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6화. 명문
‘진짜’ 로벨은 어느덧 39살이었다.
‘지금의’ 로벨은 4살이 어린데다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아 34살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20대로 보이는 외모는 문제가 있었다. 더 이상 동안이란 말로 해명이 어려웠다. 그 의심이 처음으로 터진 것이다.
“역시 키르케를 데려올 걸 그랬소.”
로벨이 한숨 섞어 한탄하자 호른 경이 척추반사 수준으로 위로했다.
“앤드류 마튼 경은 옛 신의 신자라 축복받은 망치로 머리와 배를 두드릴지언정 마녀의 치료는 받지 않습니다.”
로벨의 말을 오해했다. 치료 때문이 아니라 해명 때문이었다.
로벨의 비밀은 로벨이 ‘로벨’이 아니란 것과 ‘인간’이 아니란 것인데, 그중 후자는 마녀 키르케만이 알고 있었다. 로벨이 딱히 비밀주의라 그런 것은 아니고, 인간이 아니라 말해봐야 믿지도 않거니와 믿어도 곤란하기 때문이다.
“으음... 경의 말이 맞소.”
로벨은 답답한 마음을 삭이고 관심을 밖으로 돌렸다. 로벨의 정체만큼은 아니지만, 지금 하는 일도 중요한 일이었다. 앤드류 마튼 경의 장남이자 구릉성의 새로운 주인 데이스 마튼 경이 충성을 맹세하고 있었다.
왕실이나 제후 가문에 대를 이어 충성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소위 명문(名門)이라 불리는 가문은 3대, 4대 동안 충성을 바쳐온 가문이었다. 그만큼 오래되고 신뢰할 수 있는 가문이란 뜻이었다.
이번 충성서약은 마튼 가문이 로드릭 공국의 명문가로 인정받는 일이기도 했다. 2대에 걸친 충성을 가벼이 여길 왕은 없으니까.
따라서 서약식은 거창하게 진행되었다. 프란시스 시티에서 세 번째로 품계가 높은 고위 사제와 동남동녀로 구성된 성가대를 초빙하고, 서약의 증인이 되어줄 기사를 아홉 명이나 모았다. 서약의 당사자와 호른 경, 폴라 경을 합치면 기사만 열두 명이었다.
“전지전능한 옛 신과 위대한 선조들의 이름으로 나의 왕이자 나의 주군이신 로벨 로드릭 폐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어느 한쪽이 명예를 상실하거나 의무를 다하지 못할 때까지 정당한 이유 없이 맹세를 무효화 할 수 없으며, 만약 이를 어기면 최후의 심판이 도래하는 그날까지 지옥불에서 골고루 볶아진다는 내용을 성경과 성자의 말로 선언한 후 뭇 기사들의 축복을 받았다.
로벨은 데이스 마튼 경을 일으켜 세우고 늙은 마튼 경에게 받아둔 롱소드를 하사했다. 이것으로 구릉성의 적법한 새 주인이 탄생했다. 데이스 마튼 경의 주인자격을 의심하는 것은 로벨의 권위와 권리를 무시하는 것이 되니, 이것이 바로 기사 가문의 정통성이고 겔몬족의 정치근간인 종사제도(從士制度)였다.
“새 영주에게 큰 부담이겠지만, 최근 북해의 바람이 심상치 않소.”
“아버지께 들었습니다. 전란을 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기사와 용병을 모집하고, 무기와 식량을 비축하고, 성의 부실한 곳을 수리하고, 영지민이 동요하여 이탈하거나 재산을 빼돌리지 않게 안심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경험 부족한 영주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늙은 마튼 경이 내년 봄까지 건강을 유지해 좋은 조언을 해주길 바랐다.
“그리고 조금 늦었지만, 공왕 폐하를 환영하는 연회를 열겠습니다.”
기사들이 떼로 모였는데 고기와 술이 빠지면 섭섭했다. 지난 며칠간 물리게 먹고 마신 호른 경 등은 소리 없이 진저리쳤다. 로벨의 일정이 지나치게 강행군이라 쉴 틈도 부족했다.
“간소하게 하시오. 간소하게.”
“간소하게 사흘낮 동안 진행할 예정입니...”
“더! 더! 더 간소하게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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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기사 계급을 ‘사치의 계급’이라 불럿다.
내일 먹을 빵이 없어도 손님을 위해 돼지를 잡고, 버릴 것을 알면서도 혀가 얼얼할 만큼 소금을 뿌리고, 최고급 와인을 싸구려 맥주처럼 마시며 호탕한 척했다. 그것이 기사다운 것이었다.
“허억! 델 포니 산 와인이 셋, 넷, 다섯...”
“역시 키르케를 데려왔어야 했어!”
마녀가 필요한 이유가 점차 늘어났다.
