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50화 (450/605)

450화. 선물

파나케아 투구의 바이저를 내리고 아론다이트를 뽑았다.

마상용 랜스를 가져오지 않은 것이 잠깐 후회되었지만, 불사의 수호자가 관통상에 죽을 리 없으니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바바 야가의 창이라면...’

일격필살의 마법창은 조금 아쉬웠다.

“공왕 폐하! 폐하!”

호른 경이 기마 용병 패거리와 함께 따라붙었다. 모닝스타가 작정하고 달리면 평범한 말은 따라올 수 없으니 쫓아오기를 기다린 셈이다. 호른 경도 그걸 알기에 혼자 가면 안 된다는 둥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측면으로!”

로벨은 아론다이트로 오른쪽으로 가리켰다. 소리를 듣지 못한 후미의 용병도 번뜩이는 반사광에 바로 이해했다. 고삐를 옆으로 당기고 아랫배를 가볍게 때렸다. 열셋 필의 말이 전장을 비스듬히 쪼갰다. 오른쪽은 볼탄 반도 군대, 왼쪽은 검은 숲 군대였다. 그리고 곳곳에서 충돌이 일어났다.

켈트 경이 지휘하는 볼탄 반도 기사들이 적의 좌익을 찢어발겼다. 검은 숲 기사들이 요격을 나왔으나 첫 회전에서 크게 당한 터라 숫자도, 기세도 부족했다.

검은 숲의 우익 역시 볼탄 반도의 좌익을 공략했는데, 까마귀 성 수비대로 구성된 좌익은 악과 깡으로 첫 돌격을 막아냈다. 아니, 냉정하게 말하면 버텨냈다. 스무여 명이 창에 꿰이고 말발굽에 짓밟혔지만 도망가지 않았다. 허나 두 번은 버티지 못할 것이다.

‘한 번이면 충분해.’

랜스를 소비한 검은 숲 기사들은 재정비하기 위해 수행원이 있는 곳으로 물러났다. 그 다음은 살필 겨를이 없었다. 로벨 일행은 울프 용병단을 빙 돌아 ‘불사신’을 공격했다.

“코-셰이!”

남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불사신은 금방 눈에 띄었다. 덩치가 아니어도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검은 피부의 모나카 왕국 출신 용병을 머리에서 명치까지 쪼개고 있었다.

“로벨 로드릭.”

깨진 투구를 그대로 쓰고 있어 눈과 입이 잘 보였다. 로벨의 이름을 기쁘게 불렀다.

로벨은 걸리적거리는 적 용병을 모닝스타로 밀었다. 모닝스타는 힘세고 영악하여 창을 세우면 펄쩍 뛰어 짓밟고, 방패를 내밀면 머리로 박아 넘어뜨렸다. 과묵한 몬트와 흉내쟁이가 좌우에서 보조를 맞추니 갈고리에 걸리거나 발목이 베일 일도 없었다. 폭력적이면서 안정적으로 불사신이 있는 전장의 중심에 이르렀다.

“이곳이 현세다.”

삶과 죽음이 갈리고, 고통과 공포에 직면한 전장은 ‘현실’에 가장 충실한 곳이었다. 이곳의 인간은 내일은 고사하고 1분 뒤의 미래에도 관심이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며, 두 팔로 할 수 있는 것이 모든 것이었다. 옛 신에게 기도하고 사후세계를 걱정하는 것은 자신을 죽이려는 칼을 치운 다음에 할 일이었다.

“인지의 피조물이 있을 곳이 아니다. 하여, 마도의 수호자도 죽을 수 있다.”

로벨의 아론다이트가 땅으로 떨어지고, 불사신의 배틀 엑스가 하늘로 치솟았다.

쾅-!

부싯돌을 친 것처럼 불꽃이 터졌다. 부싯돌이 철과 석영에 의한 화학작용이란 것을 생각하면, 쇠와 쇠가 부딪쳐 불꽃이 생기는 게 얼마나 황당한지 생각해볼 만했다. 인간의 힘이 아니었다.

로벨은 고삐를 놓고 튕겨 나온 아론다이트를 양손으로 잡아 다시 내리찍었다. 불사신 또한 몸을 비틀어 땅에 처박힌 도끼머리를 다시 올렸다. 콰과광-! 첫 번째보다 크고 선명한 불꽃이 터졌다. 가까운 곳에서 드잡이하던 용병들은 처지를 잠시 잊고 대장들을 보았다.

“저런 인간이 또 있네...?”

어느 쪽 용병 입에서 나온 말인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같은 생각이었다.

로벨은 모닝스타에게 온전히 몸을 맡기고 전심전력으로 칼을 휘둘렀다. 얼마나 빠른지 검광만 번쩍였다.

불사신은 모닝스타를 먼저 쳐서 로벨을 끌어내릴까 생각했지만, 시도하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딴짓하면 요정의 검이 목을 치고 덤으로 팔 한두 개쯤 잘라갈 판이었다.

