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5화. 요양
두 사람 다 인정하지 않겠지만, 로벨과 페르젠 ‘주니어’ 백작은 닮은 점이 많았다. 예를 들어 눈치가 부족하고, 머리 쓰는 일을 싫어하며, 상당한 기분파였다. 허풍쟁이가 피식- 웃었다.
“기사들은 전부 그렇지 않습니까요?”
“난 아니다.”
호른 경이 정색하고 대답했다. 간밤에 기분 나쁘다고 칼부림한 기사 양반이라 아무도 믿지 않았다.
어쨌든 왕과 백작은 아닌 척하면서 죽이 잘 맞았다. 선대의 원한과 그로 인한 복잡한 주종관계가 아니었으면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15피트가 넘는 랜스를 쓸 수 있단 말이오? 물론, 본인은 쓸 수 있지만, 보통은 말 위에서 들지도 못할 텐데?”
“저도 쓸 수 있습니다만, ‘보통은’ 쓰지 못하기 때문에 속을 파서 무게를 줄입니다.”
“그러면 창대가 약해서 갑옷을 뚫지 못할 텐데?”
“난전에서는 낙마로 충분하지요. 마상시합을 보십시오. 포플러나무로 만든 버드나세에도 떨어지지 않습니까.”
“그것도 그렇군. 아, 술잔이 비었소.”
“여봐라! 위대하신 무적무패 왕께서 술이 모자라신다!”
“...내 술잔 말고, 백작의 술잔 말이오.”
“이런! 만만치 않게 위대한 백작이 술이 모자라다! 빨리 가져와!”
어쩌면 이미 친구였다. 성격과 취미가 비슷해서 대화가 잘 통했다.
마상시합장의 위치, 규칙, 상금, 참가자 신상정보 등을 정답게 이야기하다가 우승후보를 두고 살쾡이처럼 서로 으르렁거리다가 오래된 토너먼트 갑옷이 보이자 언제 대립했냐는 듯 최신 갑옷 유행에 관해 떠들었다.
“봉신과 가까운 것이 좋긴 한데... 하필 저 바보 백작이라니...”
마음이 불편한 것은 페르젠 가문의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주군의 주군을 대놓고 적대할 수 없지만, 지난 전쟁의 일과 로드릭 시장으로 인한 손해를 생각하면 로벨 왕이 곱게 보이지는 않았다. 로벨이 힘이 약했으면 에릭 프란시스 공작에게 그랬던 것처럼 주저 없이 배신할 것이다.
“그런 멍청이들이라도 필요한 것 아니겠소.”
더스틴 폴라 경이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수시로 곁눈질하는 것이 어젯밤 일을 마음에 담아둔 듯했다. 호른 경은 술에 취해 장난이 과했다고 사과했지만, 그 눈빛은 결코 취한 게 아니었다. 호른 경은 과도한 경계를 모른 척하고 말했다.
“그래도 다행히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이오.”
“그렇소?”
“주인의 입장도 배려해야지 않겠소.”
일반적으로 왕이 참관하면 명예롭고 영광스럽지만, 페르젠 가문 정도 되는 제후에게는 아니었다. 주인공 자리를 뺏길뿐더러 생색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시합에 참가한 기사들 모두 페르젠 백작이 아니라 무적무패 왕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할 것이 뻔했다. 그러니 인기 많은 왕은 개최 전에 자리를 피하는 것이 옳았다.
“언제쯤 출발할 것이오?”
“구릉성과 늪지성을 지나 버팅거 시티의 폭풍성을 방문한 후, 호수성을 걸쳐 늑대성으로 돌아갈 것이오. 추수제 전에 전부 돌려면 서둘러야 할 것이오. 내일, 늦어도 모레 출발할 것 같소.”
일정은 로벨의 마음이라 그저 추리였다. 더스틴 폴라 경은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근심했다.
