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2화. 가족
로드릭 시티에서 로벨 로드릭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권력과 무력이 아닌, 우정으로 제지할 사람은 있지만, 지금 페닝을 버느라 바빠 끼어들지 못했다.
“파울로 왕자? 이런 곳에서 다 보오?”
“이런! 무적무패 왕?”
로벨은 반갑게 아는 척했으나 왕자는 반갑지 않게 당황했다. 과자를 몰래 빼먹다가 걸린 꼬마 같았다. 그러나 부모만큼 눈치가 좋지 못한 로벨은 순진하게 물었다.
“출항 날짜가 가까워 바쁠 텐데, 혹시 도움이 필요하오?”
“지금껏 도와주신 것만도 과분하오. 보, 본인이 이곳에 온 것은 그저...”
로벨은 한 걸음 물러나서 왕자가 서 있는 상점 간판을 보았다. 칼과 투구가 모루 위에 나란히 놓여있는 로드릭 시티 공방 간판이었다.
불과 기름을 쓰며 소음이 크게 나는 진짜 공방은 도시 외곽에 있고, 이곳은 간단한 주문을 받거나 완제품을 판매하는 일종의 대리점이었다. 로벨이 친절하게 그 사실을 일러주었다.
“시장에 나오는 무구(武具)는 품질이 좋지 않소. 기왕이면 조합에 가서 직접 의뢰할 것을 추천하오. 본인이 잘 아는 갑옷 장인이 있으니 원한다면 소개를...”
“그럴 것 없소! 시간이, 그렇지, 시간이 부족하잖소? 공왕께서 말씀하셨듯 출항이 코앞이오.”
“아, 그런 것이오? 그래도 최고 지휘관이 멋대가리 없는 원통 갑옷을 입을 수 없으니 일단 장인을 만나서...”
“그것이, 그것이 그러면 좋지만, 그것이 아닌 것이...”
왕이자 챔피언이 권하는데 머뭇거리는 경우는 없었다. 로벨은 몇 가지 단서로 날카롭게 추리했다.
“기사가 아니라 부끄러우시오?”
허풍쟁이 제이콥이 고하길 파울로 왕자에게는 굳은살이 없었다. 검술, 창술, 궁술 따위를 배운 적 없다는 뜻이다.
군사를 빌리러 온 자가 군사 경험이 없는 것은 개인의 수치를 넘어 지휘권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시골 기사도 신참 용병도 부실한 책상물림을 따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전쟁 경험이 많다고 전쟁을 잘 하진 않았소.”
“그 말씀은...”
“물론, 경험이 없으면 그냥 못하오.”
로벨이 잘 못하는 것 중 하나가 위로였다. 파울로 왕자가 한숨을 푹 쉬었다.
“기사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은 부끄럽지 않소. 그러나 그 사실을 떳떳이 밝힐 수 없소. 본인은 공왕의 기사와 용병이 통제되길 바라오.”
무기 고를 줄도, 갑옷 입을 줄도 모르는 샌님 지휘관으로 소문나기 싫다는 뜻이다.
“어쨌든 본인이 도와줄 수 있겠군. 늑대성으로 갑시다.”
“늑대성으로?”
로벨의 눈꼬리가 아래로 휘어졌다. 기묘한 표정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컬렉션을 자랑할 기회가 온 컬렉터의 표정이었다.
“무기와 갑옷을 빌려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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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로 왕자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일국의 왕자-왕자 작위를 받지는 않았지만-로 태어나 좋은 것, 멋진 것, 진귀한 것을 많이 보았지만, 이런 무기 전시장은 처음이었다.
“이게 다...”
“지하창고에 이만큼 더 있소. 그것도 보고 싶으시오?”
로벨의 유일한 취미이자 사치가 무기 수집이었다. 3페닝, 5페닝, 용돈 받아서 쓰는 로벨이 직접 산 것은 극소수고, 대부분이 선물 내지 전리품이었다.
“이쪽의 곡도는 포비아 국왕이 선물한 것이오. 고대 왕국 시절 야만족 무기를 복원한 것이지. 저쪽의 외날 도끼는 네일 공국의 야를이 선물한 것이오. 강철로 만든 훌륭한 물건이오. 그리고 그쪽의 쇠구 달린 철퇴는 자유도시연맹에서 가져온 것인데, 재질이 특이해서 자루 중간까지가 철이고...”
