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97화 (497/605)

497화. 조언

4대 12.

고대숫자로 계산하나 동방숫자로 계산하나 알기 쉬운 비율이었다. 무리한, 무모한, 무식한 따위의 수식어가 뒤에 붙는 비율이기도 했다. 그러나 살아 숨 쉬는 전설, ‘무적무패 왕’은 일반적인 경험과 보편적인 상식으로 재단할 수 없었다.

“히이야-하합!”

기사(騎士)가 직업이 되고 계급이 된 것은 ‘말(馬)’ 때문이었다. 크고 무거운 병장기를 크고 사나운 짐승 위에서 휘두르려면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했고, 그러한 기술을 가진 사람을 우대하다 보니 어느새 지배계층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왕의 자리까지 오른 로벨의 승마술은 세상이 검증한 것이었다.

“뭐 저런...!”

로벨과 모닝스타는 한 몸이 되어 적 기마대의 측면을 때리고 빠져나갔다. 시속 32마일 속도로 마주 달리는 상황에서 창의 길이를 가늠해 스쳐 지나가는 것은 천부적인 감각과 갈고 닦은 경험이 있어야 가능한 묘기였다. 그 천재성에 휘말린 안타까운 적 기수는 가슴이 으스러지는 고통과 함께 안장 밖으로 튕겨 나갔다.

“이런, 제길!”

적이 못하는 만큼 아군도 할 수 없었다. 호른 경과 호른 경의 기사 종자는 급히 말머리를 틀어 로벨을 쫓아갔다. 공격은 진즉에 포기했다. 그러나 주무기가 창이 아닌 동방의 기사는 여유 있었다. 로벨처럼 아슬아슬한 거리재기를 할 필요 없이 일찌감치 시위를 당겼다. 어깨가 벌어지고, 승모근과 대흉근이 응축되며 전신의 힘이 검지와 중지에 집중되었다. 활과 활잡이 사이의 살이 몸을 떨었다. 그 작은 떨림이 표적과 일치하자 살의가 해방되었다.

텅-! 시위 튀는 소리가 경쾌했다. 손을 털어 반발력을 떨쳐내고 다음 화살을 잡았다. 사실 판금이든 사슬이든 금속으로 만든 갑옷은 어지간한 충격에 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주 달리는 말 위에서 주고받는 적대적 제스처는 ‘어지간하지’ 않았다. 삽시간에 두 명이 말 아래로 떨어지고 말발굽에 짓밟혀 형체가 사라졌다. 서술은 길지만 시간은 눈 한번 깜박이는 순간이었다. 4대 10으로 바뀌었다.

“워! 워!”

양쪽 다 거리가 멀어지자 고삐를 당겨 말을 세웠다. 적 기마대는 로벨과 울프 용병단 사이에서 잠깐 갈등하다가 로벨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진형을 갖춘 22명의 아바레스터에게 돌격하는 것보다 4기밖에 안 되는 왕을 잡는 것이 100배 이로웠다.

로벨 일행도 말머리를 돌리고 숨을 골랐다. 체력이 아니라 긴장 때문에 호흡이 거칠었다.

“랜스!”

로벨은 기사 종자에게 손을 뻗었다. 어느덧 7년 경력의 기사 종자는 반사적으로 가진 랜스를 내밀었다. 뒤늦게 로벨이 자신의 마스터가 아니란 것과 참나무로 만든 비싼 창이란 것이 떠올랐지만, 소심해서 돌려 달라 말하지 못했다. 호른 경이 한심하게 쳐다보고 말머리를 나란히 붙였다.

“울프 용병단이 공격할 때까지 기다리시지요.”

“저들이 기다려줄 것 같지 않소.”

적들도 바보가 아니었다. 포위당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2차 돌격을 시작했다. 전술도 쐐기꼴에서 일(一)자 모양으로 바꾸었다. 조금 전처럼 빠져나가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도적 따위가 아니군요.”

“애초에 전투마를 끌고 다니는 도적이 있을 리 없지.”

전투마를 팔면 시골의 작은 텃밭이나 도시의 그럴듯한 가게를 장만할 수 있는데, 그 비싼 걸 가지고 도적질을 할 리 없었다. 전력(戰力)과 행동을 보아 신분은 기사고 목적은 암살이었다.

“어찌할 것이오?”

더스틴 폴라 경이 새 화살을 꺼내며 물었다. 10명의 ‘정체불명’ 기사들이 로벨 일행을 감싸듯이 달려왔다.

