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88화 (488/605)

488화. 소리

울프 용병단 710명, 옛 신의 기사단 20명, 로드릭 시민과 마을 징집병 155명, 기타 종군 상인과 사제와 요리와 빨래를 책임질 억센 아낙 62명이 오크 시체를 넘어 해가 뜨는 동쪽으로 출발했다.

전쟁터에 성직자와 식모가 왜 필요한가 묻는다면, 매일 같이 기도를 올리면서 정작 자기 밥그릇은 닦지 않는 기사단 때문이다.

“진짜 기사님도 하인을 데리고 다니잖아요?”

주로 하녀 신분으로 따라다닌 마녀 키르케가 물었다. 어린 집사가 불편한 얼굴로 말했다.

“개인적으로 데려온 수행원이죠. 이렇게 부대 단위로 편성하진 않아요.”

기사단도 할 말은 있었다. 창칼을 차고 있으나 본디 수도사로 청빈(淸貧)을 미덕으로 삼았다. 교회와 가문의 후원을 받지만, 수행원을 거느릴 만큼 넉넉하지 않았다. 사실 넉넉해서도 안 되었다.

“평소에는 어떻게 생활하는데요?”

“수도원에 몸을 의탁한 신자와 순례자가 봉사하죠.”

그 순례자가 뿔뿔이 흩어져서 문제였다.

아무튼, 북적북적해진 로벨 로드릭 군은 동쪽으로 나아갔다. 다행히 보급은 어렵지 않았다. 폐허가 된 마을이 많지만, 의외로 멀쩡한 마을도 많았다. 몬스터가 1천 8백 마리라 해도 숲과 구릉이 많은 볼탄 반도를 모두 헤집고 다니지는 못했다. 숲 속의 작은 마을은 난리가 난 것도 모르고 있었다.

“저 북쪽 어디에서 몬스터가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흉흉한 소식은 들었습니다만...”

“언제 적 소식이야?”

“짐승 가죽을 사러 온 토미 씨, 아, 아니, 행상인이 알려주었으니까 스무날쯤 되었습니다요.”

그것도 당시 기준으로 최신 소식은 아니었다. 정보전달 속도가 한숨이 나올 만큼 느렸다. 물론, 그래서 좋은 점도 있었다.

“인간이 말을 타도 2, 3일이 걸리는데, 몬스터가 벌써 알았을 리 없어요.”

마녀 키르케의 말에 모두 동의했다. 로벨 로드릭 군의 가장 큰 무기는 시간과 정보였다.

“정찰병을 계속 보내.”

과묵한 몬트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과묵해서 말은 안 하지만 고생이 정말 많았다.

기마 정찰대의 역할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적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은 기본이고, 행군로를 확인하고, 보급로를 확보하고, 수원지를 조사하고, 현지의 아군 세력-주로 봉신들-과 기밀한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런 이유로 울프 용병단에서 과묵한 몬트의 기마부대가 가장 비쌌다. 그 다음이 생명수당 붙은 겁쟁이의 포병부대고, 그 다음이 장비값을 챙겨줘야 하는 싸움개의 중장보병 부대였다.

“우리가 여기까지 쫓아온 줄 모를 거야.”

몬스터를 부리는 자가 악마추종자라 해도 로벨의 즉각적인 출진을 간파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첫 전투에서 승부를 봐야 해.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아침 제3시까지 출발 준비하자.”

로벨은 마을의 가축 중 절반은 구매하고 절반을 징발했다. 제값을 치르지 않은 것이 미안하지만, 돌아올 때 약탈하지 않으려면 페닝을 아껴야 했다.

오리, 닭, 염소, 양, 심지어 늙은 개까지 잡았지만, 천 명 가까운 인원이 배불리 먹기는 부족했다. 촌장과 마을주민은 굶주린 용병이 난동을 부릴까 겁먹었다. 울프 용병단을 잘 모르는 걱정이었다. 콩으로 죽을 쑬지언정 사사로이 재물을 빼앗지 않았다.

“예전에 왔던 못된 것들과 다르구만.”

“왕의 군대가 아닌가. 그런 잡놈들과 다르겠지.”

로벨도 정의롭지는 않지만, 반값도 안 주는 영주가 많아 상대적으로 평가가 좋았다. 그렇게 마을 세 곳과 목장 한 곳을 지나자 에디즈 가문의 땅이 나타났다.

“음...”

로벨은 낯익은 풍경에 오른손을 들었다. 펄프 대장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선두 정지!”

“선두 정지!”

먼저 가던 외팔이의 풋맨 부대가 걸음을 멈췄다. 유라피아 대륙 공용어가 서툰 남쪽 출신도 눈치껏 자리를 잡았다. 1천 명의 인파가 조금씩 거리를 좁히며 멈추는 것이 장관이라면 장관이었다.

