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51화 (451/605)

451화. 포위

국가 간의 전쟁이든 뒷골목 패싸움이든 가장 곤란한 상황이 ‘포위’였다.

이것은 숫자와 상관없었다.

인간의 시야각은 120도가 넘지 않으며, 보이지 않는 곳에 위협은 실질적인 위험 이상으로 무섭게 느꼈다. 앞에서, 옆에서, 뒤에서 적의 외침이 들리면 용감한 용병도 패닉에 빠질 수밖에 없다.

“진정해라! 진정해! 적은 300명이 안 된다!”

그런고로 이런 소리는 효과가 없었다. 게다가 300명이 적은 숫자도 아니었다. 신참 위주로 하나둘 자리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그걸 두고 볼 발가락 슈미츠가 아니었다.

“지원군이 왔다! 재수 없는 북군놈들이 왔다!”

라이벌이란 재미있는 것이다. 적에게 패하는 것보다 경쟁자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자신이 ‘진짜’ 울프 용병단이라 거들먹거리는 북군 앞에서 주눅이 든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죽여서 찢는다! 아, 아니다! 찢어서 죽인다! 가자!”

밤하늘을 닮은 용병이 짐승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지금껏 힘을 아껴둔 것처럼 불사신 용병단을 밀어붙였다.

발가락 이하 남군 일동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북군은 남군의 활약에 아무 감명을 받지 못했다. 자신의 반쪽이 잘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거니와, 그들 이상으로 박진감 넘치는 작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뭐 저런...”

“저거 야만인 나으리 맞지?”

동쪽에서 도착한 기사와 용병은 50명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기세만 보면 500명 이상이었다. 북해, 외해, 인어해를 대표하는 세 명의 기사가 일기당천의 위용을 보였다.

슐츠 경, 아자르 경, 호킨 페럿 경은 볼탄 반도 예비대를 괴롭히는 검은 숲 기사들을 공격했다. 셋 다 일국을 대표할만한 실력자였으니 수차례 돌격으로 지친 검은 숲 기사가 대적할 수 없었다. 한 번의 충돌로 일곱 명이 죽거나 낙마했다.

“폐하가 허락이다! 죽어라! 죽어라!”

아자르 경은 갑옷을 입은 황소, 혹은 강철로 만든 멧돼지 같았다. 랜스 차징으로 기사 하나를 날리고 창이 부러지자 손바닥으로 “어? 어어?”하는 기사 종자의 얼굴을 잡아 안장 밖으로 패대기쳤다. 척추가 심히 걱정되는 위력이었다.

반면, 슐츠 경은 교본 같은 카우치드 랜스 차징의 솜씨를 보여주었다. 랜스 손잡이를 랜스 레스트에 걸고 창날과 창대를 수평으로 유지했다. 1,250파운드의 힘이 쇠못 한 점에 완전히 집중된, 가장 이상적인 랜스 차징이었다. 창끝이 갑옷에 미끄러져 위로 들리거나 창대가 충격에 부러지는 일 따위 일어나지 않았다. 기사의 흉갑을 깨트리고 근육과 뼈를 갈기갈기 찢은 후 백 플레이트를 밀어내며 튀어나왔다. 창끝의 쇠못이 부러졌을 뿐, 랜스 자체는 멀쩡했다.

‘이자들은 대체 뭐지?’

에르나 왕국의 그랜드 챔피언 호킨 페럿 경은 살짝 기가 죽었다. 페럿 경의 무용도 두 사람 못지않았지만, 그것뿐이었다.

‘어디 가서 그랜드 챔피언이라 말도 못하겠군.’

볼탄 반도에는 챔피언급 실력자가 바글바글했다. 그리고 챔피언 중의 챔피언은 누가 뭐라 해도 로벨 로드릭이었다.

“내가 이겼어.”

로벨은 불사신의 심장을 비틀었다. 맥동할 때마다 찢어진 혈관으로 핏물이 왈칵 쏟아졌다. 인간이라면 진작 절명했을 출혈이었다.

“내가 졌다.”

불사신은 힘없이 인정했다. 결투에서도, 전쟁에서도 패배했다. 그러나 자비를 구하지는 않았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누가 또 있어?”

“죽음의 전령이 그대를 찾아갈 것이다.”

“머리 없는 기사?”

“그렇게 부르면 삐지니까 주의하도록.”

“...미안.”

죽지 않는 괴물이기 때문일까, 심장에 칼을 꽂은 대화치고 정다웠다.