“본인 뒤에 붙으시오. 정면 돌파할 것이오.”

로벨은 새 랜스를 좌우로 휘둘러 길이와 무게를 가늠하고 옆구리에 끼웠다. ‘포위진’은 듣기에 좋지만 실용성이 없었다. 벽이 얇아 손쉽게 뚫리기 때문이다. 숫자가 두 배 이상 많고, 실력에 자신이 있어서 강행했겠지만...

“히리얏!”

“이럇!”

로벨 일행도 재차 돌격했다. 거리가 가까워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로벨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고 창끝을 비스듬히 올렸다. 표적을 맞히는 것도 힘겨운 평범한 기사는 흉내 내지 못할 고급 마상기술이었다. 적의 창을 어깨 위로 흘리고, 자신의 창을 적의 가슴에 명중시켰다. 속이 꽉 찬 참나무 랜스가 두 동강나고, 창에 맞은 기사의 허리도 두 동강났다.

더스틴 폴라 경은 랜스가 닿기 전에 상대 말을 쏘아 거꾸러트렸고, 호른 경은 기사(騎射)에 당황해 창끝이 흐트러진 적을 손쉽게 제압했다. 두 무리의 기사가 다시 엇갈려 지나갔다. 숫자는 4대 7이 되었다. 아직도 두 배가량 차이나지만, 기세가 처음 같지 않았다.

“그랜드 챔피언! 그랜드 챔피언이야!”

“기마전으로 이길 수 없소! 전술을 바꿔야 하오!”

두 번 격돌해서 0대 5의 교환비를 냈다. 세 번 격돌한다고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정체불명’ 기사들은 겁을 먹었고, 그 불안한 감정이 말에게 전달되었다.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빙글빙글 돌았다.

“역시 무모한 짓이야. 무적무패 왕을 암살하다니? 그게 가능했으면 포클랜드든 잉그비아든 진작했겠지.”

기사 하나가 중얼거렸다. 흥분한 탓인지 조금 ‘크게’ 중얼거렸다. 비슷한 생각 중이던 기사들이 서로를 보았다. 결정은 금방 내려졌다.

“음... 역시 도망가는군.”

더스틴 폴라 경이 시위에 건 화살을 풀었다. ‘정체불명’ 기사가 하나씩 내빼기 시작했다. 호른 경이 다소 날카롭게 말했다.

“정체불명은 무슨... 동부평야의 기사들 아닙니까.”

증거가 없었다. 창에 맞은 기사들은 절명했고, 화살에 말(馬)을 잃고 굴러진 기사는 간신히 숨만 붙어있었다. 심문할 상태가 아니었다.

“공왕 폐하, 무사하십니까?”

“당연히 무사하시지! 우리 폐하잖아!”

애꾸눈과 허풍쟁이가 다가왔다. 충직한 애꾸눈은 전투에 도움이 되지 못해 송구해 했고, 경박한 허풍쟁이는 고용주의 무용에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로벨은 해야 할 일을 한 건실한 농부처럼 말했다.

“시체를 모아. 소지품을 확인하고.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멋대로 가져가지 마.”

“그럼요. 공왕 폐하가 잡았으니 공왕 폐하 몫이지요.”

“...욕심 때문이 아니야. 신원을 밝혀야 하잖아.”

@

기사의 머리에는 쇳가루와 말똥이 가득하다고 비웃는데, 사람이 진짜 말똥일 수 없었다. 신분을 증명할 소지품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시체의 초상화를 그려서 수배하거나 무기와 갑옷 디자인을 근거로 대장장이를 심문하면 정체를 알아낼 수 있겠지만, 시간과 발품이 얼마나 들지 알 수 없었다.

“컥... 커흑...”

로벨은 전신의 뼈가 으스러져 숨을 헐떡이는 기사에게 포도주를 먹였다. 구릉성에서 몰래 가져온 델 포니 산 포도주였다. 기사는 반쯤 마시고 반쯤 흘린 후 눈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도움이 필요하오?”

“부, 부탁... 오.”

로벨은 술병을 호른 경에게 주고 아론다이트를 뽑았다. 기사는 두 눈을 꽉 감았다. 옛 신의 기도문을 읊조리는데 띄엄띄엄했다. 로벨은 귀를 기울이다가 한 구절이 끝나는 순간 칼을 휘둘렀다. 써걱-! 깔끔하게 목이 떨어졌다. 더스틴 폴라 경이 탐탁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숨을 붙여놓고 심문하는 게 좋지 않소?”

