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90화 (490/605)

490화. 집값

가을밀이 북풍에 익어갈 무렵, 로벨 로드릭 군은 늑대성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여름을 필요 이상으로 뜨겁게 달군 몬스터 소동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고, 계속해서 찾아오는 제후와 기사들로 덩굴성의 재정이 지나치게 나빠졌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면 가을작물을 담보로 빚을 내야 할 판이었다.

“성을 되찾아줬는데 그깟 빚쯤이야.”

“꼭 그것 때문이 아니야.”

잉그비아 왕국의 정세가 불안했다. 흑태자 시절처럼 우호적이지 않았다. 우선 볼탄 반도 재정에 짭짤한 수입이 되어준 북해무역협정이 파기되었다. 굴욕적이고 불공정한 협정이란 이유인데,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죽하면 잉그비아 왕국 원정을 ‘정벌’이라 불러왔을까.

자연히 북해의 지배권이 도마에 올랐다. 북해에서 가장 강력한 해양세력은 잉그비아 왕립해군이다. 글자를 살짝 바꿔서 왕립해적이라 불러도 좋았다. 평시에는 상선을 약탈하고, 전시에는 적함을 가라앉히는 게 일이었다. 이제 협정이 사라졌으니 볼탄 반도 선박을 마음껏 공격할 수 있었다.

“청옥성의 함대가 최대한 막겠지만...”

“아무래도 밀리겠죠. 하아. 바다사자 남작님이 살아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청옥성의 기사가 무능한 것은 아니지만,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 나갈 영웅도 아니었다.

“늑대성으로 돌아가면...”

로벨은 수레 위에 차곡차곡 쌓이는 짐과 기쁨을 감춘 채 배웅 나온 덩굴성 식솔과 마지막까지 눈도장 찍으려는 무명 기사들을 한 번씩 보고 말했다.

“...볼프 사트로 후작에게 사람을 보내.”

“검은 성과 손잡으시게요?”

프란시스 가문은 몰락했지만, 프란시스 가문의 옛 봉신은 그대로 남아 로드릭 가문에 충성하고 있었다. 그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잉그비아 왕국과 악마추종자보단 좋아할 거야.”

그리 말하면 할 말이 없었다. 이번에 겪은 일이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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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비가 한 번 내리고, 보급품이 떨어져 가까운 농장에 신세를 졌지만, 그 외에는 큰 피해 없이 고향 로드릭 시티로 돌아왔다.

“드디어 돌아왔다! 집이다!”

“휴우... 페닝도 좋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쉬었으면 좋겠다.”

어린 집사와 울프 용병단은 물론이고, 짐꾼 역할만 한 징집병과 한몫 잡은 종군 상인도 기뻐했다. 그러나 마음 편히 쉴 수 없었다. 몬스터는 뿌리 깊은 잡초 같아서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뉴 로드릭 마을의 구울을 완전히 소탕하기까지 꼬박 3년이 걸린 것을 생각하면 앞으로 일을 알만 했다. 첫눈이 내릴 때까지 여러번 토벌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이번처럼 대규모로 움직일 필요 없어. 소대 단위로 파견하면 될 거야.”

“그럼 다행이지만... 아니, 그것도 만만치 않네요.”

어린 집사의 고충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크들이 짓밟은 목초지와 축사, 황금 보리 수도원의 수리비를 감당해야 했다.

악의로 똘똘 뭉친 적대국 영주처럼 작정하고 부수지는 않았지만, 병장기를 가진 세 자릿수의 병력이 잠시 머문 것만으로 많은 것이 망가졌다. 리암 수사가 울상이 되어 오크 배설물을 퍼다 버리고 했다.

“전쟁은 불인데...”

“불? 날도 더운데 무슨 불이요?”

“그렇지?”

로벨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고 더스틴 폴라 경을 보았다. 아무 대가 없이 우정만으로 참전한 기사의 표본, 기사도의 자랑이 방치된 휴경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쟁 전에 치운다고 치웠지만 마상시합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여러 제후들이 앉은 관람석도 그러했다. 아쉬움이 많이 남은 모양이다.

“이제 어찌할 거요?”

로벨이 모닝스타를 가까이 붙이며 물었다. 두 말은 여전히 사이가 안 좋은 듯 입술을 뒤집었다.

“잉그비아 왕국과 싸울 것이오?”

“원치는 않소.”

“피하지도 않을 거란 말이군.”

로벨도 염치가 있어 도와 달라 말하지 못했다. 평범한 기사라면 재화와 땅을 대가로 창과 방패를 빌릴 것이다. 그러나 더스틴 폴라 경이 원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공왕의 말을 오랜 시간 생각해 보았소.”

로벨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우선 떠올려야 했다. 정신없이 살다 보니 하나하나 기억하지 못했다.

“흡혈귀의 왕을 죽인다고 흡혈귀의 힘을 얻는 것은 아니겠지.”

“정확히 말하면... 무조건 얻는 것이 아니라...”

