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07화 (507/605)

507화. 전령

어린 집사가 무심코 질문했다.

“사트로 가문에서 기사가 또 왔어요?”

“시간상으로 두 번째 전령일 거야.”

어느 지방이나 그렇지만 사람 사는 곳을 조금만 벗어나면 교통과 치안이 엉망이었다. 폭우, 폭설, 산사태 등으로 장기간 발이 묶일 수 있고, 몬스터, 노상강도, 적대적인 가문의 기사 등을 만나 비명횡사할 수도 있었다. 그런 까닭에 전령을 한 명만 보내는 경우는 없었다.

시간과 경유지를 달리해서 둘, 셋을 보내는 것은 기본이고, 행상인에게 의뢰하거나 순례자에게 부탁해서 편지만 전달하기도 했다. 로벨 역시 발 빠른 용병으로 한 번, 로드릭 상회 상인으로 두 번 편지를 보내왔다.

“강도짓일까요?”

“무장한 기사를 노리는 강도? 차라리 넝마 입은 순례자를 노리지 않을까?”

로벨은 헐벗은 기사를 살폈다. 앳된 얼굴이었다. 아마도 갓 서임 된 기사일 것이다. 어깨, 허리, 그리고 보이지 않지만 등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닥터 줄리안이 피 묻은 수술도구를 대야에 던져 넣고 손을 닦았다. 말이 좋아 수술도구지 정육점이나 도살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칼, 톱, 손도끼, 인두 따위였다. 안 좋은 쪽으로 상상력이 자극되어 오래 보지 않았다.

“상처의 곪은 부위를 긁어내고 열을 내리는 약재를 먹였습니다. 2, 3일 더 지켜봐야겠지만, 젊고 건강한 기사라 죽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 수고했어.”

닥터 줄리안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자리를 피했다. 지혜로운 선생답게 귀족들의 정치에 관심 갖지 않았다.

사실 관심 가져도 바뀌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로벨 역시 아는 것이 없었다. 소지한 편지는 앞서 받은 것과 같은 것이고, 회수한 화살은 아무 특색 없는 쇠못 형태의 전시용 화살이었다. 사냥꾼이 아니라 전쟁 전문가가 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전령을 공격했으면 당연히 기사나 용병일 테니 정체를 밝히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죽지 않으면 깨어나겠지. 그때 물어보자.”

“아, 그리고 하나 더요.”

어린 집사가 벽난로에 장작을 쪼개 넣는, 정확히는 쪼개 넣으려고 괴성을 지르는 마녀 키르케를 힐끔 보았다. 로벨은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허락했다. 정말 다행스러운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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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과 어린 집사가 순찰을 마치고 돌아간 그날 밤, 로드릭 시티 병원에 유혈사태가 일어났다.

처음에는 외지에서 흘러온 부랑자 패거리가 먹을 것을 노리고 사고 쳤다 생각했는데, 몇 단계에 걸쳐 보고가 들어오니 의도된 기습이었다.

로벨은 어린 집사의 도움을 받아 아밍 더블릿 위에 브레스트 플레이트를 입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로벨은 삐쭉삐쭉 솟은 머리와 눈곱을 정리하고 어린 집사는 흉갑과 배갑을 맞춰 매듭을 쪼였다. 강산이 두 번 바뀔 동안 함께한 사이라 대단히 신속했다. 물론, 진짜 빠른 이유는 따로 있었다.

“키르케는요? 키르케는 무사하겠죠?”

“진정해. 범인 외에는 다친 사람이 없다고 하잖아.”

어린 집사의 요청대로 사트로 가문 기사를 보호하기 위해, 사실은 마녀 키르케를 지키기 위해 외팔이 소대를 병원에 보냈는데, 아주 적절한 조치였다.

“젊은 기사가 도시에서 칼 맞을 만큼 원한을 사지는 않았을 테고, 역시 사트로 가문 일이겠지?”

“그건 모르죠! 다 됐어요! 빨리 가요! 빨리요!”

마녀 키르케의 안전이 확인될 때까지 소심한 집사는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로벨은 시 서펜트 망토를 두르고 일어났다. 아성을 나오니 펄프 대장과 십여 명의 용병이 횃불이 밝히고 대기하고 있었다.

“성 안의 근무자를 모두 모았습니다.”

로벨은 잠꼬대하는 모닝스타를 두드려 깨우고 급히 얹은 승마용 안장에 올랐다.

“조용히 가자. 소란 피우지 말고.”

겨울이라 아침 해가 늦었다. 도시는 어둡고 조용했다.