로벨 일행은 값비싼 와인으로 배를 채우고 입가심으로 양고기를 뜯는 호사를 누렸다. 고급술에 뒷전이 되었지만, 구릉성의 양치기와 양은 저 멀리 포클랜드에서도 알아줄 만큼 유명했다. 앞쪽은 험한 쪽으로, 뒤쪽은 맛있는 쪽으로.
로벨이 만족감을 표시하자 데이스 마튼 경도 크게 기뻐했다.
“연회가 마음에 드셨습니까?”
로벨의 얼굴이 살짝 붉었다. 취기 탓도 있지만, 연회 직전에 검소하게 하라고 호통친 것이 부끄러웠다.
“포클랜드에 가뭄이 계속되어 와인 생산량이 많지 않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이 비싼 포도주를 구했느냐는 질문이었다.
“공왕 폐하를 따라 포클랜드에 갈 때마다 조금씩 사 모은 것입니다. 그리 비싸지 않았습니다.”
“...이해가 되는군.”
군대를 끌고 도시를 장악한 야만족 기사가 좋은 술이 있으면 달라는데 흥정할 상인은 없을 것이다. 로벨은 진상을 알고 마음의 부담을 덜었다. 따지고 보면 마신 술 중 3할은 로벨의 몫이었다.
“이제 폭풍성으로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누구한테 들었는지 물을 필요 없었다. 채플린 성에서 도적을 997명째 무찌르고 있는 허풍쟁이가 확실했다.
“동쪽에 신경을 못 쓴 지 오래되었잖소.”
로벨은 두리뭉실하게 대답했다. 자고로 왕은 자식이 많은 어미와 같아 편애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되었다. 데이스 마튼 경은 질투하지 않았다.
“역시 그렇군요. 이렇게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로벨은 의미가 내포된 단어를 바로 해석하지 못했다. 호른 경을 슬쩍 보았지만 별다른 제스처가 없었다. 잉그비아 왕국에 신경 쓰느라 남쪽 사정에 어두웠다. 다행히 마튼 경이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했다.
“조단 랭스터 경의 용맹은 존중하지만, 그의 통치철학은 동조하기 힘듭니다. 올해에만 쉰 명 가까이 사형했다고 합니다. 믿겨지십니까? 무려 쉰 명입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백 명을 채울 기세입니다. 버팅거 시민들은 물론이고, 동부평야의 영주들도 불만이 아주 많습니다.”
생각한 것보다 심각한 이야기였다. 로벨은 알코올 욕조에 몸 담그고 ‘크윽, 좋다~’만 연발하는 뇌를 두들겨 깨웠다. 전두엽의 주름에서 간신히 그럴듯한 단어를 찾아냈다.
“그러니까, 폭풍성이 폭정을 일삼는다?”
음률은 좋은데,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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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일행은 구릉성의 새 영주와 옛 영주의 배웅을 받으며 동쪽으로 출발했다.
몸이 아픈 사람을 두고 할 말은 아니지만, 아무 탈 없이 재산과 권리를 상속하고, 정리할 시간까지 남긴 앤드류 마튼 경은 운이 좋았다.
‘저자는 볼탄 반도 왕이 아닐지도 모른다.’
‘행운아’ 마튼 경이 창밖의 로벨을 보며 중얼거렸다. 겔몬족의 뿌리인 살리카 법은 왕의 법과 교회법보다 상위에 있었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로벨이 로벨이 아니라면, 그가 가진 권리와 재산은 모두 거짓이 된다.
‘안 되지. 안 돼.’
그리되면 로벨에게 인정받은 마튼 가문의 권리 또한 부정될 것이다.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늙은 마튼 경은 구릉 위의 지평선이 로벨을 꿀꺽 삼키고, 반짝이는 별로 토해낼 때까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세월이 흘리고 간 한 줌짜리 지혜가 도움이 되었다.
‘볼탄 반도의 왕이 아니어도 나의 왕이고 우리 가문의 왕이다.’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늙은 마튼 경은 창문을 닫고 눈을 감았다. 좋은 꿈을 꿀 것 같았다.
한편, 로벨 일행도 마음이 편했다. 구릉성은 채플린 성보다 크고 부유했다. 게다가 체류기간이 짧아서 식량도 많이 축내지 않았다. 와인 셀러를 아작낸 것은 미안하지만, 가을 재정에 부담은 없을 것이다.
“지금 속도로 가면 이틀 뒤 버팅거 시티에 도착합니다.”
버팅거 시티. 랭스터 가문이 다스리는 동부의 도시. 로벨의 수입원 중 하나인 소금 광산과 거래하는 곳이며 식품공장이 운영되는 곳이었다. 그리고 말 많고 탈 많은 동부평야의 영주들을 누르는 무게추이기도 했다.