유라피아 대륙 2천 년 역사에 등장한 무기가 벽 양쪽을 가득 채우고 부족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저 모아만 놓은 것이 아니었다. 거병 클레이모어부터 고대 샘족의 보잘것없는 색스(Seax, 외날 단검)까지 하나하나 날카롭게 갈아져 있었다.
“모나카 왕국 사람은 시미터가 익숙하지 않소? 에르나 왕국식 세이버도 무게가 비슷해서 나쁘지 않을 거요. 한번 잡아 보시오.”
로벨은 곡도 두 자루를 골라 빙글빙글 돌린 후 내밀었다. 무게중심이 잘 잡혀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인데, 칼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파울로 왕자는 위협으로 느끼고 위축되었다.
“무기는 쥐고 흔들 수만 있으면 되오. 본인이 칼을 맞댈 상황이면 전설의 명검이나 푸줏간의 녹슨 칼이나 차이가 없을 테니. 갑옷을 볼 수 있겠소?”
로벨은 어린 집사를 가르친 경험을 바탕으로 속성 검술 강의를 해줄까 고민하다가 일단 갑옷부터 자랑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것은 본인의 첫째 형님이 기사 종자 시절 입은 브리간딘이오. 옆구리와 겨드랑이를 풀어서 사이즈 조절이 쉬운 편이오. 이것은 본인이 젊을 때 입은 컴포지트 아머요. 다소 낡긴 했지만 길이 잘 들어 쓰기 좋소. 디자인이 구형인 것은 조금 아쉽소만... 이것은 프란시스 시티의 장인이 만든 필드 아머인데, 지금의 갑옷을 만들기 전에 입던 것으로 아직 현역이오.”
로벨이 직접 입은 갑옷만 4벌이고, 로벨의 갑옷 사랑을 알고 봉신들과 상인들이 바친 갑옷이 12벌이었다. 용암처럼 붉게 물들인 코트 오브 플레이트도 있고, 고대 왕국처럼 근육 모양으로 만든 가죽 로리카 아머도 있었다. 정말 독특한 컬렉션으로 사람을 감탄하게 했다.
“저 브리간딘이 좋을 것 같소.”
파울로 왕자는 처음에 본 갑옷을 골랐다. 필드 아머가 가장 화려하지만 남부의 무더운 날씨에 어울리지 않았다. 비늘갑옷과 사슬갑옷은 저렴한 맨앳암즈 같고, 고대 가죽갑옷은 실전에서 입기에 다소 우스꽝스러웠다. 그렇게 하나씩 빼고 나니 퍼레이드 갑옷이라 불리는 브리간딘만 남았다.
“이것 말이오?”
로벨은 오래된 갑옷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로드릭 가문이 가난한 세습 기사 가문이던 시절, 큰 오라비를 위해 특별히 거금 들여 만든 갑옷이었다. 파울로 왕자가 눈치껏 말을 바꿨다.
“소중한 갑옷이면 다른 것도 괜찮소.”
“아니오. 모든 무구는 주인이 필요한 법이오. 이곳에 장식되어 있는 것보다 왕자가 입는 것이 좋을 것이오.”
로벨은 사람 모양 거치대에서 브리간딘을 풀어 어리버리한 왕자에게 손수 입혀주었다. 나중에는 혼자서도 할 수 있게 차근차근 설명을 곁들였다. 끈과 고리가 주렁주렁 달린 풀 플레이트 아머에 비하면 입기 쉬운 편인데, 그래도 혼자 착용하려면 연습이 필요했다.
“이대로는 너무 수수하여 장식을 달아야 하오. 사이즈도 조금 고쳐야겠군. 갑옷 장인을 불러 주리다.”
가장 중요한 철편과 겉감은 완성되어 있으니 자잘한 수정은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무적무패 왕, 아니, 로벨 로드릭 왕.”
파울로 왕자가 무게를 잡고 말을 시작했다. 그래봐야 이미지가 바뀌지는 않지만 잠깐 환기는 되었다.
“본인에게 이리 잘해주는 이유가 무엇이오.”
어려운 질문이었다. 공개적으로는 남해 교역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모나카 왕국에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지만, 공적이지 못한 친절과 배려가 있었다. 가족의 유품을 내어주는 것부터 그러했다.
“글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는데 일일이 이유를 찾을 필요가 있소?”
“이유가 있어도 돕지 않는 자가 태반이오.”
“모든 이가 그러지는 않소. 인간이 전부 이기적이었으면 인류는 진작 멸망해 사라졌을 것이오.”