창틈 사이로 꺼질 듯 말 듯 한 벽난로 빛이 보이고, 밤이슬 맞은 취객의 웅얼거림과 밤잠 없는 강아지의 왈왈거림이 아련하게 들려왔다. 그러한 어둠을 누비는 십여 명의 무장집단도 이질적이었다. 소피보러 나온 중년 아저씨가 기겁해서 주저앉고, 집 지키느라 열심인 개가 자다 깬 주인한테 혼나는 자잘한 소란이 있었다.

북문거리에 접어들자 소란은 더욱 커졌다. 로벨 일행이 원인은 아니었다. 횃불이 여기저기 솟아있고 몽둥이를 가진 사람이 곳곳에 고여 있었다.

어린 집사가 앞으로 나가 크게 소리쳤다.

“공왕 폐하께서 오셨어요! 다들 물러나요! 물러나라고!”

공왕 폐하란 말에 깜짝 놀란 횃불이 좌우로 갈라졌다. 우람한 모닝스타가 지나가고, 커다란 칼과 쇠뇌로 무장한 울프 용병단이 뒤를 따르자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아, 아아앗! 공왕 폐하!”

병원 안마당에서 외팔이 소대가 우르르 몰려나왔다. 전원 병장기를 소지했으며, 일부는 피를 묻히고 있었다. 이번 소란의 주인공이었다.

“키르케와 닥터 줄리안은?”

“그, 부상자를 돌보고 있습니다요.”

“누가 다쳤어?”

로벨의 얼굴이 횃불로도 보일 만큼 심각하자 외팔이가 화급히 덧붙였다.

“저희는 아니고, 기습한 잡놈들이 조금 다쳤습니다요.”

“아, 그래?”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라, 적이 다친 것은 아무렇지 않았다. 의사인 마녀와 닥터는 아니었다.

“멀쩡한 놈들은 헛간에 가둬놨고, 칼 맞은 놈들은 수술실에서 지지고 있습니다.”

로벨은 어느 쪽을 먼저 갈까 고민하다가 어린 집사를 보고 쉽게 결정했다.

“내가 심문할게. 어린 집사는 키르케한테 가봐.”

어린 집사는 적극적으로 명령을 받잡았다. 살을 찢고 인두로 지지는 치료가 정말 보고 싶은 모양이다. 벽난로가 있는 수술실로 달려갔다. 로벨 이하 울프 용병단은 멍하니 보다가 말을 돌렸다.

“어느 창고야?”

“이, 이쪽으로 오시지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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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수확한 곡식과 햇볕에 잘 말린 고기와 푸른곰팡이가 곰보처럼 번져가는 치즈 덩어리와 추위를 피해 숨어든 어미 닭과 그 품 안의 따뜻한 계란들. 자리에서 일어나 손만 뻗으면 쥘 수 있는데, 그 손이 자유롭지 못했다. 누가 용병놈들 아니랄까봐 사람 포박하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칼자국’ 존스가 요동치는 위장을 땅에 비비며 욕지거리했다.

“제기랄... 내가 밥부터 먹고 저지르자 했잖아.”

“뭣? 몸이 무거우면 도망치기 힘들다고 한 게 네놈이잖아!”

“내가? 내가 언제?”

“그거 ‘발가벗은’ 찰스요.”

“그래? 그 자식 어디 있냐? 어디 있어!”

“대문을 넘자마자 곰 같은 놈한테 맞아 실려 갔소. 지금쯤 뒤졌겠지.”

‘로드릭 시티 병원 습격자’로 체포된 부랑자들이 꽁꽁 묶여 으르렁 깽깽거렸다. 진짜 부랑자는 아니었다. 오물 묻은 넝마 차림이지만 덩치가 제법 좋았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큼직하고 검지와 중지가 유독 굵었다. 눈썰미가 있다면 어렵지 않게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끼리릭- 덜컥-

헛간 문이 열렸다. ‘곰 같은 놈’의 속삭임이 잠깐 들렸는데, 대단한 내용이 아닌 듯 무시하고 불쑥 들어왔다.

“오오오... 옛 신이시여...”

가짜 부랑자 중 하나가 옛 신을 찾았다. 팔다리가 묶인 탓에 성호를 그리지는 못했지만 옛 신의 축복을 느꼈다. 기가 막힌 미녀가 자신들을 구해주러 온 것이다.

“당신은 천사입니까?”

천사가 어이없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외팔이, 얼마나 쥐어팬 거야?”

곰 같은 놈-외팔이 더치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한 대씩 밖에 안 때렸습니다요. 공왕 폐하가 무서워서 정신을 놓은 게 아닐까요?”