그 사이 전황은 시시각각 변해갔다. 애꾸눈이 지휘하는 북군이 전장에 들어서자 불사신 용병단은 손 쓸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무너졌다.

동방에서 얼마나 이름을 떨쳤는지는 모르지만, 앞뒤로 포위된 상황에서 대장까지 잃으니 싸울 기력이 없었다. 둑에 구멍이 난 것처럼 하나둘 새더니 걷잡을 수 없이 사방으로 쏟아졌다.

“쏴라!”

울프 용병단이, 아니, 볼탄 반도가 자랑하는 크로스보우 중대가 일제사격했다. 마녀 키르케가 걱정한 지역 주민은 아무 탈 없을 것이다. 전부 죽거나 사로잡힐 테니 말이다.

“우리도 끝내자.”

로벨 주위에는 로벨의 부하들만 남았다. 호른 경, 과묵한 몬트, 발가락 슈미츠,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울프 용병단 남군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포위했다.

“나는 죽지 않는다.”

“알아.”

“10년 뒤, 100년 뒤, 어쩌면 1천 년 뒤일지 모르나, 나는 다시 돌아온다.”

불사신의 심장은 여전히 뛰었지만, 더 이상 피가 나오지 않았다. 로벨은 천천히 흐룬팅을 뽑았다. 오래된 시체에서 칼을 회수하는 것 같았다.

“그럼 그때까지 푹 쉬어.”

로벨은 흐룬팅 손잡이를 두 손으로 쥐고 사뿐히 휘둘렀다. 새까만 칼끝이 정오 햇살에 반짝였다. 그리고 마침내 죽지 않는 코셰이의 목이 떨어졌다. 세상이 고요해졌다.

로벨은 수평으로 세운 흐룬팅을 천천히 내렸다. 가슴 깊은 곳에 고인 숨이 서서히 뿜어져 나왔다. 발아래를 보니 온통 피였다. 불사신의 피였다. 사람 크기 몸뚱이에 이렇게 많은 피가 있는 줄 몰랐다.

“끝났어.”

전쟁을 마무리하기에 맥 빠지는 대사였다. 호른 경이 워 해머를 머리 위로 흔들며 적절히 의역했다.

“적장이 죽었다! 죽지 않는 코셰이가 죽었다!”

어감이 좀 이상하지만,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다. 싸우는 병사, 도망가는 병사, 항복하는 병사, 죽은 척하는 병사가 모두 호른 경을 보았다. 로벨은 아끼는 수행기사의 실수를 지적했다.

“적 지휘관은 사실 밤나무 고을의 다미앵 경...”

그러나 절대다수의 인간은 진실에 관심 없었다. 아무튼 잘난 놈이 죽었고, 남은 놈은 도망간다는 것이 중요했다. 로벨의 목소리는 거센 함성에 파묻혔다.

“볼탄 반도의 승리다! 무적무패 왕의 승리다!”

“항복하지 않는 자는 모두 죽여라!”

“항복! 항복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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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는 제3시에 시작해서 제6시에 끝났다. 그러나 뒷정리는 다음 날 아침까지 쭉 이어졌다.

시신을 수습하고, 전리품을 챙기고, 항복하거나 사로잡힌 포로를 분류하고, 화풀이 좀 하고, 공적을 확인하고, 향후 계획을 의논했다.

“제임스 공작에게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그냥 넘어가서 안 됩니다.”

존 도너반 자작이 책임론을 꺼냈다. 다미앵 경을 비롯한 검은 숲 기사들의 증언을 검토하면 제임스 공작이 배후에 있는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증거가 없고 부담이 너무 컸다. 정치 문제는 덤이었다.

“변절자가 가장 악질이라더니...”

“뭐? 지금 뭐라고 했소?”

켈트 경은 격렬한 항의에 움찔했으나 기죽지 않았다.

“도너반 가문은 제임스 가문의 봉신 아니었소? 옛 주인을 모함하는 게 우스워서 하는 말이오.”

정말로 옛 주인 때문에 비난하는 것은 아니었다. 검은 숲 출신이 발언권을 가지는 게 못마땅한 탓이었다. 그런데 상대를 잘못 골랐다.

“그러는 켈트 가문도 프란시스 가문의 개가 아니었소? 아하, 그래서 그리 잘 아는군?”

“...개라고 했소?”

“이런! 내가 개라고 했소? 실수했군. 개만큼이라도 됐으면 배신할 리 없는데.”

“이... 이자가 진정...”