‘기사의 왕이라더니, 칼과 말(馬)로는 못 당하겠군.’

크고 두꺼운 무기를 골라왔는데도 버티지 못하고 조금씩 깨져갔다. 이대로 가면 영성을 잃는 것은 ‘무적무패’가 아니라 ‘불사’가 될 것이다.

‘그렇게는 안 되지.’

불사신은 마지막으로 아론다이트를 쳐낸 후 구르듯이 뒤로 물러났다.

“이 자가 볼탄 반도의 왕이다! 죽여라! 죽이면 왕이 될 수 있다!”

로벨은 인간을 끌어들이는 수호자 모습에 당황했다. 늑대의 왕이나 죽지 않는 왕과 너무 달랐다.

“아, 그래서 왕이 아닌가?”

좋게 말하면 영리하고, 솔직히 말하면 영악했다. 별명이 노인인 이유가 있었다.

길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불사신 용병단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저리 비켜!”

로벨은 겨드랑이로 날아드는 창을 팔꿈치로 막고, 배틀 훅(Battle Hook)을 걸려는 용병 가슴에 칼날을 담그고, 모닝스타의 아랫배를 차 슬금슬금 다가오는 용병에게 뒷발차기를 날렸다.

동방에서 온 탓인지, 아니면 우두머리가 ‘불사신’인 탓인지, 기사 무서운 줄 모르고 무적무패 무서운 줄 몰랐다. 덕분에 정신없는 싸움이 벌어졌다.

“공왕 폐하! 물러나야 합니다!”

호른 경이 부족한 손을 거들며 말했다. 로벨은 대형 낫으로 모닝스타의 다리를 노리는 적을 서배튼으로 찬 후 멀리 보았다.

켈트 경이 이끄는 돌격대가 적의 좌익을 분쇄했다. 거의 동시에 검은 숲의 우익도 아군의 좌익을 무너뜨렸다. 예비대로 빼놓은 봉신들의 군대가 잠시 막겠지만, 정말 잠시였다. 이제 난전을 피할 수 없었다. 로벨은 불사신을 힐끔 보고 말머리를 돌렸다.

“지금 당장 아군을 도와...”

“어딜 도망가는가!”

무기를 바꾼 불사신이 다시 공격했다. 자루가 7피트쯤 되는 긴 철퇴라 아론다이트로 반격하기 좋지 않았다. 로벨은 칼끝을 겨누어 몇 번 쳐낸 후 안장 뒤로 훌쩍 뛰어내렸다.

“폐하!”

호른 경이 애타게 소리쳤다. 사방이 적일 때는 두 발로 싸우는 것이 유리했다. 그러나 ‘싸우는 것’ 외의 선택지를 포기한 일이다.

“...줄 생각 없었어!”

말머리를 돌린 것은 속임수였다. 지금 불사신을 해치우지 않으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었다.

“멍청한 왕! 죽어랏!”

로벨은 주제를 모르고 끼어드는 용병 아랫배에 아론다이트를 꽂은 후 그대로 밀고 갔다. 당황한 적 용병들이 ‘방패’에 창칼을 찔렀다. 간신히 숨만 쉬는 방패가 아군 공격에 절명했다.

“그럼 못 다한 승부를 내자!”

불사신이 철퇴를 우에서 좌로 크게 휘둘렀다. 로벨은 시체 방패 뒤에서 몸을 낮췄다. 족히 25파운드는 될 쇳덩이가 시체의 머리통을 부수고 로벨 정수리를 스쳐 갔다.

“...잔인해.”

“그대가 할 말이 아니지!”

로벨은 머리 없는 시체를 바로 차 밀며 아론다이트를 뽑았다. 불사신은 입꼬리를 올리고 좌에서 우로 다시 철퇴를 휘둘렀다. 이번에는 피하기 힘들게 허리를 노렸다. 가까운 곳에 부하들이 기겁하며 물러났다.

“이것도 피해 봐라!”

괘씸한 도발이었다. 로벨은 요구대로 앞으로 뛰어들었다. 가장 무거운 철구는 피하고 자루를 오른팔로 막았다. 불사신이 다시 미소 지었다. 마침내 짜증나는 칼을 봉쇄했다. 창대를 앞으로 밀며 거리를 2피트까지 좁혔다.

힘은 엇비슷하지만, 몸무게에서 차이가 났다. 레슬링이 되면 말 위에서 병장기를 부딪칠 때와 다를 것이다. 그러나 머나먼 동방에서 온 불사신은 앞서 싸운 수호자에게 배우지 못한 것이 있었다. 로벨의 진짜 이빨은 아론다이트가 아니었다.

“음...”

