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8화. 요령
과묵한 몬트와 흉내쟁이 퍼시발이 북쪽과 동쪽으로 떠났다.
목적지는 극비지만, 호기심은 옛 신도 어쩌지 못한 피조물의 본능이라 오지랖 많은 시민들 사이에서 소문이 퍼져갔다.
“북쪽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구만.”
“전쟁이 아니라 반란이라는데?”
“가만, 가만, 북쪽이면 사트로 가문의 나라가 아닌가?”
“그쪽은 나라가 아니라 후작령(領)이지. 아무튼, 그쪽 영주들이 군대를 모으나 봐.”
이쯤 되면 비밀이고 뭐고 없었다. 머리 좀 쓴다는 시민들은 최근 잉그비아 왕국과 볼탄 반도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점, 잉그비아 왕국의 섭정 존 오브 곤트 공작이 사트로 가문의 곤트령을 출신이란 점, 그리고 믿을 수 있는 소식통이 전해준 간밤의 소란으로 그럴듯한 추리를 해냈다.
“...누구야?”
로벨이 ‘믿을 수 있는 소식통’의 정체를 물었다. 필히 관계가 있을 외팔이가 쩔쩔매었다.
“그게, 저기, 누군지 모르지만, 멍청해서 저지른 실수니까, 어, 음, 공왕 폐하? 용서해주시면 안 될까 생각을...”
로벨은 한숨 한 번 쉬고 용서했다. 어차피 지켜본 눈이 많아 숨길 수 없었다.
“볼프 후작이 준비할 시간은 충분해. 눈이 녹을 때까지 움직이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시간은 공평했다. 곤트 가문과 그 동조자들도 충분한 시간을 가졌다.
포로가 된 칼자국 존슨을 통해 알아낸 바로 곤트 가문이 고용한 용병만 300명이 넘었다. 잉그비아 왕국 내전에서 솜씨를 증명한 최정예 용병들이었다. 비록 외팔이 소대에게 무참히 깨지긴 했지만, 그것은 도시 잠입을 위해 중, 장병기를 놓고 온 탓이지 실력이 모자란 탓은 아니었다.
“겨울이 끝나기도 전에 그만한 숫자를 확보했으니... 그런데 페닝이 어디서 난 거지?”
“북해를 건너왔겠죠. 처음부터 저쪽에서 꾸민 짓이니까요.”
여름에 일어난 몬스터 소동부터 의심스러웠다. 종이 다른 수천 마리의 괴물이 붉은 산을 넘어 ‘남쪽’으로 진격했다. 그 의도가 무엇인지는 악마추종자를 잡아 심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봉신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동맹 가문을 분열시키고, 전초기지를 마련해 군사를 모으고....”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과정에서 ‘잉그비아 왕국’은 ‘볼탄 반도 공국’을 공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악마추종자, 괴물, 그리고 사트로 가문의 내부 분쟁이었다. 칼솜씨는 몰라도 정치와 모략은 잉그비아 왕국이 몇 수 위였다.
“역시 경고만으로 부족하겠어.”
“예. 확실히 경고해야죠.”
로벨과 어린 집사가 서로를 보았다. 같은 단어지만 어감이 달랐다.
볼프 후작에게 위험을 경고하고, 리처드 2세와 존 곤트 공작에게 위기를 경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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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깊어지며 몇 차례 더 눈이 내렸다. 개울이 꽁꽁 어는 혹독한 한파도 지나갔다. 그리고 모두가 예상한 북부 내전이 시작되었다.
시작은 곤트 백작이 주도한 반(反)로드릭 동맹이었다. 지난 전쟁과 지지난 전쟁으로 이권을 많이 빼앗긴 북방영주들은 볼탄 반도 왕이라 자칭하는-어디까지 비하의 의미다- 로드릭 가문과 협력하는 데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고, 그것을 빌미로 볼프 사트로 후작의 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본인들도 알고, 상대방도 알고, 제삼자도 알지만, 그저 핑계고 빌미였다.
현(現) 곤트 백작이 잉그비아 왕국 섭정 존 오브 곤트 공작의 외삼촌이란 것을 굳이 거론하지 않아도 돌아가는 정세가 그러했다. 북쪽 바다에서 막대한 자금이 흘러들어왔다.
