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89화 (489/605)

489화. 우연

오우거가 무서운 것은 10피트 가까운 덩치와 그 덩치를 유지하는 근골(筋骨)이었다.

어느 수도원 기록에 의하면 가장 왜소한 오우거가 가장 큰 우두머리 소의 머리를 닭 모가지 비틀듯 잡아 뜯는다고 한다. 마도의 관점에서 보면 그런 기록 탓에 오우거가 강한 것이지만, 지금은 선후를 따지지 않기로 했다.

“거인의 힘을 가진 괴물이야! 잡히지 않게 조심해!”

로벨의 지시에 과묵한 몬트와 흉내쟁이 퍼시발이 좌우로 갈라졌다. 거리를 두고 공격할 생각이었다. 반면,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옛 신의 기사단은 쐐기꼴 대열을 유지했다. 헬름 속에서 벌떼가 웅웅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거룩하신 나의 신이여, 적의 피와 살을 바쳐 그대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내 창에 성령이 함께하시니 그 무엇이 두려운가.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울지어다.”

기사단의 찬송가였다. 소문처럼 아름답진 않았다. 소속구마다 가사가 다른지 제각각 떠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소음이었다.

‘본인들이 좋으면 그만이지.’

어차피 오래 감상하지 못했다. 거리가 순식간에 지워졌다.

첫 공격은 이제 유일하게 남은 성십자 기사단 소속의 중년 기사였다. 7피트 길이 참나무 랜스에 몸과 마음을 담아 오우거와 충돌했다. 펑-!

1천 2백 파운드의 무게가 집중된 공격이었다. 창날에서 자루까지 약 2피트가 오우거 복부에 박혔다. 그러나 오우거도 가만히 당하지 않았다. 창에 찔리는 순간 내뻗은 주먹이 성십자 기사의 네발 달린 동반자를 때렸다. 목숨을 도외시한 카운터였다.

오베리아 산 거마는 머리뼈가 으스러지고 뇌가 진탕되어 앞쪽으로 꼬꾸라졌다. 안장 위의 기사도 무사할 수 없었다. 부러진 창과 함께 날아올랐다.

“우아아아-아-악-!”

추락과 동시에 침묵했다. 기절이면 다행이지만, 목이 부러져 죽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생사를 확인하지 않는 것은 전우애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바쁘기 때문이다.

옛 신의 기사단은 오우거를 창꽃이 삼아 마구 찔렀다. 어깨 한 방, 옆구리 한 방, 넓적다리 한방... 오우거는 발악하듯 양팔을 휘둘렀지만 자기 힘에 못 이겨 빙그르 돌다 쓰러졌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기사단의 싸움을 처음 본 젊은 용병과 징집병은 입을 쩍- 벌렸다.

“저게 기사야...?”

“괴물 잡는 괴물이잖아!”

패기에는 못 미치지만, 두 자릿수의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싸우는 자들도 있었다. 과묵한 몬트와 흉내쟁이 퍼시발은 키 작은 고블린을 짓밟으며 오우거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기회가 될 때마다 워 다트와 자벨린을 던졌다.

전력으로 부딪치는 랜스 차칭에 비하면 시시한 공격이지만, 오우거의 무거운 발을 묶기는 충분했다. 그 사이 파이크맨이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여 고블린을 꼬챙이로 꿰었다.

지능이 떨어지는 몬스터도 농사짓는 인간과 칼밥 먹는 인간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큰 담장 뒤로 도망치기 바쁜 지금까지 인간과 달랐다.

혹은 명령을 내려줄 마법사가 없어서 일지도 모른다. 본디 군대는 발맞춰 걸을 줄 아는 군집생물이다. 아무리 힘이 세고 아무리 몸이 날래도 발을 맞추지 못하면 여러 명의 개인일 뿐, 하나의 집단이 될 수 없다. 그리고 개인은 집단을 당해내지 못한다.

“끼이에에에-!”

고블린 한 마리가 등을 돌렸다. 후열의 고블린을 밀치고 넘어트리며 반대방향으로 용감히 돌격했다. 개인의 일탈은 집단의 혼란으로 이어졌다. 삽시간에 열 마리가 도망가고, 스무 마리가 도망가고, 쉰 마리, 백 마리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런...!”