“그런 것치고 발음이 정확한데?”

외팔이의 부하가 횃불을 가지고 들어왔다. 가짜 부랑자는 갑작스러운 조명에 눈을 찌푸렸지만, 곧 천사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천사가 아니라 악마였다. 다른 말로 기사라 부를 수 있었다. 어스름한 달빛과 곱상한 얼굴 탓에 여자로 착각했다. 쪽팔림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저기, 나으리는 누구십니까? 저희를 벌주러 오셨습니까?”

“조금 전에 못 들었어? 나 왕이야.”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지만, 왕이라 자칭할 수 있는 이는 두 자릿수가 안 되었다. 이곳 볼탄 반도에서는 아마 한 자릿수일 것이다.

“무적무패 왕?!”

“당사자 앞에서는 ‘폐하’라 해야지.”

로벨이 타이르듯 말했다. 가짜 부랑자의 낯빛이 헛간 밖에 쌓인 눈처럼 하얘졌다.

“저희들은 그저 배가 고파 병원을 약탈... 아니, 도둑질하러 온 것뿐입니다요. 잘못했습니다요. 한 번만, 딱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로벨은 흐룬팅을 뽑아 한 바퀴 돌린 후 그대로 바닥을 찍었다. 칼끝이 가짜 부랑자 발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음절로 된 경고는 물론이고, 비언어적인 경고조차 없어 반응이 1초 늦게 나왔다.

“흐끼야아악-! 내 발! 내 발!”

로벨은 흐룬팅 손잡이에 체중을 실어 기댄 후 위로했다.

“아직 안 잘랐어.”

“아, 아, 아, 아직이요?”

“응. 헛소리 할 때마다 하나씩 자를 거야. 아, 벌써 한 번 했지? 엄지발가락부터 자르고 시작하자.”

“자, 자, 잠깐만요! 나으리! 나으리 아니고 나으리 폐하! 다 말하겠습니다! 제가 아는 거 전부 말하겠습니다!”

육체적인 고문만 있는 게 아니었다. 무표정으로 설렁설렁 칼질하는 게 엄청난 공포였다. 겁을 주려고 으름장 놓는 게 아니라 식탁에 앉아 삶은 닭고기를 뜯는 느낌이었다. 닭 입장에서 세상 무시무시한 일이었다. 바꿔 말하면, 로벨이 자신과 같은 종(種)으로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의문이 손쉽게 해결되었다.

“곤트 가문에서 고용한 철사자 용병단이야.”

로벨이 피 묻은 칼날을 닦으며 말했다. 가짜 부랑자들은 성심성의껏 자백했지만, 정말 성의가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어 몇 군데 찔러야 했다. 급소를 잘 피해서 찔렀고, 솜씨 좋은 외과의사와 검증된 마녀가 있으니 죽지 않을 것이다.

“철사자 용병단이면... 잉그비아 왕국의 용병단이잖아요?”

“꼭 잉그비아 왕국을 위해서 싸우진 않지만, 곤트 가문이 고용했으면 아마도 그렇겠지.”

어린 집사가 손바닥을 주먹으로 치고 말했다.

“그럼 리처드 2세가 로드릭-사트로 동맹을 알았군요? 그래서 전령을 죽여서 정보를 차단하려고...”

로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닐 거야. 전령이 하나가 아니란 것은 저들도 잘 알 테고, 이미 편지가 내 손에 들어왔는데 도시에 숨어들어 암살할 이유가 없어.”

어린 집사가 골치 아픈 듯 안면을 꾸겼다.

“그 말씀은 그러니까...”

머리가 좋다고 모든 분야에 능통한 것은 아니었다. 군사, 전략, 작전 등에는 여전히 어두웠다. 그러니 로벨도 알아챈 것을 아직도 알지 못했다.

“사트로 가문 기사라 쫓은 게 아니야.”

“개인적인 원한이라고요?”

“그것도 아니야.”

“아, 그럼 뭔데요. 답답하니까 빨리 말해주세요.”

로벨은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하며 주위를 보았다. 마녀 키르케가 두 눈을 반짝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부담스러운 눈빛이었다. 반대로 의사 앞에서 죽을 뻔한 철사자 용병들은 병든 병아리처럼 고개를 숙이고 외면했다.

“이곳으로 오다가 봐서 안 될 것을 본 거야. 아마도 저 용병들이겠지.”

“저들이 왜요?”

“저들이 전부가 아니니까. 곤트 백작령에 모인 많은 용병을 보았어. 볼프 후작이 알지 못하는 아주아주 많은 숫자의 용병 말이야.”

용병들이 모여서 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딱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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