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06화 (506/605)

506화. 쉼터

첫눈은 하루가 지나 폭설이 되었다.

거센 북풍에 함께 휘몰아치더니 어느새 발목까지 기어올라 부츠 속을 넘보았다.

“몹쓸 눈이야. 몹쓸 눈.”

아침 해가 먹구름에 가려 아성 깊은 곳이 어둠에 젖었다. 한 뼘짜리 창틈으로 눈송이가 스며들어 나풀나풀 춤을 추다 차가운 바닥에 몸을 뉘었다. 이끼 낀 돌 냄새, 축축한 나무 냄새, 기름 타는 냄새, 오래 고인 먼지 냄새가 적막한 성을 더욱 외롭게 장식했다.

“이 창문 말이에요. 시대착오적이지 않아요?”

어린 집사가 창 아래 쌓인 눈을 쓸어내며 말했다. 로벨은 시골 농부가 만든 왕좌에 앉아 대꾸했다.

“성(城)은 지키는 곳이야. 모든 문은 적이 들어오지 못하게 작고 좁아야 해.”

“저 밖에 성벽은 뭐하고요? 솔직히 도시를 점령하고 내성을 넘었으면, 이 작은 아성은 입김만 불어도 날아가잖아요.”

그 옛날 언덕배기에 덩그러니 지어진 성이라 그런 것까지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최후까지 싸우는... 기사의 그런 거 있잖아.”

“기사의 뭐요? 자존심이요?”

“그거랑 비슷한 거. 아, 맞다. 긍지. 긍지잖아.”

“그 긍지가 난방비를 주지 않으니까 하는 말이죠.”

초겨울이라 벌써부터 성문을 걸어 잠글 수 없었다. 오후가 되면 알현하러 사람들이 찾아올 텐데, 왕의 위엄과 방문객의 건강을 위해 화로를 여러 개 들여야 했다.

“요즘 왕들은 성이 아니라 큰 저택을 짓는데요. 궁(宮)이요. 정원도 있고, 파티장도 있고, 유리창이라 외풍도 안 들고요.”

‘옆집 찰스는 공부도 잘 하고...’ 수준의 넋두리였다.

“그거 지으려면 페닝이 엄청 들 텐데?”

“윽... 그건 안 되죠.”

언젠가는 로드릭 궁전을 지을지 모르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옛 신의 가르침이 무뎌졌고 하나 그의 신실한 종복들은 사치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공왕 폐하, 벌써 나오셨습니까?”

펄프 대장이 성문 한쪽을 빠끔히 열다가 왕좌에 앉은 로벨과 눈을 마주쳤다. 헛기침이 절로 나왔다. 왕의 용병대장으로 진작 와서 자리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로벨은 화내지 않았다.

“눈이 많이 쌓였지?”

“예. 안 그래도 할 일 없는 놈들을 잡아다 계속 쓸라고 했습니다.”

성문 밖에서 할 일 없던 용병들의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시간 있으니까 몸 좀 녹여.”

그리 많은 시간은 아니었다. 잠시 뒤 페리 행정관이 알현 신청자 명단을 가져와 보고했다. 날도 차고 눈도 쌓여 오가기 쉽지 않을 텐데 숫자가 꽤 되었다.

“상인들이 많네?”

“철광업자입니다.”

철은 전략물자라 철을 사고파는 것은 왕의 허락이 필요하다. 물론, 게으른 왕이 일일이 허가장을 써줄 수 없으니 그 지역 영주나 행정관에게 권한을 주어 관리토록하며, 무기를 갑자기 대량으로 만들거나 적국에 수출하지만 않으면-그리고 광산세를 제때 내기만 하면- 크게 개입하지 않았다.

“두 번째입니다.”

“두 번째?”

“방금 말씀하신 것 중에 두 번째 이유입니다.”

어린 집사가 알 것 같다는 얼굴로 끄덕였다.

“잉그비아 왕국이 무역협정을 파기해서 철광 수출을 금지했잖아요.”

“내가?”

“예. 폐하가요.”

로벨은 억울하단 제스처를 취했다. 실제로도 억울했다. 기획하고 실행한 것은 어린 집사와 페리 행정관이었다. 로벨은 서류에 인장을 찍은 것밖에 없었다.

“아주 잘한 거예요. 우리가 보낸 철이 창칼이 되어 우리 피를 짜내게 둘 수 없잖아요.”

“역시 그렇지?”

“철광 수출을 허가해 달라는 요청일 텐데, 단호하게 씹어주시면 돼요.”

“잉그비아 왕국과 전쟁할지도 모른다고 알려주면 될까?”

“아니요! 그건 안 돼요! 그럼 의도적으로 생산량을 줄여서 가격을 올릴 거예요. 저들도 대충은 짐작하고 있겠지만, 왕이 공식적으로 밝히는 것은 무게가 달라요. 외교적으로도 그렇고요.”