전황은 볼프 사트로 후작에게 불리했다. 지난 10년간의 패배로 기사들의 불신이 가득했다. 소환에 응한 가문이 고작 3개 가문뿐이었으니 과거 왕국을 주름잡은 12기사의 위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좌절은 길지 않았다. 곤트 백작이 명분 삼은 로드릭-사트로 군사동맹이 효력을 발휘했다.
“울프 용병단 북군 제1, 제2, 제4중대가 출진준비를 마쳤습니다.”
“바위성에서 32명, 가시성에서 27명, 파도성에서 120명, 폭풍성에서 51명을 보냈어요.”
“호수성과 바람성에서 방패세 지불하겠다고 연락 왔습니다.”
로벨 로드릭 깃발 아래 약 1천 명의 군사가 집결했다. 봄이 오지 않은 시기에 갑작스러운 원정이란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일이었다. 로벨의 권위가 탄탄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지휘관을 꼭 하버트 페르젠 ‘주니어’ 백작으로 해야 해?”
“가문으로 보나 군사 규모로 보나 적임자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무슨 걱정인지 아는데, 켈트 남작이 군사참모로 따라가고, 호른 경이 울프 용병단을 별도 지휘하니까 괜찮을 거예요. 주니어 백작도 전쟁경험이 아주 없지는 않잖아요.”
로벨이 지휘하지 않는 로벨 로드릭 군은 로벨의 불안과 불만이 무색하게 연전연승했다. 로벨을 따라다니며 실전경험을 쌓은 기사들과 무적무패 이름을 짊어진 용병들은 실로 막강했다.
로벨은 한적한 집무실에서 ‘이겼고, 이겼고, 또 이겼습니다’ 정도로 요약되는 장문의 보고서를 받고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주인공 자리를 뺏긴 공연이 성황리에 치러진 기분이었다.
기분이 이상한 것은 볼프 사트로 후작도 마찬가지였다. 사트로 가문의 몰락 원인이 로벨 로드릭인데, 그 원흉이 구원자가 되었으니 기뻐하기가 애매했다.
새싹이 머리 위의 흙을 털며 수줍게 모습을 드러낼 때 집 떠난 로벨 로드릭 군이 돌아왔다. 지난 서른 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대승(大勝)이었다. 창칼에 다친 병사보다 추위에 몸 상한 병사가 몇 배 더 많았으니 전투 과정은 길게 이야기할 것도 없었다. 세인들은 로벨 로드릭 왕이 기뻐할 거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가장 기뻐한 것은 어린 집사였다.
“봤죠? 봤죠? 이제 공왕 폐하가 싸우지 않아도 이긴다고요!”
조금 섣부른 단정이었다. 사트로 가문 내전은 길고 긴 북해전쟁의 서문이었다.
존 오브 곤트 공작이 외삼촌 곤트 백작의 복수를 이유로 사트로 가문에 선전포고했다.
미리 서술하자면 곤트 백작이 죽거나 다친 것은 아니었다. 잉그비아 왕국으로 망명한 것도 아니며, 사실 존 오브 곤트 공작과 그리 끈끈한 사이도 아니었다. 후대인이 볼 때는 어처구니없지만, 국가보다 가문과 명예가 앞서는 시대에는 그럴듯한 이유였다. 기사들은 물론이고, 전쟁에 동참하는 자유민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역시 이렇게 되네.”
포비아 국왕과 포클랜드 대주교, 저 멀리 아이란드 왕국의 교황 성하까지 나서서 중재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최소 2년 동안 준비한 일이었으니까.
로벨은 아직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기사들을 계속해 소환했다. 주종관계에 묶인 이상 부름에 응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지만, 현실은 계약서처럼 아름답지 못해 여러 이유로 불참하는 기사가 많았다. 건강, 가난, 자연재해, 심지어 길이 진창이라 못 간다는 기사도 있었다. 그것이 보편적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로벨이 강경하게 요구한 탓인지, 아니면 지난 가을 전국을 순회하며 호소한 탓인지 거의 모든 가문이 부름에 응했다.
“세상에...”
