누가 우산을 써요?”
“그쪽은 좀 깍쟁이가 되세요!”
어린 집사의 일거리는 자연히 엉망이 되었다. 로벨은 젖은 자리를 피해 의자를 옮기고 손수건을 건넸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병원은 어쩌고?”
시절은 여름이지만, 비가 내리면 제법 쌀쌀했다. 온몸으로 비를 맞고 그대로 잠자리에 드는 사람이 많아 감기가 유행했다.
“안 그래도 환자 때문에 왔어요. 약이 떨어져서 훔쳐 가려고요.”
“양심 고백이야?”
“아뇨? 경고장이요. 이 성의 보물은 괴도 키르케가 가져간다!”
한동안 조용하더니만 이상한 소설을 읽은 모양이다. 늑대성의 약은 대부분 마녀 키르케가 만들어놓은 거라 가져가도 상관없었다.
“어린 집사가 먹을 것만 남겨둬.”
“왜 저예요?”
“어린 집사 말고 병 걸릴 사람이 없잖아.”
지기 싫어하는 집사도 반박할 수 없었다. 로벨은 무식하게 건강하여 감기는커녕 흔한 배앓이도 앓아 본 적 없었다. 애꾸눈, 외팔이, 허풍쟁이는 가끔 술병이 날 뿐이고, 나이 많은 펄프 대장은 종종 아프지만, 약보다는 민간요법-성수 뿌린 망치로 배를 두드리는 등-을 신뢰했다.
“에이, 집사님은 괜찮아요. 집사님이 아프면 제가 돌봐줄 건데요.”
“오?”
로벨이 입술을 둥글게 모았다. 체면상 휘파람만 불지 않았다. 어린 집사가 성내듯이 좋아했다.
“그 정도는 해야죠! 그래야 밥값이죠!”
쏴아아아아아-
먹구름이 온 듯 빗줄기가 다시 거세졌다. 꽉 맞물리지 못한 창틈으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둑어둑한 실내에 촛불 그림자가 춤을 췄다.
“지금 가려고?”
질문이 아니라 만류였다. 겨우 물기를 털어낸 마녀 키르케는 짧은 고민 끝에 아야와 이야카를 깔개 삼아 앉았다. 볼탄 반도의 장마는 변덕스러우니 먹구름 정도는 금방 걷힐 것이다.
마녀가 집무실 한 칸을 차지하니 어린 집사의 일과는 엉망이 되었다. 근본 없는 농담과 출처 모를 잡담이 들숨에 한 번 날숨에 두 번 나오는데, 성격이 모난 어린 집사는 한마디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유쾌한 말싸움이 계속되었다.
로벨은 티격태격하는 어린 친구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목가적인 분위기도 좋지만, 시끌벅적한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못가 비구름이 옅어졌다.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폭우에서 적당히 맞을 만한 가랑비가 되었다.
“공왕 폐하,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마녀 키르케가 자리를 뜨기 전에 펄프 대장이 찾아왔다. 로벨은 다시 의자를 옮기며 말했다.
“신발 털고 들어와.”
펄프 대장은 마녀보다 예의가 바랐다. 성 밖에서 후드를 벗고 지팡이 비슷한 곤봉을 닦았다. 로벨은 양치기가 쓸법한 기다란 곤봉에 잠시 시선을 뺏겼다. 주 용도는 누가 봐도 지팡이인데, 노인 취급 받는 것이 싫은지 곤봉이라 우겼다. 취객과 도둑과 신참 용병을 두 자릿수로 두드려 간신히 존중받았다.
“저녁 보고까지 시간이 있는데?”
날씨가 흐려서 확신은 못하지만, 페리 행정관이 안 온 것을 보면 저녁은 아니었다. 펄프 대장이 시인했다.
“저녁까지 기다릴 수 없는 보고사항이 있어 일찍 왔습니다.”
다리가 불편한 대장이 일찍 왔으니 심각하고 중요한 보고가 분명했다.
“살인사건입니다.”
로벨의 눈썹이 가늘어졌다. 어린 집사는 한숨을 쉬고 새 잉크병에 새 깃펜을 꽂았다.
로드릭 시티의 치안이 좋다고 하지만, 어디까지 자유도시에 비해 좋다는 뜻이다. 성 밖 해자에 머리 없는 시체가 떠오르거나 뒷골목 배수로에 주인 없는 팔다리가 발견되는 일은 종종 있었다.
“난 또 뭐라고. 사람 죽은 게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데 뭐가 급하다고 빗길에 찾아와요?”
“일곱 명이 죽었소.”
그 정도면 찾아올 만했다. 어린 집사가 미심쩍게 되물었다.
“일곱 명이요?”
“한 자리에서 발견된 시신이 일곱이니 실제 피해자는 더 많을 수 있소.”
치안을 책임진 도시 경비대-울프 용병단에 비상이 걸릴 만했다. 어린 집사는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패싸움이라도 났나요? 7명이 죽었으면, 부상자도 최소 그 정도일 텐데, 그럼 족히 스무 명 가까이 싸운 거니까...”
펄프 대장의 무릎 통증을 우습게 보았다. 시내에서 활개 치는 폭력집단을 두고 볼 수 없으니 보고야 하겠지만, 이리 급하게 찾아오진 않았을 것이다.
“일곱 명 모두 한 사람한테 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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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신의 교리에 나오듯, 살인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죄였다.
