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7화. 생존
로벨에게는 경이로운 무구(武具)가 많았다.
쇠토막을 수수깡처럼 자르는 흐룬팅, 바위에 내려쳐도 이빨 하나 나가지 않는 아론다이트, 마왕 버그베어의 다리를 부수고 심해의 크라켄을 쫓아낸 바바 야가의 창, 그리고 신수(神樹) 파나케아 힘이 깃든 여닫이 투구였다.
어떤 무구가 가장 강하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했다. 덩치가 큰 적과 싸울 때는 필살의 위력을 가진 바바 야가의 창이 유용하고, 일대일 결투를 할 때는 예리한 흐룬팅이 유리하며, 다수가 난전을 벌일 때는 길이와 무게중심이 좋은 아론다이트가 적합했다.
그러나 난전 규모가 세 자릿수에서 네 자릿수가 되면 파나케아 투구가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전장을 한눈에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속보(trot)! 속보로!”
로벨은 고삐를 당겨 속도를 줄였다. 오크의 조잡한 화살이 닿지 않을 거리, 그러나 언제든지 전선에 복귀할 수 있는 거리였다 .
로벨은 자루만 남은 바바 야가의 창을 안장에 걸고 아론다이트를 뽑았다. 그 사이 성문을 나선 울프 용병단이 대열을 갖춰 오크 군단과 충돌했다.
힘 좋고 장비 좋은 용병을 앞세워서 크게 선전했다. 창을 찔러 넣은 후 합심해서 밀어붙이고, 오크가 넘어지면 도끼를 가진 후열의 병사가 마무리했다.
그러나 창은 소모품이었다. 한 번 찌를 때마다 창끝이 무뎌졌다. 갑옷을 때리거나 뼈에 걸리면 금방 부러지고 휘어졌다. 스무 걸음쯤 전진했을까, 초반의 분전이 무색하게 주춤했다. 오크들은 무뎌진 창을 우악스럽게 쳐내고 녹슨 칼과 망치로 달려들었다. 울프 용병단에서 희생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기다려. 조금 더 기다려.”
로벨의 신수 파나케아의 힘으로 모두 보고 있었다. 도리깨로 머리를 깨는 오크, 기뻐하는 오크 가슴에 칼을 쑤셔 박는 용병, 그를 끌어내기 위해 달라붙는 오크와 또 다시 그 뒤를 노리는 용병 따위가 마구 뒤섞여 종래에는 칼을 휘두를 공간조차 나오지 않았다. 얼굴을 할퀴고, 눈알을 후비고, 옆구리를 때리고, 종아리를 깨무는 개싸움이 되었다.
그러자 먼저 움직인 것은 오크 예비병력이었다. 목초지 위에 자리한 오크들이 교착상태에 빠진 저지대 오크를 돕기 위해 이동했다.
“역시 똑똑해.”
로벨이 손바닥 보듯이 보고 있지 않다면 말이다.
로벨은 바이저를 올리고 모닝스타의 목덜미를 두드렸다. 체력이 좋은 블랑크 산 전투마도 격렬한 기마돌격 후에는 지쳐서 헐떡거리는데, 나이도 많은 녀석이 아직 생생했다.
“언덕 위의 적진이 비었소.”
옛 신의 기사들은 목초지 언덕을 힐끔 보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래에서 위를 관찰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걸 어떻게 아시...”
“고지를 점령하는 겁니까?!”
옛 신의 기사도 기사인지라 호기심보다 용맹함이 앞섰다. 로벨은 지친 말을 후미로 보내고 모닝스타를 앞으로 몰았다. 비탈길을 올라 적진을 휘젓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해야 했다.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오. 이 자리에서 전부 죽여야 하오.”
왕 다운 말이었다. 기사와 기마 용병이 모두 동의했다.
“애꿎은 주민이 피해를 입게 둘 수 없지요.”
“형제들의 원한을 갚을 좋은 기회입니다.”
작전은 ‘섬멸’로 결정되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빙그르 돌린 후 창처럼 뻗었다.
“Char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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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흘리개 시절부터 말똥 냄새를 달고 다닌 옛 신의 기사지만, 이와 같은 기마돌격은 경험해 본 적 없었다.
‘뭐, 뭐야? 왜 안 지치는 것이야?’