펄프 대장은 울프 용병단을 살핀 후 혹시 몰라 나직이 설명했다.

“덩굴성까지 7마일 남았습니다.”

준마를 채찍질하면 한두 시간, 수레를 끌고 행군해도 한나절이면 도착할 거리였다. 로벨이 대꾸하지 않자 더스틴 폴라 경이 늙은 말을 몰아 다가왔다.

“너무 조용하지 않소?”

“푸르르릉-”

모닝스타가 쌍심지를 켜고 늙은 말을 견제했다. 거세 안 한 수말이 분명했다. 기사들은 말 못 하는 말의 신경전에 관심두지 않았다. 그것보다 지평선에 관심이 많았다.

“전쟁은 불이오. 어둠과 공포를 쫓아낼뿐더러 산 것을 죽이기 좋으니까.”

로드릭 시티 성벽에서 자욱이 피어오른 검은 연기를 떠올렸다. 성을 지킬 때는 언제든지 불을 쓸 수 있게 준비해야 했다.

“연기가 없어...”

덩굴성 크기의 성이면 이쯤에서 검은 연기가 보여야 하는데, 한여름의 푸른 하늘과 솜뭉치 같은 하얀 구름만 가득했다. 어린 집사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기름이 떨어졌나 보죠. 여름이라서 장작을 준비 안 했거나.”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야전 지휘관답게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다.

“전투 대열로.”

로벨의 아랫사람 중에는 토를 달 사람이 없었다. 충성심이 깊어서가 아니라 로벨의 전술적 판단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 신의 기사단은 아니었다.

“아직 서너 시간을 더 가야 하지 않소?”

“여기서 야영할 생각입니까?”

로벨은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하다가 말했다.

“소리를 들어 보시오.”

옛 신의 기사단은 어리둥절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왕에 대한 존중으로 귀를 기울이는 시늉도 했다.

“아무 소리도 안 나잖소?”

“그러니까 말이오.”

로벨이 미소 지었다. 하얀 얼굴에 빨간 입술이 도드라진 매혹적인 미소였다. 절제된 삶을 살아온 수도원 기사의 마음을 흔들었다. 어쩌면 수도원 출신이라 흔들린 건지도 모르겠다.

“크흠! 크험! 그게 무슨 말이오?”

기사단의 반응이 안 좋아 가식적인 미소를 치웠다. 애초에 웃을 일이 아니었다. 로벨은 욕설을 섞어가며 휘하 부대원을 움직이는 고참 용병을 보았다.

애꾸눈이 직접 지휘하는 크로스보우 중대가 3열 횡대로 전방에 서고, 발가락의 롱 스피어 부대가 후미에 자리잡았다. 겁쟁이 데비 이하 포병중대는 낑낑거리며 좌익으로 수레를 옮기고 있었다.

“그대들이 우익을 맡아주시오.”

옛 신의 기사단은 여전히 납득하지 못했다. ‘이럴 시간에 덩굴성으로 가야 하지 않나?’ 그 대답은 지평선에 걸친 구릉에서 나왔다. 과묵한 몬트 이하 기마 용병 3인이 죽기 살기로 달려오고 있었다. 누가 봐도 좋은 소식을 전하려는 모습은 아니었다.

“역시.”

“역시요?”

로벨은 엉덩이가 무거운 옛 신의 기사단을 흘겨보았다.

“뭐하시오? 안 가시오?”

“가, 가겠습니다. 가야지요.”

옛 신의 기사단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깨달았다. 실로 적절한 판단이었다. 구릉을 넘어온 과묵한 몬트가 ‘조랑말’을 진정시키기 위해 제자리를 한 바퀴 돌았다.

“덩굴성이 함락되었습니다! 에디즈 자작은 성을 버리고 도주했고, 몬스터는 이쪽으로...”

“이쪽으로 오고 있군.”

괴물은 인간처럼 방화하고 약탈하지 않았다. 그저 생식(生食)을 할 뿐이다.

“공왕 폐하!”

과묵한 몬트가 달려온 구릉 위로 그림자가 떠올랐다. 머리 하나에 팔다리 각각 두 개로 사람 현상인데, 크기가 말을 탄 기마 용병보다 커다랬다.

“하나, 둘, 셋... 여섯? 일곱? 아, 여덟 마리인가?”

거인 뒤로 짜리몽땅한 그림자가 계속 나타났다. 어른과 아이의 신장 차이를 아득히 넘어섰다.

“오우거와 고블린이라니, 희귀한 조합이야.”

“맞서 싸워야 입장에서 좋지 않아요.

울프 용병단 이하 인간 군대는 갑자기 나타난 몬스터 군단에 웅성거렸다. 이렇게 갑자기 전투가 시작될지 몰랐다. 그래도 몬스터에 비하면 충격이 덜했다.