“볼탄 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요.”
“그런 곳을 왜 랭스터 같은 작자에게 준 것이오?”
“그렇게 비하할 만큼 못난 기사는 아니오. 그리고 본래 랭스터 가문의 땅이었으니...”
로벨은 말꼬리를 살짝 흘렸다. 본래는 헤르만 가문과 헤르만 가문에서 독립한 버팅거 가문의 땅이었으나, 호수의 기사 혹은 호수 요정의 기사라 불리는 랑슬로 버팅거 경 사후 랭스터 가문이 차지했으니, 큰 역사로 보면 100년밖에 안 되었다. 로벨 이전에 보잘것없었던 로드릭 가문도 300년의 역사를 가졌으니, 정통성만 보면 다른 가문에 비해 많이 빈약했다.
“그래서 류트 프란시스 공자와 손잡고 반란을 꾀했겠지만...”
한 번 패망한 후 이복형제인 조단 랭스터 경에 의해 간신히 복권된 상태였다. 안 그래도 부실한 정통성이 더욱 약해졌다.
“이번 일도 그 때문인가?”
정치적인 생각을 자주 하지 않아 추리가 빈약했다. 하지만 그럴듯했다.
“그냥 랭스터 경의 성품이 더러... 사나운 탓일 수도 있지요. 공왕 폐하가 쓸어낸 동부에서 공왕 폐하의 기사를 억제할 세력은 없을 테니까요.”
로벨은 잡생각을 지웠다. 어차피 이틀 뒤면 알게 될 일이었다. 서두르면 하루하고 한나절로 줄일 수 있었다.
“빨리 가서 빨리 쉬는 게 좋지 않소?”
체력이 넘치는 왕의 말에 기사와 용병 모두 치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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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도시와 작은 마을을 여러 개 지나고, 그곳 주인들에게 거창한 대접을 받은 만큼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무적무패 왕이 소수의 호위병만 거느리고 남부를 순시하고 있다!’
생업에 바쁜 주민들은 술자리에서 한번, 저녁 식사시간에 한 번 떠들고 잊었지만, 허황된 꿈을 꾸거나 못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로벨의 권력과 명성, 그리고 적개심이 큰 동부평야 분위기를 생각하면 사실 예고된 일이었다.
“적습이다!”
“공왕 폐하를 보호하라!”
볼탄 반도 공국은 누가 뭐라 해도 기사의 나라였다.
빗물에 실려와 외로이 자란 키 작은 관목과 가을바람에 비실거리는 엉성한 잡초뿐인 평야에서 기습을 강행했다. 다시 말해 3, 400야드 밖에서 시작된 기마돌격이었다.
“전령이 아닐까요? 그냥 반가워서 뛰어오는 기사 나리거나... 아니네?”
습격자가 꼿꼿이 세운 창을 앞으로 기울였다. 명백한 전투의지였다.
로벨은 허둥지둥 자리 잡는 울프 용병단을 살폈다. 1중대 1소대는 아바레스트를 사용하는 원거리 부대였다. 전투경험이 풍부하고 갑옷이 우수해서 백병전도 할 수 있지만...
“평지에서 기사를 상대하는 것은 자살행위야! 호른 경! 폴라 경! 본인을 따라오시오!”
기사는 기사로 막아야 한다. 9살짜리 기사 종자도 아는 상식이었다. 그러나 기사가 왕일 때도 그래야 하는지는 어려운 문제였다.
호른 경은 갈등했다. 왕과 함께 돌격하는 것과 왕의 호위병을 희생시키는 것 중 어느 것이 왕을 지키는 길인지 알기 힘들었다. 시간을 두고 고민하면 답이 나오겠지만, 적이 200야드 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는 무리였다. 마주 달리며 속도를 올리려면 지금 결정해야 했다.
더스틴 폴라 경은 이미 결정한 듯 마상용 활에 살을 재고 로벨 뒤에 섰다.
“작은 집사가 알면 씹어서 죽이려고 들겠군.”
호른 경은 장탄식 후 자신의 종자에게서 랜스를 받았다.
“제가 선두에 서겠습니다. 공왕 폐하께서는 후미에서...”
“이랴앗-!”
로벨은 기사가 된 이래 단 한 번도 뒤에서 달린 적이 없었다.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호른 경과 호른 경의 기사 종자가 돌격준비를 갖추자 먼저 달려 나갔다. 단순히 용감해서가 아니었다. 소심해질 시간을 주지 않는 기사대장의 본능이었다. 과연, 더스틴 폴라 경이 발작적으로 박차를 차고 쫓아갔다.
“한 번 죽지! 두 번 죽소? 왕을 따르시오!”
“공왕 폐하는 한 번도 죽으면 안 된단 말이오!”
사실 누구나 한 번밖에 못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