주인이 이상한 건지, 짐승이 이상한 건지, 로벨과 로벨의 말은 비탈길에서 더욱 속도를 올렸다. 우두머리를 쫓아 달리는 바람의 짐승들은 게거품을 물고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면서도 끝까지 따라갔다. 그 결과 한 번도 쉬지 않고 정상에 도착했다.
“뀌익?”
“뀌이잇!”
언덕의 오크들은 단체로 뒤집혔다. 측면에서 사라진 기사들이 후방에서 나타났다. 그것도 병력 대부분이 전방으로 이동한 지금 말이다.
콧김을 태풍처럼 뿜으며 으르렁거리는 거마들과 복수심에 불타는 쇳덩이 기사들의 모습은 제삼자가 봐도 무시무시했다. 그 적의를 고스란히 받는 오크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전부 해치워!”
로벨은 상체를 안장 밖으로 기울이며 아론다이트를 휘둘렀다. 검로(劍路)가 완벽하게 수평을 이루자 오크의 목뼈가 깔끔하게 분리되었다. 주인 잃은 몸이 쓰러지기도 전에 속도를 올려 따라붙은 기사들이 치고 짓밟으며 지나갔다. 머리와 몸통은 다시 만나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기마술에 능한 기사단은 고삐를 놓고 좌우로 칼을 휘둘렀다. 베기에 특화된 시미터(Scimitar)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풍차처럼 칼질하는 기사도 있었다.
검과 창 외에도 조예가 많은 용병들은 팔뚝만한 워 다트(War Darts)와 프랑시스카(Francisca)를 집어던졌다. 자세가 안 좋고 표적이 작아서 빗나간 것이 많지만, 셋 중 하나는 오크의 몸에 파고들어 피를 짜냈다.
용감하게 맞서 싸우는 오크가 없지 않았다. 로벨의 턱밑에 창이 들어오기도 하고, 모닝스타의 다리가 크게 베일 뻔도 했다. 그러나 30기의 중장기병은 경무장한 오크 100마리가 당해낼 전력이 아니었다. 나중에는 병장기를 휘두를 것도 없이 말발굽으로 밟아 죽였다. 오크들은 자기들끼리 뒤엉켜서 비탈길 아래로 데구루루 굴러 떨어졌다.
“정렬하시오! 정렬하시오!”
로벨은 뭉개진 시체와 망가진 무기와 부서진 울타리 중간에 모닝스타를 세우고 여름꽃이 만발한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크고 작은 빌라가 옹기종기 모인 시가지와 시가지를 수호하는 웅장한 성벽이 아름다우나, 당장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름을 태우는 검은 연기와 인간과 오크가 죽고 죽이는 광경이 강렬했다.
로벨의 좌우로 흉내쟁이 패거리와 옛 신의 기사단이 도열했다. 사람과 말 모두 가쁜 숨을 내쉬었다. 자잘하게 다치긴 했지만 죽거나 죽을 것 같은 이는 없었다.
“푸릉... 푸르릉...”
모닝스타가 앞발로 땅을 긁었다. 눈알이 시뻘겋고 콧구멍이 쉼 없이 벌렁거렸다. 전마(戰馬)의 본능으로 세 번째 전투를 예감했다.
“좋은 위치입니다.”
옛 신의 기사가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말했다.
도시민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말은 비탈길을 잘 달렸다. 사람이 두 발로 오르내릴 수 있는 경사면 전투마도 어렵지 않게 뛰어다녔다. 지금 있는 목초지 언덕이 딱 그러했다. 시야가 넓고 돌격속도를 올리기 좋은 자리였다.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시오.”
기사와 기마 용병이 무기를 새로 꺼냈다. 예비용 무기가 떨어진 기사들은 오크가 쓰던 도끼와 몽둥이를 챙겼다. 이쯤 왔으면 무기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옛 신의 품으로 보내줍시다.”
“거룩한 그분께서 저 끔찍한 생물을 거두어 주실지 모르겠습니다.”
거두지 않아도 인지의 세계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물론, 신성모독이라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수직으로 세워 가슴에 붙이고 앞으로 뻗었다.
“승리를 위하여! 돌격!”
“히이랴-! 이랴-!”
세 번째 돌격이 시작되었다. 언덕 위에서 허둥지둥 도망친 오크와 울프 용병단과 드잡이 중인 오크가 모두 놀라 돌아보았다.
“공왕 폐하께서 오셨다!”