“...두 시간도 살지 못할 목숨이오.”

로벨은 피를 닦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가족과 동료를 위해 입을 다물 것이다. 추하게 괴롭힐 바에 명예롭게 보내주는 것이 마음 편했다. 게다가 암살 목적은 짐작이 갔다.

“폭풍성으로 갑시다.”

@

버팅거 시티가 가까워지자 까마귀 친구가 반겨주었다.

어느 도시에나 걸려있는 친구지만, 이곳은 숫자가 조금 많았다. 성문에 이르기까지 30구 이상 지나쳤다.

“사형수가 이렇게 많나?”

“멍청한 소리!”

사람 사는 곳에는 반드시 규칙이 있고, 대다수의 소시민은 규칙에 수긍해 조용히 살아간다. 무리에서 ‘배제’될 만큼 일탈하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다시 말해 인구 1만의 대도시라도 사형수는 열이 넘지 않았다. 영주가 정상이면 말이다.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많이 죽인 거지?”

“에잇, 퉤! 퉤! 못 볼 꼴 봤네. 빨리 갑시다요.”

로벨 일행은 속도를 조금 높였다. 그러나 못 볼 꼴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성문을 지나자 시체가 더욱 많아졌다. 나뭇가지에 목을 거는 것으로 모자라 장대에 못을 박고 기념비처럼 세웠다. 9살쯤 된 소년, 60살이 넘은 노파, 40대 일가족과 20대 남녀 한 쌍... 거친 동방에서 온 더스틴 폴라 경조차 혀를 찼다.

“이교도 사냥이라도 하는 건가?”

시체 전시물은 폭풍성 언덕을 오르는 내내 계속 볼 수 있었다. 허풍쟁이는 숫자를 세다가 70구에서 포기했다. 아무튼 많았다. 아주 많았다.

“공왕 폐하! 어서 오십시오! 이런 누추한 곳을 찾아주시다니 실로 영광입니다!”

폭풍성의 영주이자 랭스터 가문의 당주, 조단 랭스터 경이 가족 전원을 데리고 성 밖으로 마중 나왔다. 오랜만에 만난 가신이지만 반가워할 수 없었다.

“그동안 잘 지냈소? 아닌 것 같지만 예의상 묻는 것이오.”

“으하하핫! 재미있는 농이십니다!”

랭스터 경은 과장되게 허리를 꺾으며 웃었다. 호른 경이 전투마를 몇 걸음 전진시키며 말했다.

“공왕 폐하가 실없는 농담을 하겠소? 오면서 보았소. 저 시체들이 대체 무엇이오? 아주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야 할 거외다.”

호른 경뿐만 아니라 울프 용병단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스무 명이 넘는 중무장 병사가 으르렁거리자 랭스터 경도 웃어넘길 수 없었다.

“제가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선 안으로 드시지요. 술과 고기를 준비...”

“지금 설명하시오. 지금 당장.”

로벨이 칼자루에 손을 얹자 더 이상 말을 돌릴 수 없었다. 랭스터 경은 자세를 똑바로 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저들은 반역자입니다. 공왕 폐하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고 제멋대로 충성의 대상을 바꾸는 무도한 자들입니다.”

“...그럴 리가?”

“사실입니다. 세금을 내지 않는 시민과 영지를 이탈한 농민, 그리고 옛 프란시스 가문과 접촉한 장원의 기사들입니다.”

로벨의 표정이 꾸겨졌다.

“앞에 두 부류는 어디에나 있는 범죄자 아니오? 그리고 프란시스 가문은 아무 힘이 없는데 무엇이 문제요? 고작 그런 이유로 수십 명을 죽였단 말이오?”

로벨의 질책이 계속되자 랭스터 경은 당황했다. 잘했다는 칭찬은 기대 안 했지만,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놓고 질책할 줄은 몰랐다. 로벨은 겁먹은 부인과 아이들을 보고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경의 권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오. 그러나 ‘조언’을 몇 마디하고 싶소. 그대가 나의 기사라면 귀를 열고 가슴에 새겨주리라 믿소.”

이쯤하면 왕치고 정중한 부탁이었다. 조단 랭스터 경은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로벨의 ‘조언’은 늦은 감이 있었다. 그것도 많이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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