예정된 습격이 아닌 듯 몬스터도 크게 당황했다. 성채를 파괴하고 밖으로 나왔는데, 새로운 인간이 턱밑에 꽈리를 틀었다. 인육으로 가라앉힌 흉성(凶性)이 다시 깨어났다. 지나치게 흥분해서 옆 괴물을 때리고 던지며 날뛰었다. 평화협상은 당연히 없고, ‘오늘은 피곤하니까 내일부터 싸웁시다’ 할 것 같지도 않았다.

“이쪽으로 온다!”

“대포 준비! 대포 준비!”

그것은 몬스터 실수였다. 전투준비가 끝난 울프 용병단을, 그것도 정면에서 공격하는 것을 달리 말할 수 없었다.

쿵-! 쿵-! 쿵-! 쿵-!

오우거가 뛰자 땅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바위가 굴러오는 듯했다. 반면 고블린은 쥐떼 같았다.

겁쟁이 데비는 로벨이 있는 중앙군과 점차 가까워지는 몬스터 군단을 번갈아 보았다. ‘아직이야? 아직? 으앗! 나으리! 포격거리 맞다고요!’ 로벨도 거리쯤은 파악했다. 정확히 400야드에 이르렀을 때 소리쳤다.

“점화!”

“점화!”

겁쟁이 데비가 목이 찢어져라 복창했다. 콰과광-! 쾅-!

구경이 작은 팔코넷 포라 위력은 낮았다. 물론, 개활지에서 직격으로 맞은 몬스터는 동의하지 않았다.

오우거의 다리가 포탄에 찢겨 날아갔다. 오우거쯤 되니까 다리 한 짝이다. 착탄 지점의 고블린 두 마리 애처로운 비명을 지르며 튀어 올랐다. 머리가 사라진 고블린은 단말마조차 남기지 못했다. 압도적인 화력에 광기가 한풀 꺾였다.

“역시 아무런 대비가 없군.”

로드릭 시티를 공격한 오크 무리보다 미숙했다. 저것들을 부리는 악마추종자가 누군지 모르지만, 예정에 없는 싸움이라 당황한 것이 분명했다.

“크로스보우 중대, 사격 준비!”

기세가 꺾이고 돌격속도가 줄었다. 사수들의 좋은 표적이 되었다.

“일제사격 후 물러나! 옛 신의 기사단이 옆구리를 찌를 거야!”

우익으로 이동하는 기사단이 마른 침을 삼켰다. 사격이 끝나면 돌격하라는 지시였다.

“옛 신과 성 마르틴이 보우하니 겁먹지 마시오.”

“저 괴물의 배를 갈라 죽은 형제의 영혼을 끄집어냅시다.”

영혼은 모르지만, 육신은 변이 되어 진작 나왔을 것이다. 허나, 분위기가 결연하여 지적하지 않았다.

“발사!”

“쏴! 쏴라!”

어기적거리며 뛰어오던 오우거가 빗발치는 쿼럴에 비명 질렀다. 커다란 머리, 두꺼운 가슴, 기다란 팔과 굵은 다리에 마구잡이로 쇠촉이 파고들었다. 감정이 이입될 만큼 대단히 고통스러워하는데, 치명상은 아니었다. 가죽이 두텁고 근육이 단단해서 뼈와 장기에 닿지 않았다. 어린 집사가 윽- 소리를 냈다.

“죽을 만큼 아프긴 하겠죠. 바늘로 살갗만 찔러도 아픈데...”

오우거가 무릎 꿇자 오우거를 믿고 달려온 고블린이 주춤했다. 저 영악한 괴물은 오크처럼 호전적이지 못했다. 전황과 상관없이 위험하다 싶으면 냅다 도망갈 것들이었다.

“장창병 앞으로. 서두르지 마. 완보로 거리를 좁혀.”

로벨의 명령은 펄프 대장과 허풍쟁이 제이콥을 통해 즉각적으로 하달되었다. 주로 남군(南軍)으로 구성된 스피어맨 부대가 전진했다. 고블린은 피부가 까맣고, 누렇고, 갈색인 인간이 이질적인지 선뜻 덤비지 못했다.

“쿠우우오오오-!”

오우거 한 마리가 고블린을 짓밟으며 튀어나왔다. 가까이서 보니까 끔찍하게 커다랬다. 인어해 남쪽 야만의 땅에는 저런 거구의 괴물이 없었다. 용병의 얼굴색이 하나로 통일되었다.

“역시 보병으로는 안 되나?”

로벨은 어린 집사에게 손을 뻗었다. 어지간한 종자보다 오랜 시간 주인을 모신 집사였다. 바바 야가의 창을 올려주었다. 로벨은 어느새 뾰족해진 나무창을 높이 세우고 외쳤다.

“옛 신과 볼탄 반도의 이름으로! 돌격!”

바야흐로 제2차 몬스터 전쟁이 끝을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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