“우리의 왕이다! 무적무패 왕이다!”
피투성이 용병들이 환호하며 당황한 오크를 밀어붙였다. 무적의 망치와 무패의 모루 사이에 놓인 오크들 처지가 딱했다.
“죽여라! 죽여라!”
“전부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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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렬한 오후가 지나고 구슬픈 저녁이 찾아왔다.
황혼의 빛조차 가려진 동문 앞 들판은 오직 시체, 시체, 그리고 시체뿐이었다.
“우웁... 이것들은 뭘 먹기에...”
시체를 끌어 모으는 젊은 용병이 말을 삼켰다. 오크의 주식은 인간이었다. 기분이 안 좋아졌다. 싸움개가 발에 채인 곡괭이를 젊은 용병쪽으로 밀었다.
“이것도 담아.”
“이걸? 완전히 녹슬었는데?”
“모래통에 담아서 굴리든 용광로에 녹여서 다시 만들든 할 테니까 일단 담아. 이것도 안 챙기면 남는 게 없어.”
싸움개가 침을 ‘퉤!’ 뱉고 다른 곳으로 갔다. 젊은 용병은 구시렁거리며 부러진 곡괭이를 수레에 던졌다. 크게 승리한 것치고 분위기가 안 좋았다. 희생에 비해 소득이 없기 때문이다.
“어린 집사가 전투수당을 주겠다는데...”
“그건 당연한 거고! 챙길 게 없잖아! 챙길 게!”
용병은 몬스터를 잘 잡지 않았다. 영주나 농장주인이 웃돈을 주고 고용하면 혹 모를까, 위험에 비해 가치가 없었다. 실제로 몸에 걸친 것을 전부 털어도 10로닝 한 장 나오지 않았다. 젊은 용병은 갑자기 금전에 민감한 사람이 생각났다.
“거 집사 양반 기분이 별로겠는데?”
정답이었다. 어린 집사는 전쟁 피해를 숫자로 바꿔 기록하다가 버럭! 화를 냈다.
“몸값은 고사하고 먹지도 못할 시체처리비용만 나가요!”
“시체처리비용?”
“소각해야 할 것 아니에요! 기름은 땅 파면 나오는 게 아니에요!”
마녀 키르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왠지 깊이 파면 기름이 나올 것 같았다. 공상이었다. 현실에 충실한 어린 집사는 한숨을 푹- 푹- 쉬었다.
“보름 넘게 시장을 못 열었어요. 남쪽지방이 개판이니 개장해도 상인이 오지 않겠지만요.”
어린 집사라고 페닝에 환장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전쟁이 끝나면 보름간의 손실은 치안유지비용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시가지가 불타고 시민이 약탈당하는 것보단 싸게 먹히니 말이다. 그러나 전쟁은 이제 시작이었다. 무기와 갑옷을 손질하는 로벨이 그 증거였다.
“...꼭 가셔야 해요?”
로벨은 깨끗하게 닦인 아론다이트를 노을에 비춰보았다. 오크 열 한 마리를 베었는데 상한 곳이 조금도 없었다. 호수의 요정이 연인에게 남긴 마법검다웠다.
“더스틴 폴라 경과 옛 신의 기사단이 동의했어.”
“그 말이 아니라... 에휴... 우리 폐하 성격상 꼭 가야겠죠.”
로벨은 어린 집사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기사가 명예를 위해 싸우는 것은 당연했다. 내 땅이 위험한데 싸우지 않는 것은 겁쟁이고, 겁쟁이가 되는 것은 죽는 것보다 괴로운 일이었다. 로벨이 살아가는 이 시대에는 상식적인 일이었다.
“모레 아침에 출발할 거야. 날이 더우니까 물을 많이 챙겨줘.”
“그래도 하루씩이나 말미를 주네요.”
어린 집사가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1,200마리의 오크를 섬멸하고 바로 원정을 떠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로벨도 사나흘쯤 푹 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남쪽의 성들은 늑대성만큼 튼튼하지 않아.”
중부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덩굴성을 지켜야 했다. 덩굴성이 함락되었으면 호수성이라도 건사해야 했다. 호수성이 뚫리면 버팅거 시티가 있는 동부평야가 전장이 되었다.
가을이 코앞에 다가온 지금 동부평야를 잃으면 몬스터가 문제가 아니었다. 최소 3만 명 이상의 생존이 걸린 전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