“왜? 결투라도 신청하시려고? 공왕 폐하와 볼탄 반도를 지키기 위해 피 흘려 싸운 본인에게? 그거 좋지! 해보시오.”

혀를 쓸 일이 많지 않은 토종 기사가 상대하기 어려웠다. 켈트 경은 부들부들 떨며 가죽 장갑을 벗었지만 차마 던지지 못했다. 로벨은 자존심이 더 상하기 전에 중재했다.

“두 사람 다 그만하시오.”

직위로 보나 권위로 보나 로벨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처럼 핏자국 가득한 갑옷 차림이면 부모의 원수가 앞에 있어도 참아야 했다.

“켈트 남작의 말은 증거 없이 공작의 명예를 훼손하지 말자는 것이오. 그리고 그 말은 일리가 있소.”

“공왕 폐하!”

존 도너반 자작이 답답한 듯 소리쳤다. 호른 경, 아자르 경, 바이란 경 등이 인상을 찌푸렸다. 누구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느냐는 질책이었다.

“무,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결코...”

“내 말을 끝까지 들으시오.”

로벨은 짧게 한숨 쉬었다. 영리한 부하는 자기주장이 강해 피곤하다.

“증거 없이 책임을 물을 수 없소. 하지만 의무는 강요할 수 있지.”

“의무... 말씀입니까?”

“검은 숲 기사들의 몸값을 요구할 것이오.”

그래도 이해는 빨랐다. 존 도너반 자작은 듣자마자 감탄했는데, 호른 경 등이 어리둥절해서 다시 질문했다.

“기사의 몸값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본인 가문에서 내는 것이 우선 아닙니까?”

“저들 중에 몸값을 낼 수 있는 가문이 몇이나 되겠소?”

다미앵 경 이하 검은 숲 참전 기사들은 전쟁준비로 막대한 빚을 지었다. 거기다 머를 브릭 경이 신나게 마을과 농장을 털어먹었다. 몸값을 요구해 봐야 치즈 한 조각 바치지 못할 것이다. 마녀 키르케가 눈을 반짝이면 물었다.

“제임스 공작님이 대신 내줄까요?”

“안 내도 상관없어. 불신을 심어줄 테니까.”

주종관계라 해도 일방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어려울 때 돕지 않으면 필요할 때 도움받지 못하는 법이다.

“몸값을 내면 재정문제로 싸우지 못할 테고, 안내면 기사들의 신뢰를 잃어 싸우지 못하겠군요?”

“그만한 액수를 불러야겠지만.”

여기서 명분이 작용했다. 전쟁을 시작한 것은 검은 숲이었다. 쉬폰 가문이 금광을 공격했고, 다미앵 가문이 까마귀 성을 공격했다. 즉, 전쟁 책임을 물어 몸값을 얼마든지 높여 부를 수 있었다.

“밤나무 고을의 기사는 주동자니까 한 10만 페닝쯤 요구하고, 나머지 기사들은 2만... 아니, 3만 페닝을 요구하죠. 그럼 총 얼마지?”

어린 집사가 포로 숫자에 페닝을 곱하며 ‘히히힛!’ 웃었다. 명예로운 기사들을 금화 자루로 여기는 것이 악마도 울고 갈 태도였다.

“그 몸값은 까마귀 성 수리에 쓸 거야.”

“아, 왜요!”

“우리를 위해 싸웠으니까.”

어린 집사는 포로를 잡은 슐츠 경, 아자르 경, 호킨 경에게 강렬한 눈빛을 보냈다. 어서 로벨에게 바치라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세 기사는 포로 문제에 관심 두지 않았다. 전투 막바지에 참전해 놓고 권리를 요구할 만큼 후안무치하지 않았다.

로벨은 낙담한 어린 집사를 다독이며 말했다.

“제임스 공작은 그렇게 처리하기로 하고, 다음 문제가 있어.”

“또 있어요?”

“응. 듀라한이야.”

치졸한 공작의 야비한 수작보다 몇 배, 몇 십 배 더 큰 문제였다. 펄프 대장이 주름을 잡고 물었다.

“그 괴물도 용병을 이끌고...”

“죽음의 전령이 인간과 다닌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어.”

뱀파이어 군주나 불사신은 그래도 인간처럼 생겨서 인간과 어울려도 위화감이 없는데, 머리 없는 기사가 군대가 끌고 다니면 이상했다.

“그럼 다른 방법으로 찾아오겠군요.”

그것도 썩 즐거운 방법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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