“그러나 지금까지 찾은 수많은 불로불사의 비법 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방법이오.”

수은으로 만든 약을 불로불사의 약이라 파는 장사치도 보았고, 동남동녀의 피로 목욕하면 육체가 젊어진다는 사이비 주술사도 보았다. 무엇하나 증명되지 않은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곳 서쪽 땅에서 만난 뱀파이어 군주, 정확히 마도의 수호자는 거짓이 아니었다.

“경이 찾아간 땅에도 수호자는 있었겠지만...”

그 동네 수호자는 좀 소심한 모양이다. 아니면 인간사에 관심이 없거나.

“그러니 좀 더 남아서 지켜볼까 하오. 괜찮겠소?”

로벨은 활짝 웃었다. 강철성 백작과 싸우고 싶으면 잉그비아 왕국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고심 끝에 볼탄 반도에 남았다. 전 세계를 떠도는 기사가 모험심이 부족한 것은 아닐 테니, 필히 로벨을 위함이었다.

“고맙소. 기회가 닿으면 경의 소원을 들어주겠소.”

더스틴 폴라 경도 미소 지었다. 좀처럼 웃지 않는 두 사람이라 어색하고 신기했다.

“공왕이 말하면 거짓도, 빈말도 아닌 것 같소.”

로벨은 마도의 왕이었다. 따라서 거짓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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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높고 휴식은 짧았다. 이제 좀 편해지나 생각한 울프 용병단은 짐 풀기 무섭게 전후복구작업에 투입되었다.

“우리가 용병이지 공사장 인부요? 이런 일은 영지민이 해야지!”

“가을 농사로 바쁘잖아. 겨울에 굶기 싫으면 농사는 지어야지.”

“도심에 잘난 부자들은? 그치들도 바쁘오?”

“걔네는 강제할 수 없잖아. 세금 제때 내면 됐지. 그래야 우리도 봉급 받고.”

펄프 대장이 나긋나긋하게 타일렀다. 옛날 같으면 몽둥이로 시작해서 발차기로 마무리할 텐데, 직위가 높아진 탓인지, 나이를 먹은 탓인지 많이 점잖아졌다.

‘영리해진 거지. 노련해졌다고 해야 하나?’

볼탄 반도의 수천, 수만 명의 용병을 모두 모아도 펄프 대장보다 경력 좋은 용병이 없었다. 그야말로 최고참, 최고령 용병이었다.

타인에 대한 존중을 칼침 먹을 때나 보이는 못 배운 전문직이지만, 고대 왕국 시절부터(?) 활약한 왕의 용병대장이면 열 마디 할 것을 한 마디로 줄이고, 칼부림할 일도 주먹질로 끝내는 존경심을 가졌다.

“자, 이제 그만 입 놀리고 저것부터 치울까?”

그런 용병대장이 허허, 웃으며 쌍심지를 켜니 젊은 용병들은 구시렁거리며 폐자재를 짊어졌다. 불만을 들어줬으니 저녁에 술 한 잔 돌리면 내일도 일할 것이다. 사람 다루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아랫사람이 일을 잘하면 윗사람이 편했다. 로벨은 휴경지와 목초지를 쭉 훑어보고 만족했다. 오크의 피로 죽은 땅은 한 번씩 뒤집어엎고, 망가진 울타리는 쓸 만한 자재를 모아 다시 세웠다. 전쟁의 흔적이 지워지고 있었다.

“채플린 남작이 지원을 요청했어요.”

로드릭 영지와 달리 전쟁이 한창인 곳도 있었다. 초기에 쫓아내지 못한 몬스터가 아예 터를 잡은 동네였다. 기사가 처리하지 못하거나 용병을 고용하기 힘들면 수치를 무릅쓰고 늑대성에 도움을 청했다. 로벨은 해자를 따라 모닝스타를 몰며 말했다.

“저스티스 기사단을 보내.”

“가기 싫데요.”

이번 뒤처리에서 가장 고생하는 사람은 해자에 빠진 시체와 잡동사니를 건져내는 사람이었다. 시내에서 흘려보낸 온갖 오물로 본래도 깨끗한 물이 아닌데, 수십 일간 물에 잠겨 퉁퉁 부은 시체까지 더해지니 악취가 대단했다. 비위가 약한 용병은 여러 번 오바이트했다.

로벨은 모닝스타를 멈추고 어린 집사를 보았다.

“왜? 힘들데?”

로벨은 옛 신의 기사단을 열심히 굴렸다. 전투마를 빌려주고 형제자매의 복수를 도와준 대가를 철저히 받았다. 사흘 이상 쉬게 두지 않았으니, 고행으로 다져진 강철 같은 체력의 기사도 반항할 때가 되었다.

기사단의 신앙심을 얕잡아 보았다.

“그게 아니고요. 상대가 인간인가 봐요.”

인간의 적은 몬스터만이 아니었다. 사실 같은 인간일 때가 더 많았다.