로벨은 피투성이가 된 오우거 등짝에 바바 야가의 창을 찔러 넣었다. 퍼엉- 요란한 폭발과 함께 피와 내장이 쏟아졌다. 그러나 평소처럼 주목받지 못했다. 괴물들은 도망가느라 바쁘고, 인간들은 그걸 쫓느라 정신없었다. 로벨은 갈등했다.

‘저것들을 그냥 보내면 안 되는데...’

그렇다고 추격을 명령할 수 없었다. 인간이 강한 것은 뭉쳐서 창과 활을 쓸 때지, 일대일로 싸울 때가 아니었다.

“폐하! 폐하!”

어린 집사가 미숙한 솜씨로 말을 몰아 쫓아왔다. 그동안 훈련한 보람이 있어 피도 좀 묻혔다. 어느 모자란 고블린인지 몰라도 초짜에게 당해 속이 쓰릴 것이다. 쇠가 장기를 쑤시면 원래 그런 법이다.

“저것들이 도망가요! 오우거도 도망치고 있어요!”

로벨은 반토막 난 바바 야가의 창을 회수하고 고삐를 옆으로 당겼다. 과묵한 몬트 소대와 옛 신의 기사단이 곁으로 모였다. 사나운 눈짓과 거친 숨소리로 물었다. ‘쫓을까요?’ 로벨은 짧은 고민 후 빠른 명령을 내렸다.

“덩굴성 수복이 먼저야. 추격을 멈춰. 병사들을 모아.”

“어? 저것들을 그냥 보내요?”

어린 집사가 당황해서 소리쳤다. 평소와 달랐다. 피를 봐서 흥분한 모양이다.

“잡아야지. 지금 말고.”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어린 집사가 한숨 쉬었다.

“가을 전에 끝날 줄 알았는데...”

자린고비 집사의 푸념은 과묵한 몬트의 나팔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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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무패 기사, 혹은 무적무패 왕으로 유명한 로벨 로드릭이 군대를 이끌고 연거푸 몬스터 대군을 격퇴했다는 소문이 볼탄 반도 각지에 퍼졌다.

성문을 걸어 잠그고 옛 신과 옛 신 비슷한 지역구 토속신에게 기도하던 기사들은 고무적인 소식에 병사를 모아 무적무패 왕을 찾아왔다. 펄프 대장은 기세등등한 봉신들이 덩굴성에 들어올 때마다 실소했다.

“다 이기니까 숟가락 얻는 거 보쇼?”

“원래 그런 거 아니우. 그러려니 합시다.”

그래도 덕분에 로벨 로드릭 군은 4천 5백 명이 넘었다. 소집령을 내려도 쉬이 모이지 않을 병력이었다. 제 발등의 불이 급하긴 급한 모양이다.

로벨은 과거 에릭 프란시스 공작이 그랬듯 가문 단위로 부대를 편성해 몬스터를 소탕하게 했다. 크게 무리 지은 놈들은 괴멸했지만, 덩굴성 앞마당에서 도망간 놈을 비롯해 두 자릿수로 활동하는 자잘한 몬스터가 사방에 있었다. 울프 용병단이 ‘무적...’ 뭐 비슷한 것이라도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와 싸울 수 있는 횟수는 정해져 있었다. 역시 병력은 많을수록 좋았다.

“공왕 폐하... 공왕 폐하...”

그러는 사이 덩굴성의 주인 하롤드 에디즈 자작이 돌아왔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머리와 수염을 다듬고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 충분히 있었을 텐데 일부러 거지꼴로 찾아왔다. 아무래도 부끄럽기 때문이다. 허나, 로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에디즈 가문의 당주 하롤드 에디즈가 볼탄 반도의 적법한 왕 로벨 로드릭 폐하를 뵙습니다.”

성(城)을 버리고 도주한 기사는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는 법이지만, 상대가 포로대접하지 않는 몬스터고, 영주일가뿐만 아니라 영지민까지 ‘잡아먹힐’ 상황이었으니, 불명예라 말할 수 없었다. 오히려 다수의 영지민을 구한 것을 칭송해야 했다.

‘진짜 칭찬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패전은 패전이다. 힘을 보태서 되찾았으면 명예회복이라 할 수 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폐하께서 또다시 저희 가문을 구하셨습니다.”

정통성 전쟁 때부터 세면 벌써 세 번째였다. 로벨은 임시 왕좌에서 일어나 양쪽 무릎을 꿇은 자작에게 다가갔다. 어깨를 두드리고 두 손을 잡아 일으켰다.