법의 이름으로, 명예를 핑계로, 전쟁이란 이유로 툭하면 사람을 죽이는 기사가 할 말은 아니지만, 사람은 사람을 죽여서 안 되었다.
“이 사람들이야?”
로벨은 후드를 올리고 망토 자락을 걷었다. 시 서펜트 가죽으로 만든 망토는 방수 효과가 뛰어나 장맛비에도 끄떡없었다. 주인이 얌전히 입으면 말이다.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닙니다.”
로벨이 두 팔 걷고 나서자 펄프 대장이 점잖게 만류했다.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나 무적무패 왕이야.”
로벨이 직접 쌓아 올린 시신만 수백이었다. 고작 일곱 구를 못 살필 이유가 없었다. 펄프 대장의 말뜻도 옷이 젖으니까 가만있으란 것이었다. 로벨은 핏물이 거의 빠져 밀랍처럼 창백해진 시체를 차례로 살폈다.
“상흔이 작아. 큰 칼이 아니야. 대거류인데, 한 번에 경동맥을 베었어.”
“팔을 비틀고 심장을 찔렀어. 이 자세로는 칼을 회수하기가 쉽지 않은데, 힘이 아주 좋아.”
“싸움을 벌인 것은 여기까지 셋이야. 나머지는 도망가다가 당했어. 정말 무서웠나 봐.”
로벨은 칼을 다루는데 있어 의사, 이발사, 도축업자가 따라오지 못할 전문가였다. 시체에 남은 흔적으로 용의자를 좁혔다.
“키는 5.5피트에서 5.6피트, 체구가 좋고, 오른손잡이고, 성격이 단호할 거야.”
“그런 사람이 100명은 될 거 같은데요?”
“시체가 굳은 정도를 봐서 동이 트기 전이야. 제0시 전후에 이곳을 배회한 사람을 찾아.”
“그럼 좀 범위가 줄어들지만...”
“무기를 버리지 않았으니까 몸을 수색해. 6, 7인치 정도 되는 키드니 대거(Kidney dagger)나 양날 더크(Dirk)를 가졌을 거야. 응. 칼끝이 각진 세모 모양이야.”
로벨의 추리에 펄프 대장과 용병들이 감탄하며 흩어졌다. 의심 많은 어린 집사는 용병 따라가는 마녀 키르케 목덜미를 잡고 물었다.
“그거 확실해요?”
“아마도?”
기사는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지 사람 죽인 사람을 찾는 사람이 아니었다. 100% 확신은 못했다.
“그래도 잡으면 확신할 수 있을 거야.”
“어째서요?”
“솜씨가 좋은 것은 분명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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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색을 시작한지 반나절 만에 용의자가 잡혔는데, 로벨의 말대로 칼 솜씨, 싸움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숀이 칼 맞았어!”
“저 개자식이! 죽여버려!”
사건 현장에서 세 블록 떨어진 판자촌이 발칵 뒤집혔다. 울프 용병단의 ‘난봉꾼’ 숀이 가슴을 부여잡고 비틀비틀 도망치고, 5.5피트 키의 불곰 같은 사내가 성큼성큼 쫓아 나왔다.
비명을 들은 용병들이 즉시 모여들었다. 사태 파악은 금방 끝났다. 체포에 불응하고 왕의 병사를 공격했으니 사살해도 무방했다.
“재판이 필요 없군. 죽이자.”
전쟁과 전쟁 같은 훈련으로 단련된 울프 용병단이었다. 저 남부의 생색내는 도시 용병하고 비교할 수 없었다. 어깨를 나란히 붙여 길을 막고 창을 위아래로 내밀었다. 그러나 한 번쯤 생각해봐야 했다.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을 안 가는 놈이 정상일 리 없었다.
“나는 알폰소의 기사, 에르산 데 알폰소다.”
“기사?”
고용주 탓에 기사 이미지가 유난히 무서운 울프 용병단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러나 어느 집단이든 반항적인 사람이 있었다.
“저게 기사면 난 교황이다! 옛 신의 이름으로 지옥불에 구워주마!”
조금 성급하지만 나무랄 수 없는 판단이었다. 걸레 옆에 걸어놔도 위화감이 없을 찢어진 튜닉, 발가락이 마중 나온 생가죽 부츠, 사흘쯤 굶은 듯한 홀쭉한 볼이 진짜 기사면 잘 먹고 잘 입은 용병은 교황이 맞았다.
“이 무례한 것들...!”
그래도 자존심은 기사가 맞았다. 스무 자루가 넘는 가까운 창에도 주눅이 들지 않았다. 힘도 기사만큼 대단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옆의 건물을 뜯어냈다. 썩은 가구와 버려진 자재를 엮어 만든 빈민촌 판잣집이라 본디 부실하지만, 그래도 임팩트가 대단했다. 건물은 보통 배경이나 지형으로 인식하지 무기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뭐 저런 미친...”
“비켜라.”
혹시 진짜 기사가 아닐까 의심이 들 때, 기사 중의 기사에게 덤빈 바 있는 조지 솔트가 앞으로 나왔다. 용병들 얼굴이 환해졌다. 철사자 용병단 출신이라고, 낙하산이라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지만, 싸움 실력만큼은 진짜였다.
“곧 왕께서 오신다. 그 전에 끝내야 한다.”
조지 솔트가 숏소드를 뽑아 비스듬히 세웠다. 제대로 배운 티가 나는지 자칭 알폰소 기사의 표정이 사나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