“그런데 설마 들리는 곳마다 술판을 벌이지는 않겠지?”
“글쎄, 경이 볼탄 반도의 영주라면 어찌하겠소?”
왕이 오셨다. 그냥 보내면 섭섭했다.
“젠장. 죽겠군. 차라리 전쟁터로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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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하루를 쉬며 제법 많은 시간을 페르젠 백작 일가와 보냈다.
사실 진작 했어야 할 일이었다. 왕이라고 하나 기사들의 수장이자 영주들의 대표일 뿐이었다. 더욱이 정통성이 부족한 새내기 왕은 페르젠 가문 같은 전통 있는 제후들의 지지가 중요했다. 잉그비아 왕국의 침략 징후가 볼탄 반도 정치에 호재로 작용했다.
“‘내 토너먼트’에 참가한 기사들에게 충성을 다짐받고 전쟁에 대비토록 하겠습니다. 왕을 싫어하는 기사가 있다고 해도 잉그비아 촌것들보다 싫어하진 않을 테니 안심하시지요.”
당사자 앞에서 ‘너를 싫어하는 사람’ 운운하는 게 당혹스럽긴 하지만, 페르젠 ‘주니어’ 백작이라 화나지 않았다. 겉과 속이 똑같아서 오히려 좋았다.
‘헤르만 백작 같은 능구렁이보단 저런 단순한 작자가 낫죠.’
어린 집사의 평가대로였다. 로벨은 만났을 때와 달리 악수를 하고 가볍게 포옹했다.
“그럼 백작만 믿고 돌아가겠소.”
북쪽이 아니라 남동쪽으로 가니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돌아서 가는’ 거지만, 굳이 정적 가문의 이름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로벨은 모닝스타에 올라 신호했다. 잘 먹고 잘 쉬어서 배가 빵빵해진 허풍쟁이를 선두로 울프 용병단이 출발했다. 다음 목적지는 로벨의 초창기 봉신이자 늑대성의 기사 중 최고령자인 앤드류 마튼 경의 영지였다.
“그러고 보니 마튼 경 얼굴을 못 본지 꽤 되었소?”
“최근 몸이 안 좋아 성에서 요양한다고 합니다.”
“그렇소? 키르케를 데려올 걸 그랬소.”
“마튼 경은 보기보다 독실한 신자입니다. 마녀 아가씨의 치료를 기분 좋게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건 몰랐는데?”
“주군 앞에서 주군의 정인(情人)을 욕할 수 없으니까요.”
로벨과 호른 경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도란도란 잡담을 나누었다. 정치 인맥이 얕은 더스틴 폴라 경은 대화에 끼지 못해 두어 걸음 떨어져 따라갔다.
하늘이 높고 바람이 시원하니 완연한 가을이었다. 구름 평야의 낮은 언덕을 올라 초록빛 물결치는 남쪽 땅을 바라보았다.
기사들은 매일 같이 땅이 부족하다 하소연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농사짓는 땅’만 부족했다. 세상에는 이름 모를 잡초와 정체 모를 짐승만 돌아다니는 땅이 아주 많았다. 이 구름 평야도 그러했다.
“이렇게 빈 땅이 많은데, 왜 만족하지 못하는 걸까?”
호른 경이 무심코 대답했다.
“언덕이 많아서 농사짓기 좋지 않고, 물과 나무를 구하기 어려워서입니다. 구릉성도 농업보다 목축업을 많이 하지요.”
로벨이 원한 대답은 기사의 욕심, 혹은 인간의 욕심이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호른 경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전쟁의 원인은 결국 농사짓기 좋은 땅, 자원이 풍부한 땅이었다. 이것은 100년이 지나고 1,000년이 지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간은 변하지 않아. 그러니 전쟁도 변하지 않아.”
혼잣말이라 가까이 있는 호른 경 외에는 듣지 못했다. 그래서 깜짝 놀란 사람도 호른 경 밖에 없었다.