대지에 푸른 기운이 보일락말락하는 이른 초봄, 파종을 위해 갈아엎은 춘경지 옆으로 일대 장관이 펼쳐졌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하늘 높이 솟은 수백 개의 깃발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눈에 띄려는 듯 긴 장대에 커다란 깃발을 걸었다. 무심코 보면 기수가 깃발 아래 매달린 듯 보일 정도였다. 곰, 사자, 독수리, 용, 사슴, 백조, 사냥개, 그리폰 등등 온갖 짐승이 바람에 나부꼈다.
정확한 통계비율은 낼 수 없지만, 보편적으로 깃발의 숫자가 곧 군대의 규모였다. 깃발을 지참한 기사(Knight banneret)만 200명이 넘었으니, 그 휘하의 기사와 기사 종자, 용병, 하인 등등은 수천에 이르렀다.
깃발만큼이나 가지각색인 금속 투구와 오후 햇살에 반짝이는 판금 갑옷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수백 마리의 말이 뿜어내는 땀 냄새와 싸지르는 배설물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여기를 봐도 기사, 저기를 봐도 기사, 한참 뒤에 다시 봐도 기사가 있었다. 볼탄 반도에 이렇게 기사가 많았나 싶을 정도였다. 어린 집사가 어린 집사답게 감탄했다.
“저것들이 먹고 마실 식량을 생각하면...”
자기가 먹을 비상식량 정도는 싸들고 왔겠지만, 전쟁이 길어지면 필연적으로 보급도 많아졌다. 먹을 것뿐만 아니라 무기, 갑옷, 편자, 기름, 가죽, 붕대, 술까지 필요한 것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기사 하나가 전장에서 활약하기 위해서는 농민과 장인과 행정관이 최소 30명이 필요했다. 어린 집사의 어깨가 30배쯤 무거워졌다.
“전쟁 비용 일부는 볼프 후작이 부담할 거야.”
“일부요? 아니죠. 최대한 많이 부담시키세요.”
로벨은 창칼에 앞서 주판으로 싸우는 어린 집사를 위로하고 파나케아 투구를 머리에 얹었다. 기사 중의 기사, 기사의 왕도 출병준비를 마쳤다.
“로벨 로드릭 공왕 폐하시다!”
“우리의 왕이 오셨다!”
로벨이 호른 경, 켈트 경, 바이란 경 등을 거느리고 성을 나오자 4천 8백 명의 대군이 입을 다물었다. 성벽 위에서, 길가에서, 농장 지붕에서 몰래 훔쳐보던 로드릭 시민도 덩달아 침묵했다. 눈치가 부족한 전투마의 칭얼거림과 깃발 나부끼는 소리만 남았다.
“저 간악한 잉그비아 왕국의...”
로벨은 리암 수사가 밤새 써준 연설문을 더듬다가 저리 치웠다.
“섬나라의 꼬마 왕과 정신 나간 공작이 볼탄 반도에 도전장을 던졌다.”
사나운 기사들은 ‘외교적 결례’ 따위 신경 쓰지 않고 껄껄 웃었다.
“그리고 볼탄 반도는 도전을 피하는 법을 모른다.”
“그렇습니다!”
“옳은 말씀이오!”
기사 중 일부가 창을 흔들며 호응했다. 연설가의 재능이 없어도 달아오르는 분위기를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철부지 왕과 미치광이 공작에게! 잊을 수 없는 교훈을 새겨줄 것이다!”
로벨은 바이저를 내리고 아론다이트를 뽑아 하늘을 찔렀다.
“이 땅에 허락 없이 들어온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주자! 출진하라!”
“출진하라! 출진하라!”
지휘계통이 통일되지 않은 군대를 움직이려면 몇 가지 요령이 필요했다. 중심이 되는 울프 용병단을 먼저 움직여 동쪽 가도에 올랐다. 그런 다음 사전에 합의한 백(百) 단위 규모 가문을 꼬리처럼 붙였다. 이제 나머지는 알아서 따라올 것이다.
“검은 성에 도착할 때까지 흩어지지 않으면 성공이지.”
저 멋지고 화려한 군대를 움직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로벨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린 집사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되네요.”
“역시라니까.”
로벨은 호른 경 이하 휘하 기사들을 이끌고 어린 집사 앞을 지나쳤다.
“그럼 다녀올게. 늑대성을 잘 부탁해.”
“저도 다녀올게요! 우리 귀염둥이들 잘 부탁해요!”
기사들 사이에 끼어있는 이상한 고깔모자가 어린 집사의 근심을 더욱 깊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