지금은 협정파기에 따른 보복조치로 알려진 게 좋았다. 전쟁의 기운이 엿보이면 기사부터 농민까지 무기를 구하러 뛰어다닐 테니 재고쯤은 아무 문제없었다.

“어린 집사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로벨은 명단을 몇 장 더 넘겼다. 로드릭 상회 소속의 상단주와 인근 영지의 후계자와 로드릭 시티 병원장...

“키르케가 왜 여기 있는 거야?”

“그야... 알현을 요청했으니까요?”

“왜? 할 말이 있으면 그냥 찾아오면 되잖아?”

어린 집사가 빗자루를 끌어안고 한숨 쉬었다.

“제가 볼 때 시위 같아요.”

“무슨 시위?”

“공왕 폐하가 안 놀아준다는 시위요.”

로벨은 한 번 더 억울한 제스처를 취했다. 남쪽 지방을 순시하고, 행정업무를 처리하고, 추수제를 치르느라 바빴다.

“비겁한 변명입니다!”

“비, 비겁해?”

어린 집사가 불신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로벨은 양심이 아파 외면했다. 솔직히 인정하자면 호른 경과 만나느라 마녀 키르케와 놀지 못했다. 아야와 이야카도 삐져서 마녀를 따라 가출했는데 몰랐다.

“아, 알았어. 알았다고. 오늘 저녁에 같이 밥을 먹자. 좋은 포도주 한 병 따고.”

“세 병은 따야 할 걸요. 키르케잖아요.”

로벨은 올해 마지막이 될지 모를 명단을 덮고 자세를 고쳤다. 어린 집사도 빗자루를 기둥 뒤에 숨기고 옷매를 정리했다. 누가 따로 고하지 않았지만, 아성의 외문과 내문 사이에 알현자가 옹기종기 모여 있을 것이다.

“시간 됐을까요?”

“해가 어두워서... 아마 됐겠지?”

“성문을 열어라!”

오늘도 볼탄 반도 왕의 일과가 시작됐다.

@

눈 쌓인 도시는 퍽 아름다웠다.

시내의 고층 빌라도, 외곽의 허름한 판잣집도, 오물투성이 골목길도 하얗게 단장했다. 추위에 면역이 있는 9살 이하 어린아이들과 뭉게뭉게 피워나는 굴뚝 연기가 아니면 한 폭의 그림이라 여겼을 것이다.

“멀리서 볼 때만 아름답죠. 뭐든지 그렇지만...”

“뭐든지?”

“나비 얼굴 보셨어요? 눈알이 툭 튀어나오고 털이 잔뜩 나서 무시무시하게 생겼어요. 꽃도 그래요. 진드기가 우글우글거리는데...”

“그만! 그만!”

“사람도 똑같아요. 거리를 두고 보면 괜찮은 사람도 가까워지면 이것저것 마음에 안 드는 거 투성이죠. 공왕 폐하도 명심해야 해요. 아무나 막 살갑게 대하고 그러면 안 돼요. 예를 들어 호른 경이나, 호른 경이나, 호른 경이나...”

“결론이 왜 그래?”

늑대성의 언덕길을 지나 시장으로 통하는 남문대로를 걸었다. 어린 집사 말이 전부 틀리지 않았다. 눈 덮인 거리를 걷는 것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영역 표시한 오물이 선명히 보이고, 눈 치우느라 화가 많이 난 시민과 오들오들 떠는 거지, 집시, 부랑자 등이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로벨은 갓난쟁이를 안고 깨진 그릇으로 구걸하는 아낙 앞에서 모닝스타를 세웠다. 로벨이 왕이란 것을 모르지만, 멋진 말과 멋진 망토로 높은 분이란 것을 짐작한 아낙은 몸을 한계까지 낮추었다.

로벨은 주머니를 뒤져 용돈으로 받은 페닝을 몇 개 꺼냈다. 10페닝짜리 금화 한 닢과 1페닝 짜리 은화 여섯 닢. 로벨은 은화를 전부 깨진 질그릇에 던졌다. 두 개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튕겨져 나왔지만 아기를 안아 손이 부족한 아낙은 바로 줍지 못해 허둥거렸다. 주위의 부랑자들이 눈을 반짝였다.

“지미네 여관으로 가. 내가... 아니, 어린 집사가 보냈다고 하면 쫓아내지 않을 거야.”

아낙은 듣는 둥 마는 둥 은화를 챙겨서 자리를 떠났다. 현명한 처세였다. 부랑자들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으니 오래 머물러 좋을 것 없었다.

로벨은 슬금슬금 다가오는 수염 난 것들을 힐끔 보았다. ‘나도 좀...’ 을 실천하려던 부랑자들은 차가운 표정과 더 차가운 칼자루에 바로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쳐다보는 눈동자가 한 쌍 있었다.