“도적?”

“임금을 못 받고 쫓겨난 용병이나 몬스터 때문에 갈 곳이 없는 피난민이겠죠.”

그런 상대면 로벨도 곤란했다. 로벨이 곤란한 표정을 짓자 어린 집사가 뒷말을 붙였다.

“아닐 수도 있고요. 천성이 도적인 불한당일 수도 있죠.”

성격이 더러워도 몬스터가 싸돌아다니는 이때 도적질을 하진 않을 것이다. 인간을 해친다고 몬스터가 동족으로 여기진 않을 테니까. 오히려 경쟁자로 보고 먼저 제거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도 인간이면 기사단이 나서기 곤란하겠지.”

“제가 볼 때 그 핑계로 쉬려는 것 같지만요.”

로벨은 다시 해자를 보았다. 오크 사다리에 밧줄을 묶어 십여 명이 당기고 있었다. 진흙에 잠겨서 뽑히지 않는 듯했다.

“할 수 없지. 용병을 보내자.”

“울프 용병단도 가기 싫어할걸요?”

로벨은 머리를 가로젓고 세상만물의 조상을 욕하기 시작한 용병들을 보았다.

“저 친구들보고 같이 가자하면 냉큼 따라올 거야.”

이왕 고생할 거면 전투수당을 챙겨주는 원정이 나았다. 어린 집사는 납득하다가 이상함을 느꼈다.

“잠깐? 같이요? 같이?”

로벨이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그... 솔선수범이란 게 있잖아. 오래 걸릴 것 같지도 않고.”

“이 폐하가 진짜? 덩굴성에서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나가요?”

“그렇게 말하지 마. 바가지 긁는 부인 같잖아.”

“마음 같아서는 할퀴고 싶다고요! 아! 알았다! 호른 경이랑 같이 가려는 거죠?”

거듭하여 말하지만, 로벨은 연기를 못했다. 필사적으로 ‘그게 무슨 말이야?’ 표정을 지었지만, 누가 봐도 ‘그걸 어떻게 알았지?’로 보였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잉그비아 왕국이 아니라 신대륙이나 동방대륙으로 보내야 했는데! 아니, 지금이라도 보내버릴까?”

“무, 무서운 소리 하지 마.”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와 지친 몸을 눕힌 호른 경이 부르르- 떨었다. 그 이유는 당장 알 수 없었다.

“여름 감기인가?”

여름 감기보다 지독한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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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이 다시 열리고, 페닝에 굶주린 상인과 여행자가 하나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국경의 모몬트 성과 붉은 산 일대가 심하게 피해를 입어 많은 물류가 북쪽으로 올라갔다. 전부 빚이 될 것이다. 심지어 영주들 사이에서도 권리가 오고 갔다.

어린 집사도 모몬트 영지의 조세권과 벌목권을 가지고 고민했다. 인구가 줄고 숲이 남아나지 않아 당장은 큰돈이 되지 않지만, 이런 권리는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기회가 될 때 사두는 게 좋았다.

“폐하 생각은 어때요?”

“응? 뭐가?”

“그렇군요. 아무 생각이 없군요.”

로벨은 다른 기회를 생각 중이었다. 호른 경과 여행하는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 살인과 폭력, 피와 죽음이 점철된 여행이지만, 아무러면 어떤가. 기사의 삶이 그런 것을. 어린 집사가 들뜬 주인을 외면하고 계속 말했다.

“로드릭 시내 집값이 두 배 가까이 올랐어요.”

“집값이? 왜?”

그래도 고향 일에는 관심이 있었다. 명군이 못 되어도 암군은 벗어났다. 물론, 전쟁 업적이 행정 평가를 잡아먹겠지만.

“그야 안전 때문이죠. 부르주아가 왜 부르주아인데요.”

크지도 않은 빌라가 타닥타닥 붙어있는 성 안에서 사는 것은 편하지도, 유쾌하지도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시끄럽고 냄새나는 삶이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성 안에서 살기를 희망하는데, 가장 큰 이유가 안전이었다.

“재산세를 올릴까요?”

“뭐? 실제로 번 것은 없잖아?”

“그럼 집 팔고 나가면 되죠.”

“...너무 악랄한데?”

성 안의 사람들, 부르주아가 부자인 것이 이 때문이다. 애초에 부자가 아니면 성 안에서 살지 못했다.

“그럼 리암 수사랑 페리 행정관을 불러서 의논해보자.”

“적어도 페리 행정관은 동의할 걸요?”

예산 문제로 골치 썩는 동지가 있다는 게 좋았다. 로벨은 귀찮고 복잡한 일을 뒤로 치우고 무구를 챙겼다. 오늘 오후에 호른 경이 도착할 것이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며 채프라 영지 일을 의논할 생각이다.

“채플린 영지요.”

“채... 뭐라고?”

“정말 아무 생각 없군요. 이게 다 호른 경 때문이야. 망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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