허나 인간의 선함을 과신하는 것은 인간의 악함을 맹신하는 것보다 위험한 일이었다. 로벨은 잠깐 고민한 후 말했다.
“본인에게도 가족이 있었소.”
가족 이야기가 과거형일 때는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로벨은 세 오라비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대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했으면 늑대성에 어떤 이득을 준다 해도 호의적이지 않았을 것이오.”
호의가 아니어도 돕긴 했을 것이다. 어린 집사가 그걸 원할 테니까. 로벨은 시미터를 칼집에 넣어 파울로 왕자 허리 벨트에 걸어주며 말했다.
“가족을 소중히 여기시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갈 마지막 이유가 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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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가 뚱하게 말했다.
“가족을 버리고 와서 그런 멋진 말을 했어요?”
“버, 버리긴 누가 버려? 그냥, 그냥 조금 먼저 온 거야.”
“조금 먼저 가족을 버렸다고요?”
“파울로 왕자 때문이야! 난 기다리고 싶었는데, 저 왕자가 갑옷 내놓으라고 자꾸 재촉해서...!”
파울로 왕자가 들었으면 조금 전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싹 고쳤을 것이다. 아쉽게 갑옷 장인을 만나 치수와 장식을 논의하는 중이었다. 어린 집사는 무기고의 빈자리를 보며 아쉬운 듯 혀를 찼다.
“첫째 도련님이 쓰던 거라고 아낀 거잖아요.”
“언제까지 창고에 둘 수 없으니까.”
“나중에 아들 낳으면 주려고 보관한 줄 알았죠.”
로벨의 귓불이 빨개졌다.
“아직 아니야. 아직 그런 거 아니야.”
“아직이요? 그럼 언젠가 할 거란 거네요?”
로벨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어린 집사는 놀리고 싶은 유혹을 꾹 참으며 말했다.
“칼이랑 갑옷값도 달아놔야겠군요.”
“이건 내 껀데?”
“공왕 폐하께 제꺼죠. 제꺼는 제꺼고요.”
“뭐? 그런 거야?”
로벨의 호출을 받은 기사가 속속 모이고 출항 준비를 마친 갤리선과 코그선이 로드릭 항에 집결했다. 정치의 연장이란 말이 이런 의미는 아니겠지만, 전쟁 전에 정치가 먼저 시작되었다.
“모나카 왕자라 하지만 실권이 없는 셋째 왕자요.”
“무적무패 왕의 비호를 받지 않소?”
“남해 땅에 정착할 생각이면 무적무패 왕보다 둘째 왕자나 마르키시오 공작이...”
파울로 왕자의 말이 맞았다. 기사나 용병이나 한 자리 차지할 생각만 가득했다. 로벨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에서는 고분고분하지만, 인어해를 건너는 순간 제멋대로 행동할 것이 뻔히 보였다. 잉그비아 왕국에서 활약한 조루아 랭스터 경을 용병 지휘관으로 붙였지만, 페닝에 복종하지 않는 기사를 통제하려면 권위, 명예, 명성이 추가로 필요했다.
“모나카 국왕의 셋째 아들, 파울로 엠마누엘 경이 방문하셨습니다!”
기사들이 모인 회랑에 파울로 왕자가 나타났다. 시선이 집중되고 침묵이 팡파레 대신 낮게 깔렸다. 로벨의 고딕 플레이트 아머를 만든 로드릭 시티 명장이 모처럼 솜씨를 발휘했다.
붉은 터번, 붉은 망토, 붉은 갑옷을 치렁치렁하게 차려 입고, 로벨이 선물한 시미터와 파냐드 대거를 양쪽 허리에 비스듬히 찼다. 구릿빛 피부와 일부러 거칠게 다듬은 붉은 수염이 전체적으로 잘 어울렸다.
“저자가 파울로 왕자...?”
“소문과 조금 다르군.”
빛이 번쩍거리는 북방의 기사와 달랐다. 그러나 추레한 것은 아니었다. 이글거리는 남해에서 올라온 남부 기사 같았다. 선창에서 쥐어 터져 끌려 나온 지난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어린 집사가 멀리서 훔쳐보며 중얼거렸다.
“겉모습은 그럴듯한데, 능력까지 속일 수 있을까요?”
로벨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던 옛 시절을 떠올리며 말했다.
“시합장에 올려놓은 것으로 우리 역할은 다한 거야. 결과는 본인이 내야지.”
“잘할 수 있을까요?”
“잘해야지.”
로벨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지 못하면 직접 빚을 받아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