“자작은 나의 친구요. 친구에게 도움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오. 일어서시오. 일어서서 자작의 것을 되찾으시오.”

어린 집사가 외팔이에게 눈짓했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눈치가 모자란 외팔이는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왜 그러슈?’ 생긴 것만큼이나 답답했다. 어린 집사는 종아리를 차서 키를 조금 낮춘 후 빠르게 속삭였다.

“의자 가져와요! 의자!”

“의자? 누구 의자?”

“에잇! 에디즈 자작이 앉을 의자요! 공왕 폐하가 성의 주인으로 대하겠다고 하잖아요!”

“아, 그런 뜻이우?”

외팔이가 자기 부하들을 시켜 의자를 가져오게 했다. 헌데 성안의 쓸 만한 가구는 인간과 몬스터가 번갈아 부숴놔서 울프 용병단 마차에서 가져와야 했다. 그때까지 로벨과 자작은 어깨를 붙잡고 뻘쭘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 승리를 축하...”

“음... 고생이 많으...”

“이런, 말씀하시지요.”

“아니오. 먼저 하시오.”

지나치게 불편한 것이 진짜 친구가 맞나 의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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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기였다.

병사, 무기, 보급, 지형 등은 다소 부족해도 임기응변으로 싸울 수 있지만, 사기가 부족하면 싸울 시도조차 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사기 백배하여 몰려온 봉신의 군대는 정예 군대였다.

몬스터 토벌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가끔씩 패전소식이 전해졌지만, 어떤 몬스터를 얼마만큼 잡았다는 승전-을 가장한 자기 자랑-소식이 대부분이었다.

“진즉에 이렇게 싸우면 좀 좋아요? 저 혼자 살겠다고 성안에 틀어박혀서...”

천 년 동안 그랬으니 새삼스럽지 않았다.

더스틴 폴라 경도 토벌에 참가했다. 옛 신의 기사단과 함께 호수성과 늪지성 일대를 수색했다. 전장에서 놓친 오우거를 한 마리 잡았는데, 기사 단독 토벌로는 최고의 공적이었다.

로벨은 은근히 자랑하는 더스틴 폴라 경 보고에 별 감흥을 받지 않았다. 더스틴 폴라 경의 공훈을 우습게 보아서가 아니었다. 그것보다 중요한 소식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공왕 폐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곱슬거리는 밤색 머리와 크고 반짝이는 갈색 눈동자. 코끝은 잘 벼린 해비 랜스 같고, 입가의 미소는 한껏 당긴 롱보우 같았다. 10대의 발랄함과 20대의 건장함과 30대의 노련함을 모두 가진 멋쟁이 기사, 자작나무 숲의 패트릭 호른 경이 돌아왔다.

“호른 경? 호른 경!”

로벨은 메인 홀 좌우에 자리한 기사와 행정관을 무시하고 열 걸음이나 쫓아내려갔다. 지금껏 수많은 기사가 다녀갔으나 이처럼 환대한 기사는 없었다.

“아, 진짜...!”

어린 집사가 불안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보았다. 로드릭 가문의 일급 비밀을 눈치채는 사람이 있을까 불안했다. 다행히 호른 경은 현명했다. 로벨이 손을 뻗자 한쪽 무릎을 꿇고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다.

“공왕 폐하의 명에 따라 잉그비아 왕국을 정탐하고 돌아왔습니다.”

로벨의 애타는 그리움을 충직한 기사의 귀환을 기뻐하는 군왕의 그것으로 바꾸었다.

“아... 아.”

로벨은 간질거리는 손가락을 소매에 숨기고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에드워드 왕가는 어떻소? 흑태자 사후의 동향은?”

역시 연기에 재능이 없었다. 조금도 궁금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호른 경은 충신이었다. 주인이 궁금하게 만들었다.

“이제 에드워드 왕가가 아닙니다.”

그 말을 알아들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직업 만족도가 높은 기사였기 때문이다. 허나, 몇 안 되게 알아들은 사람은 흠칫하고 놀랐다. 로벨은 ‘몇 안 되는’ 무리 중 하나란 것에 자부심을 느껴도 좋았다.

“에드워드 3세가...?”

“에드워드 3세가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습니다. 예정대로 어린 리처드 2세가 잉그비아 섬의 9개 지역을 계승한 새로운 왕이 되었습니다.”

마침 몬스터와 악마추종자가 잠잠한 것이 공교로웠다. 아마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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