“공왕 폐하?”
“응? 왜 그러시오?”
“아니... 아닙니다. 제가 잠시 이상한 생각을 했군요.”
호른 경은 고개를 가로젓고 몇 걸음 앞으로 전투마를 몰았다. 그리고 조금 전 경멸에 가까운 표정과 말투는 애써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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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걷고, 하루를 쉬고, 다시 하루를 걸으니 구름 평야 중심부에 위치한 구릉성에 이르렀다. 전쟁 중에 보급을 위해 들린 적 있지만, 오늘처럼 작정하고 손님으로 찾아간 것은 처음이었다.
“공왕 폐하, 어서 오십시오.”
발 없는 말이 먼저 다녀간 듯 성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고 늙은 마튼 경의 두 아들이 마중 나왔다. 부친의 젊은 날이 절로 연상되는 기사들이었다.
로벨은 주위를 살피는 시늉을 하고 장남 마튼 경에게 물었다.
“앤드류 마튼 경은?”
충성을 맹세한 왕이 왔는데 얼굴 한 번 비치지 않는 것은 무례였다. 그러자 장남 마튼 경이 정중히 사과했다.
“아버지께서는 거동이 불편하여 성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건강이 안 좋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정도였소?”
로벨 일행 얼굴에 불쾌함이 사라졌다. 늙은 마튼 경은 10년 이상 함께 싸운 전우였다. 고참 용병들은 조금씩 친분도 있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가시지요.”
로벨은 모닝스타에서 내려 고삐를 끌었다. 로벨을 처음 본 차남 마튼 경이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가난한 시골 영주도 고삐를 잡는 것은 몸종에게 맡기는데, 왕이란 자가 외로운 방랑 기사처럼 행동했다.
“공왕 폐하, 제가 말을 데려가겠습니다.”
차남 마튼 경은 잘 보일 기회라 생각하고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로벨 일행 표정이 미묘해졌다.
“이게 쉬운 일이 아니오.”
모닝스타가 정말 그렇다는 듯 머리를 앞뒤를 흔들었다. 지 성질머리를 지가 뿌듯해하니 매우 얄미웠다. 그러나 차남 마튼 경은 껄껄 웃었다.
“왕께서 말구종 노릇을 하시니 왕의 기사가 어찌 마음 편하겠습니까.”
로벨은 늙은 마튼 경의 아들들이 언제 충성맹세를 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워낙 많은 기사가 서약해서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게다가 늙은 마튼 경의 체면이 있는데 ‘너희 아들들은 나의 기사가 아니잖아?’ 할 수도 없었다. 입 밖으로 꺼내면 대단히 서운할 말이지만, 언젠가는 작위와 봉토를 물려받을 테니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정 그렇다면... 부디 차이지만 마시오.”
“이 녀석에게 말입니까? 하하! 폐하에 비하면 보잘것없으나, 저 또한 서임 받은 지 7년째로 버팅거 시티 토너먼트에서 준우승을 끼이악크-!”
준우승 이름이 희한해서 다들 돌아보았다. 로벨의 걱정과 달리 차이지는 않았다. 질긴 여물을 콩껍질처럼 으깨는 가지런한 이빨에 정수리를 깨물렸을 뿐이다. 갈 곳 없는 두 팔이 날갯짓하고 찌그러진 눈썹 사이로 핏물이 한 줄기 흘렀다. 아니, 두 줄기였다.
“그러게 조심하라했잖소.”
로벨이 안쓰럽게 위로하고 얼빠진 장남 마튼 경에게 빨리 가자고 손짓했다. 옛 전우의 건강이 염려되어 장난꾸러기 일에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물론, 당사자한테는 장난이 아니었다. 무적무패 왕의 애마를 죽일 수 없으니 놓아줄 때까지 비명을 지를 뿐이었다.
“공왕 폐하! 이 빌어먹을 망아지 좀 치워주시고... 끄아아아-!”