입 냄새를 맡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우뚝 멈췄다.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었다. 불사신은 철퇴를 놓고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첫 번째 의문은 ‘언제?’였다. 칼자루에 비해 유독 짧은 칼날이 명치를 뚫고 있었다. 어지간해서 상처입지 않고, 상처 입어도 바로 재생하는 몸이 꼼짝하지 못했다. 평범한 칼이 아니었다. 그래서 두 번째 의문은 ‘이게 뭐지?’였다.

“흐룬팅이야.”

로벨이 속삭이듯 말했다. 불사신은 급히 떨어지려고 했지만 놓치지 않았다. 한 걸음 물러나면 한 걸음 쫓으며 상처를 후벼 팠다. 놓아주면 즉시 회복할 것이다.

“온몸에 피를 짜내면, 아무리 죽지 않는 괴물이라도 쓰러지겠지?”

로벨과 달리 정답이라 칭찬할 수 없었다. 실제로 250년 전 말라비틀어져 사로잡힌 적이 있었다. 바바 야가가 생명의 물을 가져다주지 않았으면 지금도 산 속 깊은 감옥에 묶여 있었을 것이다.

“나는 죽지 않는다. 그러나 왕의 영광은 오늘로 끝이다. 훗날 내가 다시 돌아오면...”

“누가 끝나?”

로벨은 칼날을 심장까지 끌어올렸다. 불사신의 부하들이 두목을 구하기 위해 달려왔지만 호른 경이 차단했다. 이어서 발가락이 울프 용병단을 밀어붙였다. 사방에서 피가 튀고 뼈가 으스러지는 가운데, 두 명의 수호자는 고저 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내 목적은 왕의 영성을 꺾는 것이니, 그대의 패배가 곧 나의...”

“그러니까, 누가 졌다고?”

로벨은 정말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코셰이는 이 얼빠진 수호자가 전세를 못 읽는 게 아닐까 의심했다. 물론, 그럴 리 없었다.

“난 무적무패란 말을 좋아하지 않아. 사실 무적이 아니니까. 언젠가 영성이란 것을 잃고 지는 날이 올 거야.”

로벨은 흐룬팅의 칼날을 비틀어 오른쪽으로 그었다. 사슬갑옷이 종이처럼 찢어지고 심장이 드러났다. 죽지 않는 괴물도 심장은 하나였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로벨에게는 기사와 군대가 남아 있었다. 그것도 아주 강한 기사와 아주 많은 군대였다.

부우우우우우-!

북쪽에서 뿔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귀가 있고 숨 돌릴 틈이 있는 병사는 모두 나팔 소리를 찾았다. 그러나 한 곳이 아니었다. 동쪽에서도 뿔나팔이 울었다. 부우우-! 부우우웅-!

“고르크 슐츠 경, 나마르 아자르 경, 그리고 호킨 페럿 경.”

그리 궁금해 하는 것 같지 않지만,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내 친구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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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앞이라 여유로운 척했지만, 사실은 꽤 긴박했다.

가시나무 성의 브릭 자작이 밤나무 고을을 비롯한 검은 숲 영지를 약탈하는 동안, 로벨은 자신이 말한대로 ‘경험해보지 못한 선물’을 준비했다.

뱀의 계곡에서 밤을 새워 달려온 슐츠 경이 눈두덩이를 누르며 물었다.

“그게 무엇인가?”

“죽지 않는 괴물이 경험하지 못한 거면 뭘까요?”

“...설마 ‘죽음’인가? 보통 사람도 살아 있으면 경험하지 못하는데?”

“앗! 그런가요?”

마녀 키르케가 매우 심각해졌다. 로벨치고 멋진 말이라 생각했는데 듣고 보니 아니었다. 하지만 진짜 심각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난 전쟁 포로지 객장(客將)이 아니다! 이거 포로 학대 아니더냐?”

호킨 페럿 경이 불만을 토했다. 늑대성에 남은 사람이 없어 관리차 불려온 페럿 경은 짐말을 구하는 일부터 별동대를 이끄는 일까지 온갖 잡일을 도맡아 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몸값은 받은 걸로 해주겠다고 했어요.”

“몸으로 갚으란 것이군! 제길, 할 말이 없다.”

명예를 지키지 못한 기사는 본디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었다.

“저쪽이 북군이고, 지금 싸우는 것이 남군인가? 언제가 좋겠나?”

슐츠 경이 물었다.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인 순간인데 저녁 메뉴를 고르듯 평온했다. 반면, 아자르 경은 흥분해서 갑옷을 쾅쾅 두드렸다.

“지금! 죽인다! 폐하가 구한다! 폐하가 만세다!”

문장은 엉망이지만 충성심은 가득했다. 북쪽에서 합류한 애꾸눈 부대도 같을 것이다. 나팔소리가 한 번 더 울려 퍼졌다. 세 기사는 동시에 말을 몰았다.

“그래. 공왕 폐하 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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