“조금 전에 제가 한 말 어디로 들었어요?”

로벨은 딴청부리는 모닝스타를 두드린 후 말했다.

“너무 그러지마. ‘인간’이라면 해야 할 일이잖아.”

어린 집사는 로벨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입술을 삐죽였다.

“그래요. 저는 인간미 없는 집사죠. 뱀입니다. 뱀. 쒸에에-”

로벨은 못 들은 척하고 앞장서서 출발했다. 칭얼거림 한 번 하지 않는 갓난쟁이가 떠올랐지만, 세 걸음 만에 기억에서 지웠다.

빈자(貧者)의 겨울은 유난히 혹독했다. 아이러니하게 부자가 많은 도시에서 더욱 그러했다. 일자리는 한정되어 있는데, 일을 구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도시의 공기는 자유롭다.’

이 말은 자유민의 신분을 뜻하는 동시에 공기 말고 누릴 것이 없다는 뜻으로도 쓰였다. 귀족도, 길드도, 신원이 증명되지 않은 외지인은 고용하지 않았다. 여름과 가을에는 그나마 막일이라도 할 수 있지만, 겨울이 되면 하루하루 생존하는 것이 지상과제였다.

“그렇다고 꼭 죽으란 법은 없죠.”

로벨의 말대로 ‘인간미’란 것이 있었다. 사실 인간 외에도 무리 짓는 짐승은 거진 가진 것인데, 동정심, 측은심, 자비심 따위였다.

옛 신의 거룩한 사제나 자선사업에 관심이 많은 사업가는 가난한 시민을 위해 구호소를 운영했다. 로드릭 시티에서는 황금 보리 수도원과 닥터 줄리안의 병원이 대표적이었다.

“마녀 키르케의 병원이 아니고요?”

“벗으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키르케는 좀...”

“진실을 말해주는 것도 참된 벗이죠.”

로드릭 시티의 명물이 된 ‘병원’은 겨울 한정 빈민 구호소가 되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겨울에 급증하는 감기 환자를 위해 수프와 난로를 제공하다 보니 어느새 구호소가 되었다. ‘병원(Hospital)’의 본래 뜻이 ‘가난한 자들의 쉼터’였으니 사실 제 역할이라 할 수 있었다.

“앗, 저기 키르케가 있어요.”

마침 마녀 키르케가 솥단지를 들고 낑낑거리며 지나갔다. 아야와 이야카가 돕겠다고 늙은 몸뚱이를 들썩이는데, 이족보행 기술이 없어 방해만 되었다.

로벨은 살금살금 뒤로 다가가 솥단지를 번쩍 들었다. 마녀는 갑작스러운 조력에 깜짝 놀라 비명 질렀다.

“끼이이야아아-!”

직업정신이 충만한 비명이었다.

“기사님? 기사님이 여기 왜... 앗! 조심하세요! 귀한 약재가 들어간 거예요!”

로벨의 괴력을 몰라본 소리였다. 로벨은 무쇠단지를 한 손으로 거뜬히 들고 인사했다.

“시내 순찰 중이야. 별일 없지?”

“기사님이 제 솥을 뺏어간 거 말고 없어요.”

로벨이 ‘도로 가져갈래?’ 하고 내밀자 마녀는 뒷짐 쥐고 혀를 낼름거렸다.

“그런데 약재라고? 수프가 아니야?”

“시도 때도 없이 배고픈 사람들이긴 하지만 밥때도 아닌데 밥을 주진 않죠. 약이에요.”

의심 많은 어린 집사가 솥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격하게 기침했다.

“이게 무슨! 콜록! 냄새가 독해요!”

“그야 당연하죠. 화살 맞은 사람한테 먹일 약이니까요.”

로벨의 표정이 조금 이상해졌다. 사람 사는 곳이라 칼 맞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화살 맞는 경우는 좀처럼 없었다. 활과 화살이 귀하기도 하거니와 애초에 활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끽해야 사냥꾼이 사냥할 때 지참하는데, 가을 추수 이후 사냥 허가를 내준 적 없었다.

“외지인이야?”

“출신은 모르겠어요. 어젯밤 존스네 아이들이 성 밖에서 데려왔어요. 화살을 여러 개 맞았는데 갑옷을 입어서 살았어요. 열독이 올라 고비지만요.”

“뭐야! 그럼 군인이잖아요! 기사? 용병이에요?”

“복장은 용병 아저씨인데, 기사님 같아요. 이런 게 나왔어요.”

마녀 키르게가 꼬뜨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피에 젖은 편지였다. 별거 아니라 넘기기에 종이가 고급이고 봉인이 독특했다.

“이거... 사트로 가문 문장 아니에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좋은 예감보다 항상 적중률이 높은 예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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