경력자인 허풍쟁이가 혀를 차며 조언했다.
“그 말은 말을 알아듣습니다요. 말 같지 않아도 정말 말 같지 않은 말이죠. 일단 말로 칭찬하면 말을 알아듣고 말을 따르니까 말부터...”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말이 통하는 말이란 말인데, 말은 말을 못하니까 기사 나으리가 말로 달래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는...”
머리가 아픈 것은 모닝스타의 이빨 때문만이 아니었다. 호른 경과 폴라 경은 웃음을 꾹꾹 누르며 로벨을 따라갔다. 이제 심각해야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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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을 쌓아 만든 성(城)은 견고하지만 편안하지 않았다.
여름에는 이글거리는 태양에 달궈져 아궁이처럼 뜨겁고, 겨울에는 외풍이 몰아쳐 살갗을 도려내었다. 계단은 어찌나 높은지 관절의 수명을 갉아먹고 조명은 있으나 마나 한 수준이며 비라도 내리면 오만 곳이 눅눅해져 곰팡이가 시간 단위로 진격해 왔다. 이상의 설명을 한 줄로 줄이면 ‘병자가 요양하기에 좋지 않은 곳’이었다.
“마튼 경, 언제부터 이러했소?”
백발이 성성한, 아니, 그것조차 드문드문 벗겨진 초래한 노인이 오래된 짚을 깔고 누워있었다. 몰골이 영 좋지 않았다. 얼굴은 사흘쯤 굶은 것처럼 핼쑥하고 팔다리는 힘이 하나도 없어 자신의 무게조차 감당하지 못했다. 약해진 몸에 병마가 스며든 결과였다. 전마 위에서 창을 휘두르던 건강한 시절 모습은 찾기 힘들었다.
“나이 탓입니다. 늙으면 몸이 아픈 법이지요.”
“그게 무슨 말이오? 경은 아직 젊소. 20년은 더 싸울 수 있소.”
예순이 넘은 나이라 20년은 좀 심하게 과장했다. 그래도 늙은 마튼 경은 마른 웃음으로 좋아했다.
“기사가 되어 백발이 될 때까지 살았으면 오래 산 겁니다.”
로벨은 억지로 일어나려는 늙은 마튼 경의 어깨를 잡아 고이 눕히고 두 손을 꼭 쥐었다.
“전장에 나가지 않아도 기사는 영원히 기사요. 건강해지시오. 건강해져서 본인을 도와주시오.”
늙은 마튼 경은 한동안 가쁜 숨을 몰아쉰 후 힘겹게 대답했다.
“공왕 폐하는 정의롭고 영리하며 강인하니, 저 같은 늙은이의 도움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잉그비아 왕국의 새로운 왕이 볼탄 반도를 침략하려고 하오.”
늙은 마튼 경이 탄식했다.
“제 아들이, 제 장남이 폐하를 도울 것입니다.”
로벨은 뒤를 돌아보았다. 호른 경과 폴라 경 사이의 장남 마튼 경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분위기를 보아 상속 문제는 이미 끝난 듯했다. 오늘이나 내일쯤에 충성맹세를 받으면 될 것이다. 그리고 늙은 마튼 경은 따뜻한 곳으로 보내 요양하게...
“공왕 폐하. 공왕 폐하.”
늙은 마튼 경이 간절하게 로벨을 불렀다. 로벨은 입꼬리를 올렸다. 미소를 흉내 냈다. 그러나 흉내도 쉽지 않았다.
늙은 마튼 경이 경이로운 체력으로 로벨의 팔을 끌어당겼다. 힘센 로벨이 끌려가는 일은 없었다. 대신 늙은 마튼 경의 상체가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로벨의 귓가에 속삭이듯 물었다.
“공왕 폐하께서는 어찌해서... 어찌해서 늙지 않으십니까?”
생각보다 무시무시한 질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